앞서 중종에 대한 글에서 이미 그가 경빈 박씨(敬嬪 朴氏)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福城君)을 얼마나 아꼈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중종은 분명 경빈을 중전에 앉히려 했고, 복성군을 세자로 삼길 원했다.
1515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세상을 떠났을 때, 중종은 경빈을 중전에 앉히려 했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윤임의 친척인 문정왕후를 중전으로 맞이했다.
“상께서 원자를 바꾸려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복성군을 총애했지만, 마찬가지로 대신들을 꺾지 못하고 1520년 인종을 세자로 책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중종은 희망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경빈의 청탁을 들어주어 그녀에게 사람들이 모이게 했으며, 그녀의 자식들을 유력 가문에 혼인시켜 든든한 뒷배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던 중 1524년부터 인종이 서연에서 ‘말없이 가만히 있다’는 지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중종에게 더없이 좋은 명분이 되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중종은 경빈과 복성군을 총애하는 마음이 컸다.
더욱이 국왕의 입장에서도 인종의 지능 문제는 단순히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중종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을 법하다.
'나도 이렇게 끌려다니는 판국에, 쟤가 왕이 된다면? 어휴, 이씨 왕조가 끝장날지도 모른다. 안 돼!'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조선 사회는 철저히 유교(儒敎) 사상이 지배했다.
인종은 엄연한 중종의 적장자였고, 따라서 그가 중종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어야 했다.
남곤을 비롯한 대신들과 사림 세력이 인종을 지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박원종 역시 이 사실을 알았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그의 외조카를 중전에 앉혔던 것이다.
결국 인종과 복성군의 싸움은 인종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기저에 두고 보면, 중종이 인종의 빈객과 서연관들을 처벌한 사건도 달리 보인다.
『전교하기를, "비록 나이 어려 글뜻을 해득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평소에 논란하여 귀에 익도록 해야 되기 때문에, 논란한 말들을 서계(書啓)하도록 했던 것은 논란한 말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서연에서 부지런히 하는지 태만하게 하는지를 알려고 한 것인데, 2월 이후로는 한 번도 서계하지 않았으니 이는 일찍이 논란하지 않은 것이다.
빈객 및 서연관들을 모두 추고(推考)하도록 한 것은 깊이 죄를 다스리려는 것이 아니라 다소라도 이를 징계삼아 힘써서 강론하게 하려는 것이다."』 (《중종실록》 1525년 8월 8일)
즉, 인종이 서연 중에 논란한 말들을 서계하도록 지시했는데, 2월 이후로 낸 적이 없으니 논란을 하지 않은 게 분명하므로 스승들을 벌하겠다는 내용이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2월부터 그랬다면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왜? 그것도 빈객과 서연관들을 불러다 말로 하면 될 일을 굳이?
내 생각에, 서계하도록 지시한 것은 ‘세자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명분 쌓기의 일환이며, 스승들을 처벌한 것은 이를 공식적으로 대외에 알리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이건 중종이 인종의 지능 문제를 빌미로 세자 교체를 노리고 추진한 선제적 움직임이라고 볼 수 있단 얘기다.
이에 대한 대신들의 반응은 중종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삼공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나가므로 회강(會講) 일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다만 지금 홍숙(洪淑)의 말을 듣건대 ‘날마다 진강하며 종용히 논란하여 묻지 않는 때가 없었고 답변하지 못하는 말도 없었다.’ 합니다. 신들이 일찍이 시강원 관원들에게 듣건대 ‘세자께서 어떤 말을 물었는데 답변하지 못했다가 어느 책을 고찰해 보고서야 알았고, 어떤 책의 글을 물었는데 대답하지 못했었다.’고 했었으니, 이로 본다면 일찍이 강론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시강원 관원들이 자주 체직되어 2월 이후의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문하실 때에 당해 시강원 관원이 잘못 헤아리고 주대(奏對)한 것인가 싶습니다."』 (《중종실록》 1525년 8월 8일)
남곤 등이 언급한 홍숙은 경빈의 차녀인 혜정옹주의 남편 홍여의 할아버지였다.
이 당시 홍숙은 병조판서였는데, 세자 빈객을 겸하고 있었기에 남곤 등이 그를 소환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남곤 등의 말은 곧 '경빈과 사돈인 홍숙조차도 세자가 괜찮다고 하는데, 넌 지금 무슨 근거로 세자를 문제 삼느냐? 네가 하도 시강원 관원들을 갈아치우다 보니까 걔가 뭘 잘 모르고 대답한 것 같은데?' 정도 되겠다.
즉, 중종의 지적을 정면으로 들이받은 것이다.
난 이때 홍숙이 거짓말을 했다고 본다.
중종이 직접 왕명으로 지시를 했는데 2월 이후로 하나도 낸 게 없다면, 정말 논란을 한 적이 없단 얘기다.
그리고 인종이 서연 때 '말없이' 가만히 있다는 증언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 순간에 홍숙이 '나랑 있을 땐 묻기도 하고 대답도 잘 하던데?' 이렇게 나오면서 발을 빼버렸으니, 중종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던 것이었을 터.
나는 이 대목에서 2004년 대히트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명장면이 떠올랐다.
(한기주) "저 남자가 내 사람이다. 저 남자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 하냐고!"
(강태영) "이 꼴을 하고서 어떻게 그래요!"
이걸 중종과 홍숙에게 적용해 보면, 묘하게 들어맞는다.
(중종) "하아... 내가 이렇게까지 판을 깔아줬는데도... 홍숙, 너 경빈 사돈 아냐? 세자가 논란한 적이 없다, 저 사람 뭔가 이상하다. 왜 말을 못 하냐고!"
(홍숙) "너도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한편으론 홍숙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싸움은 서자인 복성군 측에 너무나도 불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당장 홍숙이 '그렇다. 인종이 서연에서 논란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더라도, 그 외에 시강원 관원들이 '그렇지 않다.'고 진술했기에, 인종 측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처벌받을 것이 뻔했다.
'홍숙은 경빈의 사돈이 아니냐? 그러니 저자가 인종을 모함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고 발을 빼면 어떻게 된다?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다.
홍숙이 결정적 순간에 발을 빼버림으로써 중종은 세자 교체의 원동력을 상실했고,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가장 좋지 않았던 것은, 윤임 등 인종 지지세력으로 하여금 '와! 저렇게 나서리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X될 뻔했다! 저것들 가만둬선 안되겠는데?'라고 경각심을 갖게 했음에 있다.
훗날 손자 홍여가 매 맞아 죽고, 가문이 풍비박산 나는 걸 보면서 홍숙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후 남곤은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짚었다.
『남곤이 아뢰기를, "전일 성상의 분부에 세자께서 학문이 더디게 터지지 않을까 염려하셨는데, 부모가 아들 사랑하는 지극한 정은 상하가 다름이 없는 법이니,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세자께서 자품이 진실로 범인과 다르신데, 도리어 신들이 무상(無狀)하여 사부의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자께서 나이 겨우 10여 세이니 학문하는 데 또한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지난번에 서연관들이 추고받은 일이 만일 외방에 전파된다면, 외방 사람들이 반드시 세자께서 학문에 태만하여 그런 것이라 할 것입니다. 세자의 일을 누군들 들어서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진실로 이 때문에 마음이 미안했습니다."』 (《중종실록》 1525년 8월 28일)
남곤의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난 이걸 '네가 세자가 공부 못한다면서 그의 스승들을 벌주면 밖에서 어떻게 생각하겠냐. 세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냐는 말이 돌 거 아니냐. 네가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모양인데, 허튼짓 하지 마라.'라는 뜻의 압박으로 본다.
중종 역시 남곤의 속뜻을 눈치채고, 이렇게 대답했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에 빈객과 서연관을 추고한 것은, 세자가 듣고서 스스로 힘쓰게 되고 또한 아랫사람들이 교훈(敎訓)에 힘쓰도록 하려 한 것이다."』 (《중종실록》 1525년 8월 28일)
이후에도 중종은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인종 교육에 대한 관심이 식었고, 이는 신하들의 지적으로 이어졌다.
『홍문관 부제학 김유 등이 소(疏)를 올렸다. 그 대략은, "전하께서도 처음엔 세자를 보양하는 아름다운 뜻을 한결같이 선왕의 고사에 따라 준행했으므로 세자를 가르치는 도리를 옛날에 비겨봐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래에는 점점 처음만 못하시어 자주 시강원의 관원을 체직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럭저럭 결원만 보충해서 상례로 베푸는 서연만을 행할 뿐, 갖가지 방법으로 사부를 높이고 존대하는 뜻이 있다는 말은 못들었습니다. 이는 덕을 도탑게 하고 가르침을 권장하시는 실상이 미진하여서인가 싶습니다."』 (《중종실록》 1526년 12월 8일)
남들이 보기에도 중종이 인종을 대하는 것이 진심으로 신경을쓴다기 보다는 그저 구색 맞추기에 불과했단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1525년 말 경빈 측의 음사 사건이 있었고, 이어 문정왕후가 유산 또는 사산의 아픔을 겪었다.
1527년에는 인종의 핵심 지지 세력인 남곤이 사망했고, 곧이어 ‘작서의 변’이 터졌다.
『심정이 이미 사림에 화를 꾸며 공론에 죄를 얻자 스스로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동궁의 후일의 지위를 굳히려 하였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26일)
이 기록은 사림의 미움을 받던 심정이,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인종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으려고 ‘작서의 변’에 협력했음을 암시한다.
심정은 인종의 외조부 윤여필로부터 '작서의 변'에 대해 듣고는, 이를 조정에서 공론화시키고 경빈을 범인으로 몰아갔다.
앞서 중종에 대한 글에서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을 통해 경빈과 복성군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나름 상세하게 해석했다고 생각했음에도 어딘가 허전한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굳이 죽일 필요까진 없지 않았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인종의 지능 문제와 연결되는 순간, 이에 대한 의문도 자연스레 해결되었다.
경빈과 복성군이 '작서의 변'을 통해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았으면서도 계속 복귀를 노렸던 이유, 중종이 '작서의 변' 후에도 경빈 측에 힘을 싣기 위해 노력한 이유, 인종과 문정왕후 측이 결국 둘의 목숨을 빼앗아야만 했던 이유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즉, 인종과 복성군의 싸움은 한 쪽이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는 '단두대 매치', 'Live and let die'였던 것이다.
앞서 중종에 대한 글에서 경빈과 복성군의 사사를 명할 때 그의 비통했던 마음 역시 설명했다.
『미(복성군)에게 사약을 내릴 적에 상이 슬픈 마음으로 정원에 전교하였는데, 이 전교를 들은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교는 다음과 같다.
"미가 어느 곳에서 죽느냐! 그가 죄 때문에 죽기는 하지만 바로 나의 골육이다. 시체나마 길에 버려지지 않게 거두어 주어야 하겠으니, 그의 관(棺)을 상주로 실어보내도록 하라.
이 뜻을 감사에게 하유하고, 지금 가는 도사에게도 아울러 이르라. 그리하여 연로(沿路)의 각 고을로 하여금 역군(役軍)을 내어 호송하게 하라."』 (《중종실록》 1533년 5월 26일)
경빈과 복성군의 제거는 명백히 인종 지지세력의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중종은 이때 윤임과 김안로 등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을 것이다.
훗날 중종이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대립에서 문정왕후와 소윤 쪽에 기울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본다.
경빈과 복성군이 사사된 후, 그들에 대한 동정 여론이 크게 일어났음 역시 중종에 대한 글에서 설명했다.
나아가, 조정 신료들 중에서도 윤임 등의 행태를 좋지 않게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다.
같은 해 11월, 김형과 이기의 발언이 문제가 되어 옥사가 발생했다.
『김형의 공초는 다음과 같다. "‘상의 사랑하는 자식과 사랑하는 첩까지도 보존하지 못했다. 김안로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러나 사림의 화가 발발하는 날이면 김안로가 반드시 먼저 당하게 될 것이다.’ 한 말은 원래 이기가 말한 것을 신이 김안로에게 누설한 말이며,
‘상이 오직 대간들의 말만을 따르다가 결국은 사랑하는 자식과 사랑하는 첩까지도 보존할 수 없었다. 사림들의 과분한 행위를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하루아침에 화가 터지는 날이면 당신도 모면하지 못할 것이다. 상이 사림을 신임하고 있지만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인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는지 모른다.' 한 등등의 말은 내가 내 뜻대로 김안로에게 말한 것입니다."』 (《중종실록》 1533년 11월 5일)
김형과 이기는 말 한번 잘못한 대가로 국문, 즉 고문까지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이런 기록이 보인다.
『장령 하계선과 헌납 황기가 동사(同辭)로 아뢰기를, "어제 김형을 힐문하여 공초받을 때 ‘국본을 위태롭게 만들 계획을 하였다.’ 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독기를 품고 화를 내며 거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사랑하는 자식과 사랑하는 첩까지도 보존할 수 없었다는 말은 바로 간언(諫言)만 따른 폐단을 말한 것이다. 그것이 왜 국본을 위태롭게 만들 계책을 꾸미는 것인가? 왜 대간과 시종은 나의 말을 미워하여 사람을 꼭 죽게 만들려고 하는가?’ 하면서 말하는 태도가 극히 패만하였고 불손한 말이 많았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11월 6일)
난 김형에게 동의한다.
도대체 저 발언이 왜 인종을 위태롭게 만들 계책을 꾸미는 것인가? 혹시 이런 논리인가?
'경빈과 복성군이 끊임없이 세자의 자리를 넘보고 있지 않는가! 그들을 죽인 것이 잘못된 처사라면, 그럼 복성군이 세자가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냐?'
말 그대로 도둑이 제발 저린 격이다.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인종이 1515년생이니 이제 곧 그의 나이 스물이다. 더 이상 나이 핑계를 대기엔 무리인 때가 된 것이다.
1533년 '가작인두의 변' 역시 무언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실록을 찾아본 결과, 의심 가는 기록이 하나 있긴 하다.
그해 2월, 오랫동안 병을 앓아오던 중종이 마침내 건강을 회복했다.
조정 신료들은 이것은 나라의 경사이니, 쾌차 진하를 받으라고 했고, 중종도 의례적으로 몇 번 거절했다가 청을 받아들였다.
『신시(申時). 세자가 백관을 거느리고 진하하니, 【권정례로 행하였다.】 명하여 백관에게 가자하고 사면을 반포하게 하였다.』 (《중종실록》 1533년 2월 13일)
그런데 행사 도중 문제가 발생했다.
『삼공이 아뢰기를, "봉례(奉禮) 노극창은 일을 거행함에 있어 법도를 잃은 것이 많아 세자가 뒤를 돌아보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필선(弼善) 윤풍형이 신관 【노극창을 가리킴.】 을 지휘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모두 추문하소서."』 (《중종실록》 1533년 2월 15일)
실록에는 '세자가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라고 적혀 있지만,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라 인종이 어리버리 하다가 실수를 범하고 어쩔 줄 몰라 했던 것이라면?
그걸 지켜보던 이들이 '어? 세자 저거 뭔가 이상한데?'라고 느꼈던 것이라면?
무언가 뒷말이 나올 정도니 이걸 '행사 준비요원들이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윤풍형과 노극창에게 덤터기 씌웠던 건 아닐까?
즉, 더 이상 인종의 나이로 그를 실드 칠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이대로 가다간 택현(擇賢)을 핑계로 세자 자리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윤임 등 인종 지지세력이 드디어 무리수를 던지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윤임의 역할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길 윤임은 무인(武人) 출신으로 별다른 정치적 역량을 보이지 못했으며, 김안로가 제거된 뒤에는 문정왕후와 윤원형에게 밀려 인종의 죽음과 함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불쌍한 캐릭터로 인식되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난 윤임이 김안로보다 위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식적으로 당연한 것 아닌가? 인종의 외삼촌이 높겠는가, 누이의 사돈어른이 높겠는가?
더구나 인종의 동복누이 효혜공주와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모두 1531년에 죽었으니, 김안로는 인종과 연결고리도 약해져 있었다.
김형이 김안로를 찾아가 대화를 나눴을 때, 김안로가 했다던 말이 그의 실제 위상을 보여준다.
『"다음날 신이 안로의 집을 찾아가 그말대로 말하였더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이 젊은 사람들이 내 말을 즐겨 들을 리가 없으니 나로서는 말하지 못하겠다.’ 하였을 뿐 다른 사연은 없었습니다."』 (《중종실록》 1533년 11월 4일)
김안로 스스로 “내가 나서도 사림에게 먹히지 않는다”라고 말했다는 건, 실제로는 분위기를 자신이 주도한 게 아니라 윤임이 끌고 간 것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겉으로는 김안로가 칼을 휘두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윤임이 사림을 움직여 “차라리 위험한 복성군을 먼저 제거하자”는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간 것이고, 김안로는 그 흐름 속에서 움직였을 뿐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경빈과 복성군이 모두 사사된 지 1년 후인 1534년, 문정왕후가 궁에 들어온 지 17년 만에 왕자를 낳았다.
그가 바로 명종이다.
새로운 라운드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바로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