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중종이 젊은 후처 문정왕후에게 휘둘려 인종을 제치고 명종을 우대했다고 설명하면서, 윤임과 그 일파, 즉 대윤(大尹)은 일방적인 피해자로 묘사했는데,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선, 경빈의 퇴장 이후 중종이 문정왕후를 총애했다는 대목부터 동의하지 않는다.
경빈은 대단한 미인으로, 1507년 궁에 들어온 이후 중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했다.
『중종의 빈(嬪) 박씨를 개장(改葬)하였다. 빈은 복성군 이미(李嵋)의 어머니인데, 본디 상주 민가의 딸로서 궁중으로 뽑혀 들어와 임금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름다운 자태가 후궁을 압도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71년 8월 1일)
문정왕후 역시 별 수 없었다. 1517년에 중전이 되었지만, 줄곧 경빈에게 밀렸다.
속된 표현으로, 그녀는 '쩌리'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대신들이 중종에게 처첩(妻妾)의 구별을 확실히 하라고 했겠는가?
『조강에 나아갔다. 시강관 조광조가 ‘첩이 왕후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말을 가지고 아뢰기를,
"옛날 한 문제가 상림에 행차하였을 때에 원앙이 부인의 자리를 물리치게 할 수가 있었는데, 지금은 외인이 금중에 입시할 수 없으니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한 문제 때에 만일 원앙의 간언이 없었더라면 신 부인은 반드시 그 분수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지금도 외인이 알지 못한다고 해서 그 분수를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중종실록》 1518년 1월 11일)
더구나 문정왕후는 '작서의 변'에서 '가작인두의 변'으로 이어지는, 경빈과 복성군 축출 과정에서 인종 측에 섰다.
중종에게 피눈물 흘리게 만든 쪽과 한 편이었단 얘기다.
이에 더해 '작서의 변'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이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 그런 문정왕후를 새삼스레 총애하게 되었다고?
난 그런 해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중종이 진정으로 마음을 쏟은 대상은 문정왕후가 아니라 명종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빈과 복성군이 중종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인종 지지세력에게 내내 밀리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이유는 한 가지로 귀결된다.
처첩(妻妾)과 적서(嫡庶)의 구별, 바로 정통성이다.
그래서 난 작게는 윤임 등에게 복수하기 위해, 크게는 왕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정통성 있는 다른 대안이 필요했던 중종이 문정왕후와 화해하고,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결과, 경빈과 복성군이 사사된 지 1년 만에 명종이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경빈이 다른 후궁들보다 앞서 중종의 첫 아들을 낳았던 것처럼, 이 역시 중종이 의도했던 결과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윤임과 대윤 입장에서 명종의 탄생은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엄청난 무리수를 던지면서 기껏 복성군을 제거하고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불과 1년 만에 이전 상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정통성을 지닌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가 장성하기 전에 어떻게든 수를 써야 했다.
명종이 태어나고 고작 3년 여가 지난 1537년 10월, 대간이 윤원형과 윤원로를 탄핵하면서 대윤 vs. 소윤, 그 1막이 올랐다.
『대사헌 양연, 집의 안사언, 사간 채낙, 장령 한숙과 이몽필, 헌납 최보한, 지평 정대년과 이원손, 정언 정응두와 이승효가 아뢰기를, "윤원로·윤원형은 외척의 지친(至親)이므로 의리상 국가와 휴척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근신하지 않고 도리어 사특한 마음을 품고 내외에 없는 사실을 얽어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많은 사람들을 의혹시킵니다. 스스로 성세(聲勢)가 있다고 여겨 사림을 모해하기 위해 조정에 일을 만들어, 그 음흉하고 불측한 모계가 끝이 없었는데 신명(神明)이 밝게 비추어 간사한 술책이 절로 드러났습니다...
이런 흉사(兇邪)한 자는 단 하루도 서울에 둘 수 없으니 빨리 먼 곳으로 내쳐 조정을 안정시키소서."』 (《중종실록》 1537년 10월 21일)
이틀 후, 양연이 다시 그들의 죄를 고할 때, 그 잘못의 대략이 드러났다.
『양연 등이 다시 아뢰기를, "송 인종(宋仁宗)의 고사(故事)를 끌어대어 국모에게 관계되는 말을 차마 입에 담아 그것으로 사림을 일망타진하고 종사에 화를 끼치려 하였으니 그 계책이 너무 참혹하지 않습니까."』 (《중종실록》 1537년 10월 23일)
여기에서 양연이 말하는 송 인종은 북송의 4대 황제로, 황후 곽씨가 인종이 총애하던 한 후궁과 다투게 되자 그가 이를 말리려다 그만 곽황후가 인종의 얼굴을 할퀴게 되었고, 이에 열받은 그가 곽황후를 내쫓은 것이 바로 '송 인종의 고사'이다.
즉, 윤씨 형제들이 사림들이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한다는 헛소문을 퍼뜨려 그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에 중종 역시 윤씨 형제를 내칠 뜻을 전했다.
『전교하였다. "처음에는 그런 실상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연소배의 망령된 말로만 생각하였다. 지금 아뢴 것을 보니 매우 해괴하다. 아뢴 대로 빨리 먼 곳으로 내치는 것이 옳다."』 (《중종실록》 1537년 10월 23일)
그런데 다음 날, 사태가 급변했다. 윤씨 형제를 탄핵한 양연이 돌연 김안로를 탄핵하고 나선 것이다.
『대사헌 양연, 집의 안사언, 장령 한숙·이몽필, 헌납 최보한, 지평 정대년·이원손, 정언 정응두·이승효가 아뢰기를,
"다만 ‘사림을 모함한다.’고 말한 윤원로 등의 본의는 김안로의 부도(不道)한 형상을 가리킨 것인데 김안로 자기에게 해당된 말임을 감쪽같이 숨기고 도리어 사림을 해친다고 칭탁하여 사림에게 전파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워 실로 사림의 화를 재촉하였으니, 이는 역시 김안로의 간사한 계책이었습니다.
신하의 죄악이 이처럼 극에 이르러 잠시라도 도성안에 머물게 할 수 없으니 속히 절도(絶島)로 멀리 내치셔서 인심을 쾌하게 하시고, 조정을 안정시키소서."』 (《중종실록》 1537년 10월 24일)
이 당시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정말이지 지루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실록은 양연이 돌연 김안로를 탄핵하고 나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 양연이 대사헌으로 이 의논을 먼저 주장한 것은 왕의 밀지를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중종실록》 1537년 10월 24일)
『또 논한다... 윤원로 등이 김안로의 흉사하고 부도한 죄상을 몰래 상께 아뢰니, 상께서 매우 두려워하여 무사(武士)를 시켜서 김안로의 무리를 박살하려 했는데, 초친(椒親) 윤안인 등과 의논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윤임과 윤안인을 시켜 은밀히 양연에게 교시하였다.』 (《중종실록》 1537년 10월 24일)
둘을 종합해 보면, 김안로를 처벌하는 것이 중종의 의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안로가 탄핵되고 절도에 안치되자, 대간 등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를 죽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허항, 채무택 등 그의 심복까지 모두 조정에서 내쫓을 것을 아뢰었다.
10월 27일, 중종은 대신들을 불러 모아 김안로의 처리 방안을 의논했다.
『상이 이르기를, "김안로가 파산(坡山) 【윤지임.】 의 집안을 해치려 한 지는 오래이다. 윤원로가 그의 난정(亂政)에 분심을 품고 사적인 원한으로 남을 해치려고 반드시 그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러나 윤원형은 달리 한 말이 없다 한다. 이제 김안로의 간사함을 다스리면서 윤원로 등을 석방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할 듯하다." 하므로,
윤은보가 아뢰기를, "윤원로는 김안로가 전권(專權)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분김에 말을 하다가 국모에게 관계된 것입니다." 하고,
유보가 아뢰기를, "사림을 해치려 했다는 말은 김안로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중종실록》 1537년 10월 27일)
양연이 김안로를 탄핵하면서 설명했던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다.
이 회의 결과 김안로의 사사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중종이 돌연 한 사람을 콕 찍어 지목했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금부에서 아뢴 뜻을 보니 허항과 채무택이 먼저 서울집에 와 있고 허흡(許洽) 역시 왔다 한다. 상(喪)을 당한 사람은 의당 여막에 있어야 하는데, 집에 있으니, 이는 반드시 김안로가 불러 온 것이나, 별다른 흔적이 없기 때문에 불문에 부친 것이다. 이로 본다면, 허경이 몰래 허항의 집에 간 것은 매우 사특하므로 조옥에 가두라 명하였다." 하였다.』 (《중종실록》 1537년 10월 27일)
중종은 허경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자, 서둘러 추국하라고 명령하기까지 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허경의 일은, 그가 말을 꾸미기 전에 속히 추국해야 하는데, 의금부 당상은 반드시 예사 일로 여겨 좌기(坐起)하지 않은 것이니 큰 잘못이다. 지금 비록 밤이 깊었지만 속히 추국하도록 하라."』 (《중종실록》 1537년 10월 28일)
11월 1일, 허경의 첫 번째 공초가 나왔는데,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허경의 공초는 이러하였다. "허항이 기쁜 표정으로 말하기를 ‘요즈음 윤원로와 윤원형 등이 그의 당원인 윤인서가 논박받아 체직된 것을 보고 곧 분노하여 조정에 화(禍)를 일으키고 사림을 해치려고 안팎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내었는데,
윤원로가 윤임의 집에 가서 「당시 사림이 우리 형제를 의심하게 된 것은 동궁은 그때 계사(繼嗣)가 없었고, 중종은 대군(大君)이 있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도 송 인종이 폐후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 사람들의 모의(謀議)도 예측하기 어렵다. 우리 형제는 왕실의 지친(至親)으로서 서둘러 대책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한다. 너도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였습니다...
허항이 대답하기를 ‘어제 저녁에 윤임이 직접 우리집에 와서 말하였고, 권예도 김근사에게서 그 말을 듣고, 내가 서울에 왔다는 말을 듣는 즉시 편지를 보내왔다.’ 하고 이어 그 편지를 보여 주는데, 내용이 허항의 말과 같았습니다.』 (《중종실록》 1537년 11월 1일)
이튿날, 허경의 두 번째 공초가 나왔는데, 이 역시 충격적이었다.
『허경의 두 번째 공초는 이러하였다. "또 이르기를 ‘윤원로가 윤임을 보고 「중전이 동궁을 박대하였다는 말은 사림에서 나온 것인데, 너는 왕실의 지친으로서 그렇지 않음을 환하게 알면서 어찌 사림에게 분명히 변명하지 않는가?」라고 했다.’ 하였는데...
허항이 말하기를 ‘요즈음 그와 같이 큰 일은 반드시 대간과 시종이 먼저 발의(發議)한 다음에 대신이 따라서 논계하는 것이다. 윤임이 이미 김근사와 김안로에게 말해 주었으므로, 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고 하므로,...
또 말하기를 ‘대간과 시종 중에서 만약 먼저 발의를 하면 대신이 마땅히 육조를 거느리고 적극 논계하기로 이미 의논이 되어 있다. 옥당(玉堂)이 먼저 발의를 하더라도 반드시 의심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뿐이고 다른 사연은 없었습니다.』 (《중종실록》 1537년 11월 2일)
허경의 두 공초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드는가?
바로 앞서 '인종 vs. 복성군' 파트에서 내가 주장했던, 김안로보다 윤임이 우위에 있었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문정왕후가 인종을 박대한다'는 소문이 난 것에 분을 못 참고 찾아온 윤원로가 '송 인종의 고사'를 언급하자 이걸 다시 사림에 퍼뜨려 여론을 호도한 이는 김안로가 아니라 윤임이었던 것이다.
'윤임이 이미 김근사와 김안로에게 말해 주었으므로, 그들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대간과 시종 중에서 만약 먼저 발의를 하면 대신이 마땅히 육조를 거느리고 적극 논계하기로 이미 의논이 되어 있다.'는 대목 역시 윤원로와 윤원형 탄핵을 계획한 가장 윗선이 윤임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실록에는 소윤이 어떻게 문정왕후가 인종을 박대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는지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언적이 일찍이 이기의 집에 갔을 때 말이 양궁(兩宮)의 일에 언급되었는데, 이언적이 ‘중전이 동궁을 매우 박대하니 놀라운 생각을 견딜 수 없다.’ 하였다. 이언적의 이 말은 들은 사람이 없었는데 이기가 곧 윤원로에게 누설하였으므로 원로가 이언적을 원망하여 드디어 소원하게 대하였다.』 (《인종실록》 1545년 1월 18일)
난 명종을 얻은 후 문정왕후가 인종을 대하는 태도에 어느 정도 변화는 있었을 것으로 본다.
자기 배로 낳은 자식이 더 예쁜 건 인지상정 아닌가?
전처소생의 자식을 아끼다가도 자신이 직접 낳은 아이가 생기면 어느 정도 차별하게 되는 것이, 다른 여성들은 그렇지 않은데 문정왕후만 그랬느냔 얘기다.
더구나 문정왕후에게 명종은 남아선호사상이 당연시되던 시대에, 결혼 17년 만에 딸 셋을 낳고서야 어렵게 얻은 첫 아들이었다.
따라서 '대군이 태어난 뒤 중전이 동궁을 대함이 예전만 못하다'는 정도라면, 문정왕후 역시 수긍하고 크게 문제 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인종을 박대한다? 이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게 왜 다른 차원의 이야긴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박대'의 의미를 명확히 해야 한다.
'한국어기초사전'에는 '박대하다'의 주요 뜻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다.
1. 성의없이 아무렇게나 대접하다 (=푸대접하다), 2. 인정없이 모질게 대하다.
'박대'가 두 번째 뜻으로 사용될 때 일반적으로 상대방에 대한 폭언, 폭력, 괴롭힘 등을 동반한다.
그리고 윤원로가 '중전이 동궁을 박대한다'는 소문을 듣고 윤임을 찾아가 따지면서 언급했다는 '송 인종의 고사'.
이 고사의 핵심은 곽황후가 어떠한 이유로든 송 인종의 얼굴을 할퀴는, 폭력을 행사했다는 데 있다.
즉, 곽황후는 지존에 대한 불경죄(不敬罪)를 저질러 폐위된 것이다.
세자는 왕이나 진배없는 권위를 지닌다.
아무리 문정왕후라 해도, 인종에게 폭언, 폭력 등의 박대를 했다간 왕에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경죄가 성립된다는 뜻이다.
종합하자면, 문정왕후가 정말 인종을 박대했다면 곽황후처럼 궁에서 쫓겨나 결국 사약 먹고 죽을 수도 있었단 얘기다.
그런 상황이니 아마 문정왕후와 윤씨 형제들은 ‘중전이 동궁을 박대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그건 단순한 뒷말이 아니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정치적 신호였다.
그들이 곧장 윤임을 찾아가 따진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인종을 박대하는 문정왕후의 모습’은 모두 야사(野史)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만약 정말로 문정왕후가 인종에게 야사에 기록된 그런 막말과 불손한 행동을 했다면, 꼬투리 잡으려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던 대윤 측에서 그걸 놓쳤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나는 문정왕후가 속마음이야 어쨌든 간에,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에서는 인종을 박대하는 '정치적'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그녀는 자기 손으로 무덤 팔 짓을 할 만큼 어리석은 여인이 아니었다.
여기서 잠깐 딴 얘기를 하자면, 곽황후가 송 인종의 얼굴을 할퀴어 폐위되었다는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았나?
그렇다. 바로 조선 성종이 투기를 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할퀸 중전 윤씨를 쫓아낸 이야기와 판박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성종의 이 사례 역시 실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임금이 좌우를 돌아보고, 일러 말하기를, "지금 중궁의 소위(所爲)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혹은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옛날에 한나라의 광무제와 송나라의 인종이 모두 다 왕후를 폐하였는데, 광무제는 한 가지 일의 실수를 분하게 여겼고, 인종도 작은 허물로 인했던 것이지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드디어 ‘말이 많으면 버린다[多言去], 순종하지 아니하면 버린다[不順去], 질투를 하면 버린다[妬去]’라는 말을 외우고, 이어 이르기를, "이제 마땅히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겠는데,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였다.』 (《성종실록》 1479년 6월 2일)
성종은 송 인종의 사례를 언급하긴 했지만 그건 그저 국모를 폐했던 사례를 들기 위해서지,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다는 얘기는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마찬가지로, 정말로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다면, 그녀를 쫓아낼 수 있는 최고의 명분을 성종이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결국, 폐비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었다는 이야기도 후대가 꾸며낸 야사적 창작이라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무엇보다 문정왕후와 윤씨 형제는 윤임과 사림이 경빈과 복성군을 어떻게 골로 보냈는지를 두 눈으로 지켜본 사람들이다.
그런데 명종이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런 소문이 외간에 퍼졌다?
그들은 이기로부터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임이 주도한 정치 공세가 시작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저것들이 결국 우릴 공격하고 나섰구나.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병신처럼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실록에 나와 있듯이, 문정왕후와 윤씨 형제들은 단순히 윤임을 찾아가 따지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윤원로를 통해 은밀히 중종에게까지 이 모든 사정을 고하였다.
중종 역시 윤원로의 말을 듣는 순간, 이것이 윤임 측이 꾸민 정치 공작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불과 4년 전, 사림의 압박에 밀려 사랑하는 경빈과 복성군에게 사사를 명해야 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을 테니 말이다.
'그럼 그렇지. 지 버릇 개 못 준다고, 윤임과 그 일당들이 먼저 시작한 게 틀림없다. 잘 걸렸다.'
중종은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을 먹은 듯하다.
그가 '윤임과 윤안인을 시켜 은밀히 양연에게 교시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을 통해, 나는 중종이 문정왕후의 당숙인 윤안인을 시켜 윤임에게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고 경고를 보냈고, 이에 식겁한 윤임이 꼬리 자르기의 일환으로 김안로를 희생양 삼았던 것으로 본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김안로가 탄핵을 받고 사사에 이르는 3일 동안, 그가 자복했다거나 하는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옛날이라고 해도, 사람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서는 고문을 통해 얻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당사자나 관련자의 시인, 즉 공초가 필요했다.
'작서의 변'을 떠올려 보라. 중종이 그때 사림의 강한 압박에도 경빈과 복성군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관련되었다는 공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가작인두의 변' 때는 수견, 효덕 등의 '경빈을 위해 인종을 모해하려 했다'는 공초가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경빈과 복성군을 사사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안로는 그런 거 없이, 탄핵된 순간부터 온 조정이 나서 '저놈이 제일 나쁜 놈이다.' 몰아붙이고는 그냥 죽여버렸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종은 김안로에서 멈추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굳이 허경을 콕 집어 조속히 국문하라고 닦달한 것을 보면,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윤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허경의 자백을 받는 데 성공했다.
공초의 내용만 놓고 보자면, 문정왕후를 모해하고 윤씨 형제를 공격한 죄로 죽어야 할 사람은 김안로가 아니라 윤임이다.
즉, 허경의 공초를 통해 중종은 윤임의 '치명적 약점'을 잡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