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7년 이후 대윤과 소윤의 대립을 다루기 전에, 먼저 경빈과 복성군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허경의 공초를 통해 윤임의 '치명적 약점'을 잡은 중종은, 이 기회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던지 4년 전 경빈과 복성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홍여의 옥사(獄事)가 조작된 사건이었다는 점을 직접 언급하기에 이른다.
조금 길지만, 그 장면을 실록에서 옮겨본다.
『영의정 윤은보, 좌의정 유보, 우의정 홍언필 등이 명을 받고 빈청(賓廳)에 나왔다.
전교하기를, "김안로 등이 허위로 모함한 일은, 비록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의논해야 하는데 더구나 큰 죄로서 밝히기 어려운 것이겠는가. 그래서 대신과 의논하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옥사를 소급하여 밝혀 보아도 유익함은 없다. 그러나 위아래가 모두 그 모함이 허위임을 알고 있는데, 내가 만약 알지 못한다면 아래에서 아무리 밝히려고 한들 누가 감히 먼저 발의하겠는가.
홍여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보건대, 그 당시 사헌부의 관리였던 김형경이라는 자는 홍여의 여종의 남편이었다. 그의 처남과 공모하여 이웃에 사는 병조의 관리들을 해치고자 하여 무도(無道)한 말을 패(牌)에 써서 대궐 뜰에 매달아 놓았고, 또 바가지로 형상을 만들어 걸어 놓았는데,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옥사를 추국할 적에 김안로가 추관(推官)이었는데, 홍여의 집안으로 죄를 돌리고자 하여 이는 작서(灼鼠)의 사건과 유사하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으며, 그 집의 노비들이 무수하게 형장을 받고 그가 묻는 대로 자복하였다. 【추관이 자기의 의견대로 형신하였는데 노비들은 형장을 못 이겨서 죄를 자복한 것이다.】 죄가 결정된 다음에 홍여는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형장을 참아 내면서 자복하지 않고 죽었다...
김형경과 정올미 등은 정범(正犯)이 이미 드러났다고 하여 그 죄를 벗어났고 대역의 사인(事因)은 홍여에게로 돌아갔으니, 어찌 이렇게 억울한 옥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경들은 그 당시 비록 그 일을 알고 있었으나 아래에서 정론(正論)을 내세운 자가 없었다. 이러한 대역의 일을 사책(史冊)에 기록해 놓고 끝까지 밝혀 내지 않으면 되겠는가."』 (《중종실록》 1537년 11월 26일)
중종의 전교에서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위아래가 모두 그 모함이 허위임을 알고 있는데," "대역의 사인(事因)은 홍여에게로 돌아갔으니, 어찌 이렇게 억울한 옥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대역의 일을 사책(史冊)에 기록해 놓고 끝까지 밝혀 내지 않으면 되겠는가."
그의 말속에서 그동안 눌러왔던 상처와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가?
중종은 홍여가 범인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정확히 표현하자면 홍여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으면서도, 인종 세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사랑하는 첩 경빈과 아들 복성군을 죽였다.
김안로의 사사(賜死)와 허경의 공초를 계기로 마침내 억눌러 왔던 감정을 터뜨린 것이다.
바로 다음 날, 사림은 황급히 진화에 나섰다. 재조사가 벌어져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으로 결론나는 날엔 무슨 난리가 벌어질지 몰랐다.
『홍문관 부제학 윤풍형 등이 상차하기를, "홍여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으로 신인(神人)이 함께 통분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성명(聖明)이 통촉한 바에 많은 사람이 통쾌하게 여겼고 국시(國是)가 이미 결정되어 다시 의논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주상의 분부가 변명에 가까우니 모두가 의심을 품습니다...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치우치는 사심을 끊으시고 이미 결정된 의논을 흔들리게 하지 마시며, 시비를 환하게 밝혀 진퇴의 계기를 신중히 하소서."』 (《중종실록》 1537년 11월 27일)
사림의 반발에 중종 역시 결정적 순간에 발을 뺐다. 예전에 홍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답하였다. "홍여의 일은 이미 결정한 것이 대체로 오래되었으니 내가 밝혀 봐야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때에 추문할 만한 단서가 있었는데도 추관(推官)이 억제하고 묻지 않았으며, 다만 형장으로 자복을 받았다...
이미 결정한 큰 죄를 어찌 다시 고칠 수 있겠는가. 그때에 내가 변명하지도 못하고서 이제 와서 아랫사람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은 사실 잘못이다. 그대들의 말이 매우 당연하다."』 (《중종실록》 1537년 11월 27일)
중종의 마지막 말 ― “그때에 내가 변명하지도 못하고서 이제 와서 아랫사람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은 사실 잘못이다. 그대들의 말이 매우 당연하다.” ― 은 일종의 자기 고백이었다.
국왕으로서 진실을 알면서도 말 한마디 못하고,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을 지키지 못했던 비겁함에 대한 늦은 인정이었다.
앞선 ‘인종 vs. 복성군’ 편에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의 한 장면을 빗대어 중종과 홍숙의 대화를 상상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 장면을 다시 가져오되, 대사는 이렇게 바꿔본다.
(홍숙) “저보고 인종이 이상하다 말도 못 하냐고 했었죠?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국왕씩이나 되어서 뭐 하는 겁니까? 홍여는 죄가 없다, 이건 다 모략이다, 왜 말을 못 합니까!”
(중종) “미안하다... 내가 뭐라 할 말이 없다.”
중종, 참 보면 볼수록 짠하다.
그런데 중종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이 말을, 정면으로 던진 사람이 있었다. 이약빙이다.
1539년 윤7월, 이약빙은 중종에게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한산군수 이약빙이 상소를 올렸다. "그가 행한 흉악한 저주(詛呪) 【작서의 변.】 는 정해진 형벌이 있어서 용서할 수는 없다 해도 저주한 사실은 밝히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미가 한집안에서 저주한 일에 참여했는지는 신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논의는, 춘궁(春宮, 세자)의 뒷날을 위하여서라고 하면서 친지들에게 서로 자랑하였습니다. 때문에, 전하의 총애하는 첩과 사랑하는 아들이라도 쫓아내거나 죽이는 것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고 말하나 신은 의혹이 더욱 깊습니다."』 (《중종실록》 1539년 윤7월 5일)
이약빙의 상소에 따르면, 당시 인종 지지세력 인사들이 “인종의 장래를 위해 경빈과 복성군을 제거했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대윤 측 사람들이 이러고 다녔으니, 민심이 경빈과 복성군에게 동정적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상소의 후반부는 대윤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무릇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나지 못하니 이제 와서 어찌하겠습니까. 다만 전하께서 뉘우치고 후회하는 진심을 사람들에게 마치 일식과 월식이 다시 소생함을 보듯이 하시는 것에 있을 뿐입니다.
당당한 암랑(巖廊, 의정부)과 제제(濟濟)한 관각(館閣)들이 전하 앞에서 직언을 진술하려 않는 것은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곧 지나간 일은 소소한 일이라서 덕의 경중과 정사의 대소에 관계될 것이 없다고 핑계대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시대에서 꺼리는 일이고 후세에 관계되는 것이어서 말하는 자에게 반드시 화가 미칠까 싶어서가 아니겠습니까?
신도 전에 말하지 못하고 오늘까지 기다린 것은 몸을 아껴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전하를 사랑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말하고 말 않는 것은 그 죄가 같으므로 감히 어리석은 말을 발하여 전하께 누를 끼치니 전하께서는 용서하소서...
만일 아뢰는 말을 옳지 않게 여기시어 다시 전리(田里)에 돌아가 송추(松楸) 아래에서 목숨을 마치라 하시면 성은이 망극하겠으며 귀양을 보내셔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속에서 우러나오는 심정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중종실록》 1539년 윤7월 5일)
이약빙의 마지막 말은 중종에게 한 말이 아니라, 대윤에게 던진 돌직구라 봐야 한다.
'모두가 너희가 죄를 덮어씌워 경빈과 복성군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다. 다만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구차하게 입닫고 있었을 뿐이다. 늦었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그러니 죽이든 귀양을 보내든, 맘대로 해라.'
대윤 측은 즉각 반발하며 이약빙을 잡아 국문하라고 압박했다. 중종은 끝내 버티지 못했고, 이약빙을 파직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했다.
『정원에 전교하였다. "이약빙의 초사(招辭)를 보니 특별히 깊은 뜻은 없었다. 노산과 연산의 후계를 세워주자는 일도 모두 공론에서 나왔고 미의 일은 간신들이 이것을 빙자하여 말한 것이다. 구언하는 첫마당에 만약 형신까지 한다면 언로에 방해될 것이니 파직만 하고 추국은 하지 말라."』 (《중종실록》 1539년 윤7월 13일)
이처럼 경빈과 복성군의 죽음에 관한 불편한 진실을 알고 나면, 인종의 ‘우애’를 강조하는 대표적 일화도 곧이곧대로 보기 어렵다.
《중종실록》에는 인종이 중종에게 올린 글이 전한다.
『동궁이 이미 등의 일을 위하여 상소하기를, "지난번 이미의 일을, 신은 어려서 그 일의 전말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화의 참혹함은 차마 말할 수도 없습니다. 요망한 일을 비록 박씨(朴氏)가 했다고는 하지만 미야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먼 지방으로 귀양보낸 것도 지나친 일인데, 그 뒤에 또 다시 큰 옥사가 일어나 모자가 연이어 죽고, 홍여도 형장 아래서 죽었으니 이토록 극심한 변고는 전고에 드문 일입니다. 형제간이 된 사람의 정리로서 어떠하겠습니까.
죽은 자는 이미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미의 딸 하나가 민간에 버려져 서인과 다름 없이 되었으니, 어린아이가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이는 더욱 가슴 아픈 일입니다. 두 옹주도 나이 어린 딸로 그 일에 참여하지 않았음이 분명한데도 속적(屬籍)에서 제적되었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릅니다...
지금 신은 세자로서 모시고 있어 천총(天寵)이 지극한데, 두 누이와 조카딸 하나가 아직도 천민에 버려져 있으니, 자신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번에 말씀을 드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여 다시 충정을 아뢰어 천총을 욕되게 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불쌍히 여겨주소서."』 (《중종실록》 1541년 11월 9일)
《명종실록》은 이 글에 감동한 중종이 복성군의 신원 회복을 명했다고 적는다.
『헌부가 아뢰기를, "대행왕께서 동궁에 계실때 복성군이 죄를 입은 일에 대하여 글을 올려 변명하였는데, 그 사의(辭義)가 지극히 간절하였기 때문에 중종 대왕이 그 간곡한 정성을 가상히 여겨 드디어 복직시킬 것을 명하셨으니,,.."』 (《명종실록》 1545년 7월 23일)
난 이 기록이 인종의 우애를 강조하려는 후대의 곡필(曲筆)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날 중종이 회복시켜 준 것은 혜순옹주와 김인경의 신분이었다.
『전 광천위 김인경의 처 이씨가 올린 상언(上言)을 정원에 내리면서 일렀다. "그의 속적을 회복시켜 직첩을 돌려 주고, 김인경도 직첩을 주어 서용(敍用)하라."』 (《중종실록》 1541년 11월 9일)
왜 하필 이 둘만이었을까. 나는 여기에 중종의 복잡한 심경이 스며 있다고 본다.
인종의 지능 문제를 전제로 보면, 중종은 그 상소를 인종의 본심이라기보다는 윤임의 메시지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인종의 상소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있다.
우선, 그 글 어디에도 복성군과 홍여의 무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경빈이 지은 죄로 인한 그들의 처벌이 너무 가혹했고, 자손들이 고난을 겪는 것이 불쌍하다고만 했을 뿐이다.
'경빈이 죽을 짓을 한 건 맞다. 복성군과 홍여가 죽은 건 다 그녀 때문이다. 더 이상 그 사건 파헤쳐 우릴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그리고 살아 남은 애들을 생각해라. 걔네 지금 천민이 되어 비참하게 살고 있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사면시켜주는 건 동의해 줄테니, 걔네들이나 챙겨.'
중종은 이걸 눈치챘을 것이다.
남은 자식들이 눈에 밟혔을 테지만, 그는 이걸 바로잡고 싶었던 것 같다.
즉, 복성군이 죄를 지었지만 사면 받는 게 아닌,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를 뒤집고, 나아가 그것이 윤임과 김안로에 의한 조작이었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난 중종이 직접적인 연관이 없고, 단지 연좌로 피해를 본 혜순옹주와 김인경만을 신원 회복시켜준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복성군의 신원은 그로부터 1년 2개월 뒤에야 회복되었다.
1543년 1월, 동궁 화재 직후 이언적이 경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진관 이언적이 아뢰기를, "전자에 복성군 이미가 사사된 것에 대해 물정(物情)은 지금까지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패(牌)를 동궁에 매달아 놓은 일을 가지고 복성군이 미리 꾀한 것이라고 하여 논계하였고 그에 따라 사사했다고 합니다. 사리로 따져 보더라도 복성군이 그때 먼 지방에 귀양가 있었는데 그 모의를 꾸미는 데 참여했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박씨가 범했다는 것은, 모르겠습니다만, 설사 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아들과 함께 꾀한 형적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확실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천성(天性)의 지친을 상해한 것이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으니, 즉위하신 이후로 성덕에 누(累)됨이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중종실록》 1543년 1월 19일)
며칠 뒤, 삼공이 복성군 복직을 건의했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였다.
『삼공이 대제학에 합당한 사람을 서계하기를, "그리고 복성군은 별로 나타난 형적이 없어 사건이 애매한 듯한데 죄를 입게 된 이유를 외정(外廷)에서는 미처 자세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다만 죽은 지 또한 오래되어 이미 10년이 넘었으니 복직시키고 추위(追慰)해주면 친한 이를 친하게 하는 의리에 있어 무방할 듯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중종실록》 1543년 1월 27일)
《명종실록》의 기록과 달리 《중종실록》에는 중종이 직접 복성군의 복직을 명하긴커녕, 대신들의 요청에 '알았다'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두 사료의 서술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명종실록》에 이 일화가 실린 배경을 살펴보자.
1545년 7월 1일 인종 서거 이후, 행장을 작성하던 중에 사헌부가 인종의 그 글을 가져와 행장에 수록할 것을 주장했다.
『헌부가 아뢰기를, "... 이는 실로 효우(孝友)를 독실하게 실천하신 결과임은 물론 중종의 명철하신 판단의 덕 또한 지극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실적을 인멸시켜서는 안되니 행장에 갖추어 싣는 것이 결코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명종실록》 1545년 7월 23일)
하지만 윤인경 등은 다음을 이유로 결국 그것을 행장에서 제외했다.
『대행왕이 복성군을 위해 글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한 것과 조광조 등의 관직을 회복시키게 한 것 등 몇 가지 일들도 다 상세히 기재하였었으나, 대신 윤인경 등이 ‘중종이 이미(복성군)와 조광조 등의 일에 대해 은의(恩義)를 끝까지 잘하지 못한 과실이 있는데, 이제 꼭 이 일을 상세히 싣게 되면 이것이 대행왕에게는 빛이 있겠지만 중종의 미진한 곳을 드러내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하여, 드디어 삭제하게 된 것이다.』 (《명종실록》 1545년 7월 27일)
난 이것이 윤인경의 핑계였다고 본다.
윤인경은 1540년에 우의정에 올라, 중종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곧, 1543년 1월 27일 중종에게 복성군의 신원 회복을 건의한 삼공 중 한 명이 바로 그였다.
그의 속마음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와, 어이가 없네. 그때 내가 우의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봤는데, 나한테까지 구라를 치네?'
복성군의 신원 회복이 논의되던 1543년 1월은 동궁 화재를 둘러싸고 대윤과 소윤이 다시 극한 대립의 기미가 보일 때였다.
대윤 측에서는 동궁 화재가 인종을 죽이기 위한 방화였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몰아가려고 했다.
자칫하면 ‘작서의 변’과 ‘가작인두의 변’이 재현될 수도 있는, 위험한 분위기였다.
난 중종이 이런 상황에서 복성군 문제가 언급되자 이를 빌미로 대윤을 압박했고, 윤임 등은 결국 복성군의 신원 회복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종) "야, 너희들, 소윤이 동궁에 불지른 거라고 떠들고 다닌다매? 복성군 때처럼 또 없는 일 꾸며서 억울한 사람 만들 생각이냐?"
(윤임) "아, 이게 사골국입니까?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예요?"
(중종) "김안로 죽었을 때 내가 뭐라 했는지 기억하지? 홍여는 아무 잘못 없다고. 마침 이언적이 얘기를 꺼냈던데, 이번엔 제대로 파헤쳐 볼까?"
(윤임) "그건 우리더러 다 죽으란 말 아닙니까? 거기까지 가야겠습니까? 아, 그냥 복성군 신원 회복시키는 걸로 정리하자니까요?"
(중종) "죽어도 잘못했다곤 안 하겠단 거지? 개XX들 같으니라고."
경빈과 윤임에게는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다.
인종이 중종 사후 작성된 그의 지문(誌文)에 왕손(王孫)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음을 지적하자, 다음 날 대신들이 이를 정리해 인종에게 보고했다.
『좌의정 윤인경이 성세창·권벌·정순붕·임권·신광한·정만종과 함께 아뢰기를,
"대행 대왕의 지문에는 영릉의 지문의 예에 따라 왕손도 아울러 싣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따라서 ‘효혜는 한 딸을 낳았는데 유학(幼學) 윤백원에게 시집갔고, 의혜는 한 딸을 낳았는데 어리고, 미는 한 딸을 낳았는데 유학 최예수에게 시집갔고, 영은 한 딸을 낳았는데 어리고, 혜정은 한 딸을 낳았는데 유학 윤호에게 시집갔고, 정순은 한 아들을 낳고 효정은 한 아들을 낳고 정신은 한 아들을 낳고 기는 한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는 63자를 ‘능창위 구한’ 아래에 보태어 넣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인종실록》 1545년 1월 25일)
여기서 ‘혜정’은 바로 경빈의 차녀이자 ‘가작인두의 변’에서 억울하게 죽은 홍여의 부인이다.
기록에 따르면 혜정옹주와 홍여 사이에 딸이 있었고, 그 딸이 ‘윤호’에게 시집 갔다고 했다.
그런데 윤호가 누구인지 아는가?
그는 바로 윤임의 장남 윤흥인의 아들, 즉, 윤임의 손자였다.
결국 윤임은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경빈과 홍여의 혈육을 손자 며느리로 맞이한 셈이었다.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따로 없다. 철천지 원수 집안이 혼인으로 맺어진 것이다.
도대체 윤임은 무슨 생각으로 이 혼인을 성사시켰을까?
경빈과 복성군, 그리고 홍여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중종이 복성군 문제로 자신을 압박하던 시점에 내민 정치적 제스처였을까?
이를 가늠하려면 두 집안의 혼인 시점을 알아야 하지만, 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혜정옹주의 딸이 1531년생이라고 나오는 점, 당시 왕가의 자제들이 보통 12~3세에 혼인을 했다는 점, 그리고 중종이 사망한 1544년 11월 이후 결혼했을 리는 없다는 걸 감안하면, 아마 혼인 시기는 1543~1544년 즈음일 것이다.
나는 이를 근거로, 1543년 1월 복성군의 신원이 회복될 때 홍여에 대한 신원 회복 역시 이루어졌으며, 그 이후 혼인이 성사되었을 것으로 본다.
결국 이 혼인은 중종의 압박을 피하기 위한 윤임의 정치적 자구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끝이 좋으면 다 좋다》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의 일생은 선악을 꼬아 만든 실로 짜여 있다.”
인생사 새옹지마(塞翁之馬) — 좋고 나쁜 일이 번갈아 일어난다는 뜻이지만, 나는 이 말을 사람 자체에 대한 통찰로 봐도 된다고 본다.
세상에 완전히 착한 사람도, 완전히 나쁜 사람도 없다.
모든 인간은 선과 악, 빛과 그림자가 뒤섞인 입체적 존재다.
난데없이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윤임의 속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기 위해서다.
그는 당시 정치적으로 벼랑 끝에 있었고, 출구가 필요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단호히 반대했다면 아마 혼인은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믿고 싶다.
윤임이 정치적 계산을 넘어, 마음 한 켠에 저들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미안함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손자와 홍여의 딸을 혼인시켰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