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7)

by Loxias

* 대윤 vs. 소윤 (2)


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중종은 인종에게 양위하려고 했던 적이 있다.

김안로가 사사된 지 1년이 지난, 1538년 10월의 일이다.


『전교하기를, "내가 의논하려고 한 뜻이 오랜데 매우 가벼운 일이 아니다... 덕이 부족한 내가 나라의 불행한 운수를 이어 백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지 이미 33년이 되었다. 더구나, 여러 차례 조정의 변고를 겪었으며 궁중(宮中)에도 변고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이는 다 내가 불초한 탓이다...

태종께서 춘추 52세에 세자에게 전위(傳位)하셨으니 반드시 노쇠하신 것도 아닌데 어찌 별 뜻 없이 하신 일이겠는가. 내 나이 또한 앞으로 몇 달만 지나면 52세가 된다. 그러니 지금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그대들에게도 어찌 범연한 일이겠는가. 이 아름다운 일을 보조하라."』 (《중종실록》 1538년 10월 1일)


중종의 양위 선언에 온 조정이 나서 그에게 명을 거두라 청했다.

그러나 중종은 인종이 이미 장성하고 총명한데, 물려받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상이 다시 전교하기를, "만일 세자가 우매하고 허약하며 사리에 어둡다면 전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세자는 치체(治體)에 통달하고 학식 또한 높고 밝은 것을 대신들이 누군들 모르겠는가..."

다시 대신들에게 글로 내리기를, "내가 어찌 국사(國事)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물러가 있을지라도 어찌 경들을 접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자가 국가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나 큰일들은 어찌 나에게 아뢰지 않겠는가. 세자가 여러 차례 사양하였지만 이미 대보를 전했으니 내일 백관들은 하례함이 좋을 것이다."』 (《중종실록》 1538년 10월 1일)


이튿날, 인종까지 나서 뜻을 거두어 줄 것을 청했다.

『세자가 승언색 이승호를 시켜 광필 등에게 일렀다. "온갖 방법으로 굳이 사양하였으나 윤허받을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해도 할 수 없고 마음만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조정에서 모름지기 힘써 간쟁하여 상의 마음을 반드시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중종실록》 1538년 10월 2일)


이에 중종은 불과 하루 만에 뜻을 거둬들였다.

『상이 광필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당초에 아랫사람들이 놀라와 할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임금이 연소할 때 하는 일이 쇠약한 때와 다른 것이다. 의지와 기운이 쇠모해 진다면 계책과 생각이 어긋나기 때문에 어진 세자에게 전위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록 전위하려고 했으나 조정의 의논이 간절하기 때문에 할 수 없게 되었다."』 (《중종실록》 1538년 10월 2일)


이때 도대체 중종이 무슨 생각에서 선위하려고 했는지,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무술년(1538)에 중종이 졸지에 왕위를 세자에게 선양한다는 명을 내리자, 나라 안팎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연려실기술》 제9권, 중종조 고사본말)


중종의 교서에 적힌 말들 — 세종보다 오래 재위한 미안함, 태종의 선례를 따른다는 명분 — 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종이었더라도 왕위에 넌덜머리가 났을 것이다.

'너희들 진짜 너무 하는 거 아니냐? 경빈과 복성군도 모자라, 이제 문정왕후와 경원대군까지... 난 이제 그만할란다. 왕위 넘겨줄 테니 세자랑 잘해봐라. 너희가 원하는 게 결국 이거 아니었냐?'


허나, 이것이 중종이 선위한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의 양위 선언이 권력 다툼에 대한 피로감의 토로에 더해, 정치적 승부수이기도 했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에도 인종의 지능 문제를 대입하면 퍼즐이 맞아떨어진다.


중종의 눈에는 인종이 왕위에 오르면 곧 난리가 날 게 뻔히 보였을 것이다.

《인종실록》에 기록된 것처럼 인종은 그의 지능 문제 때문에 대신들을 만나기 꺼려 했고, 몇 달 되지 않는 치세 동안 국정이 사실상 마비되다시피 했었다.

만약 이때 인종이 중종의 양위를 받아들이고 국정 운영 전반에 나섰다면?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아니, 인종이 뭔가 이상한데? 회의도 안 나오고, 기껏 어쩌다 한번 나와도 입 다물고 가만히 있네…”


그렇게 되면 어찌 되었겠는가?

대윤을 제외한 다수 대신들이 중종에게 몰려가 다시 정사를 맡아 달라 청했을 것이다.

'아, 인종 상태가 영 파이네요. 상왕께서 왜 그토록 세자를 바꾸려 했는지,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결국 중종은 인종에게 왕위를 넘겨 그가 전면에 나서게 함으로써, 지능 문제를 스스로 드러나게 만들어 조정의 여론을 이끌어내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다음 다시 중종이 왕위에 복귀하거나, 아니면 명종을 세울 수도 있었던 것이다.

즉, 중종의 양위 선언은 인종과 대윤에게 던진 '독이 든 성배'였던 것이다.


대윤과 사림도 이 '독이 든 성배'를 받으면 죽는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그래서 온 조정을 동원, 강하게 양위 반대를 외쳤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 보라.

인종의 세자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막상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니 못 받겠다며 난리를 친다?

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중종 역시 그들의 반응을 보고 '아, 이것들이 안 걸려드네. 텄다, 텄어.'라는 생각이 들자 바로 양위의 뜻을 거둬들였던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오래된 생각이라고 해 놓고는 불과 하루 만에 그걸 취소시킬 수 있느냔 얘기다.


문득 오래전 유명했던 아이스크림 '더블비얀코' 광고가 떠오른다.

인종에게 건넨 옥새가 하루 만에 다시 돌아오자, 중종이 윤임에게 비아냥거린다.

"줘도 못 먹나?"


1538년의 이 양위 소동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이것이 중종의 사실상 마지막 세자 교체 시도였다고 본다.


그 무렵 인종은 스물네 살. 1520년에 세자로 책봉된 뒤, 이미 20년 가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이미 조정에 뿌리를 깊게 내렸고, 인종의 자리를 위협하는 자들이라면 누구라도 용서치 않았다.

반면 명종은 이제 겨우 다섯 살. 현실적으로 세자 교체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중종은 노선을 바꿨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 세자를 바꾸는 대신, ‘격대지정(隔代指定)’, 즉 대를 건너뛰어 후계자를 정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그는 아마 이렇게 계산했을 것이다.


'인종과 명종의 나이 차이가 19살이니, 인종이 명종보단 빨리 죽을 것이다.

결국 인종이 자식을 보지 못한다면, 다음 왕위는 자연스레 명종에게 돌아갈 것이다.

괜히 대윤을 자극해 피바람을 부르기보다, 차라리 명종을 지켜 훗날을 기약하자.'


이 즈음 중종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졌다.

더 이상 인종의 부진한 학문을 문제 삼지 않았고, 대신 ‘효(孝)’와 ‘우애(友愛)’를 거듭 강조했다.

그걸 보여주는 실록 기록이 있다.


『전교하였다. "성세창이 논한 효도와 우애의 도가 더욱 간절했다. 이것은 세자가 더욱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말이니, 사부와 빈객·요속 등은 논란할 때 자주 효도와 우애의 도를 힘써 논하여 세자가 익숙해지도록 돕는다면 매우 유익할 것이다. 이를 시강원에 이르라."』 (《중종실록》 1539년 10월 23일)


이 전교는 단순한 윤리 교훈이 아니다.

겉으로는 ‘효와 우애’를 논하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중종의 깊은 두려움이 숨어 있다.

“내가 죽은 뒤, 경빈과 복성군의 비극이 문정왕후와 명종에게 되풀이되지 않게 하라.”

이것이 진정한 뜻이었을 것이다.


중종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추가적인 조치들을 취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역시 혼인관계를 통한 연계 강화였다.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량의 딸은 한때 인종의 양제(良娣, 세자의 후궁) 후보로 거론되었다가, 김안로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중종은 이를 다시 추진했고 마침내 그녀를 인종의 후궁으로 들였다.

『윤은보 등에게 전교하였다. "황헌이 전번에 경연에서 아뢰기를 ‘김안로가 그의 외손녀로 양제를 삼고자 하여, 윤원량의 딸과 윤개의 딸을 【양윤(兩尹)의 딸이 모두 양제로 간택되었었다.】 논박하여 방해하였다.’라고 하였다... 윤원량의 딸은 별로 허물될 만한 일이 없어서 선발하여 들일 만하였다... 윤원량의 딸도 뒤따라서 입궁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중종실록》 1537년 11월 9일)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인종의 동복누이 효혜공주는 1531년 딸을 낳고 세상을 떠났는데, 그 딸 — 인종의 유일한 조카딸 — 이 훗날 장성하여 혼인했다.

『"대행 대왕의 지문에는 영릉의 지문의 예에 따라 왕손도 아울러 싣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따라서 ‘효혜는 한 딸을 낳았는데 유학(幼學) 윤백원에게 시집갔고,..."』 (《인종실록》 1545년 1월 25일)


‘윤백원’이 누구냐고? 그는 다름 아닌 윤임의 정적이자 소윤의 주축, 윤원로의 아들이었다.

앞서 언급한 경빈의 외손녀와 윤임의 손자의 혼인에 이어, 조선판 '로미오와 줄리엣' 2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잠잠하던 조정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1543년 1월 7일, 인종이 거처하던 동궁에 불이 났다.

『밤. 삼경(三更). 동궁에 불이 났다...

이날 밤의 화재는 뜻밖에 발생하였다. 승지와 사관 등이 정신없이 동궁에 달려가 보니 화세(火勢)가 치성하여 자선당까지 불탔다. 그러나 입직 군사는 게을러 모이지 않았으며 또한 기율도 없어 소란스럽기만 할 뿐 불을 끌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 승화당은 대내(大內)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먼저 그 집을 철거하여 불길이 번지지 못하게 하니 화세가 차츰 꺾였다.』 (《중종실록》 1543년 1월 7일)


이 에피소드는 야사의 내용이 유명하다.

『야사에 따르면 이 때 불이 나자 당시 인종이 “어머니(문정왕후)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孝)가 아니겠는가”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燒死)를 기다렸다. 그러나 밖에서 아버지 중종이 나타나 그의 아명인 백돌을 부르며 울면서 애타게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나아가 '불충')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나무위키》 조선 인종)


야사의 뉘앙스대로, 대윤은 이 사건을 인종을 해치기 위한 방화라고 의심했다.

범인도 특정했다. 그들은 문정왕후의 조카, 윤양제의 방에서 불이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이덕응이 공초하였다. "그때 윤원로가 윤임의 집에 와서 말하기를, ‘이임이 상소하기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이미 치솟은 뒤에 보고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유관이 이임을 사주하여 내가 한 짓으로 지적하도록 한 것이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명종실록》 1545년 9월 7일)


『집의 진복창이 상소하기를, "그(구수담)는 탄식하며 신에게 말하기를 ‘이임은 무상(無狀)한 사람이다. 동궁의 화재가 윤양제의 방에서 불지른 것이라고 하여 장차 이를 구실로 큰 옥사를 만들려고 한다. 이는 필시 역적 윤임이 꾸며낸 음모를 듣고서 그러한 사특한 이야기를 지껄인 것이다.’ 하였습니다."』 (《명종실록》 1547년 2월 19일)


그런데 중종의 증언은 대윤의 주장과는 매우 달랐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동궁이 불에 탄 일에 대하여 끝까지 추문하려 하였으나 일이 매우 분명하므로 추문하지 않았다. 불이 처음 일어났을 때부터 와서 고하는 자가 모두, 무수비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하기에, 내가 젊은 환관을 거느리고 친히 가서 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세자가 불을 피하여 나와서 앉아 있기에 데리고 대내(大內)로 왔는데, 그 불은 당초 밖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중종실록》 1543년 2월 24일)


흥미롭게도, 이날은 바로 구수담이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대윤과 소윤을 언급했던 날이다.

『대사간 구수담이 아뢰기를, "풍문에 의하면 간사한 의논이 비등하여 ‘윤임을 대윤(大尹)이라 하고 윤원형을 소윤(小尹)이라 하는데 각각 당여(黨與)를 세웠다.’ 합니다. 그 실정을 따져보니, 윤임은 부귀가 이미 극에 달했고 원형은 청년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좋은 벼슬을 역임하였으므로 이미 부족한 것이 없는데 무슨 일을 일으키려고 다시 당여를 세운단 말입니까?"』 (《중종실록》 1543년 2월 24일)


즉, 동궁 화재로 다시금 대윤과 소윤이 서로 충돌하자, 참다못한 구수담이 공개석상에서 이 말을 꺼냈고, 이에 중종이 위와 같이 설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내가 직접 봤는데, 그런 거 아니라고 얘기했잖아! 너희들 뭐 하자는 거야? 어?'


중종이 강경하게 나오자, 대윤 쪽은 한발 물러섰다.

윤임은 사직 상소를 올렸다.

『판돈녕부사 윤임이 아뢰기를, "신은 무사(武士)의 동아리 가운데 가장 무식하고 용렬한 사람인데 상께서 편벽되게 총애하시어 외람되이 분수에 넘치는 관직에 있으므로 외척의 세력이 너무 심하게 되었습니다... 예부터 외척의 권세가 너무 무거우면 나랏일이 잘못되지 않을 때가 없었습니다. 지금 신의 죄를 다스린다면 물정(物情)이 곧 쾌하게 되고 나라도 안정될 것입니다."』 (《중종실록》 1543년 2월 29일)


윤임이 한발 물러선 건 동궁 화재 사건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이 사건에는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작서의 변'은 불에 지져진 쥐, '가작인두의 변'은 저주의 말이 적힌 목패 인형이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있었다.

그런데 동궁 화재 사건은 아니었다.

중종이 '응, 내가 직접 봤는데 그거 아냐.'라고 실드치고 나섰으니, 대윤이 어찌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로써 팽팽했던 긴장감은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그건 폭풍 전의 고요였을 뿐이었다.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데, 저런 일이 터지고 나니 양쪽 모두 서로에 대한 불신만 더욱 깊어졌다.


명화 '대부(Godfather)'에는 이런 장면이 있다.

큰아들 소니가 죽은 뒤, 대부 비토 꼴레오네가 반대파 보스들을 불러 모았다.

그는 솔로조를 죽이고 유럽으로 도망친 막내아들 마이클을 다시 미국으로 데려오겠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미신을 믿는 사람이오. 만약 그 아이가 경찰관에게 머리에 총을 맞거나, 감옥에서 목을 매거나, 벼락에 맞아 죽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긴다면, 난 이 방에 있는 여러분들을 탓할 것이오. 그리고,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오."

(I’m a superstitious man, and if some unlucky accident should befall him — if he should get shot in the head by a police officer, or if he should hang himself in his jail cell, or if he’s struck by a bolt of lightning — then I’m going to blame some of the people in this room. And that, I do not forgive.)


대윤과 소윤이 서로를 불신하는 마음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으리라.


1544년 9월, 결국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사헌 정순붕이 아뢰기를, "대윤·소윤이라는 말은 일어난 지 이미 오래고 점점 표적이 되어, 어느 재상은 어느 윤(尹)의 당이라고 지칭하여 대소 두 길로 가르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습니까... 사람이 혹 윤임을 보러 가면 대윤의 당이라 지칭하고 윤원형을 보러 간 자는 소윤이라 지칭하므로, 대소가 의심하여 서로 찾아가지 못하고, 집을 옮겨 살려는 자까지 있습니다."』 (《중종실록》 1544년 9월 29일)


이에 중종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던지, 결단을 내렸다.

이때 그가 어떻게 했는지 아는가?

그는 1537년 김안로 사사 때 확보해둔 윤임의 '치명적 약점,' 허경의 공초를 가져다 대신들에게 던졌다.


『이어 또 전교하였다. "오늘 의논할 일이 적지 않으니, 양사의 장관과 홍문관의 장관도 아울러 명소하라. 허경(許坰)의 추안에 상고할 것이 있으니, 금부를 시켜 가지고 오게 하라."』 (《중종실록》 1544년 9월 29일)


『상이 의논을 내리기를, "간사한 말을 낸 자는 근거가 없으면 추문하기가 워낙 어렵겠으나, 이 일은 그 근원에 자취가 있는데, 허경의 추안을 경들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내가 ‘이 일은 끝내 안정되지 못할 듯하나 간흉(奸兇)을 이미 다스렸으니 인심이 절로 진정될 것이다.’고 생각하였으므로 나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도 이 말이 없어지지 않아서 지금의 사림은 그 꼬투리를 모르고 이처럼 떠들썩하게 말하는데, 이것은 사림이 스스로 꾸민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서 이 말이 나왔다고 의심할 수도 없는 것으로 이 말은 모두 정유년의 일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실록》 1544년 9월 29일)


중종은 대윤과 소윤의 다툼의 근원이 윤임에게 있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구수담이 그 기미를 발설하여 그 간사한 말을 진정하려 하였으나 내가 그 호오(好惡)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 말이 이제까지도 그치지 않는다. 윤임은 간흉에게 간사한 의논을 맨 먼저 내어서 이제까지도 그치지 않게 하였으므로 지극히 그르니 외방으로 귀양보내야 하겠고, 윤원형은 이렇게 진정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파면해야 하겠다."』 (《중종실록》 1544년 9월 29일)


중종은 큰맘을 먹은 것처럼 보였으나, 추가 조치를 취하진 못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좌의정 홍언필, 우의정 윤인경이 빈청에 나아가 문안하니 답하기를, "내가 지난 봄부터 오른쪽 어깨에 통증이 있어서 약을 쓰고 치료했더니 여름철에는 낫는 듯했는데 근래에 다시 통증을 느낀다. 지난 새벽에 땀이 나더니 지금은 덜한 듯하다..."』 (《중종실록》 1544년 10월 6일)


그러면서 중종은 인종이 국사에 참여하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만약 세자로 하여금 일찍부터 국가 대사를 익히게 한다면 후일의 일이 어찌 잘되지 않겠는가. 내가 《국조보감》을 보니 공정(태종)조에도 세자가 군국(軍國)의 중요한 일을 담당한 일이 있었는데 무슨 일을 시행했었는지 모르겠다. 세자가 비록 일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 대사를 미리 알게 하는 것은 매우 좋은 뜻이다."』 (《중종실록》 1544년 10월 6일)


하지만 이번에도 대윤은 인종의 국정 참여를 거부했다.

그들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대사헌 정순붕 등이 상차하기를, "엎드려 살피건대, 전하께서 대신들에게 하의하시어 세자로 하여금 서무(庶務)를 참결(參決)하고 국사를 익히게 하려고 하시는데, 신들은, 세자의 직임은 문안과 시선(視膳) 이외에는 다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경》에 효(孝)를 말했는데 ‘효도를 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그것을 정사에까지 베풀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것 역시 정사입니다. 어찌 꼭 정사를 해야만 정사이겠습니까.

어질고 덕있는 사람을 빈료로 삼고 성학의 오묘함을 강론하여 효우(孝友)의 근본을 미루어 밝혀나간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가 모두 여기에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실로 정사 중에서 큰 것인데 다시 무엇을 익힐 것이 있겠습니까."』 (《중종실록》 1544년 10월 10일)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차기 국왕더러 나랏일을 익힐 필요가 없다니, 이런 개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대윤은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든 말든 알 바 아니고, 그저 인종의 지능 문제를 끝까지 잘 숨겨 중종 사후 왕위만 무사히 넘겨받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뒤에 이어지는 말은 더더욱 어이가 없다.

『전하께서 비록 일시적인 대단찮은 병환이 계시지만 춘추가 아직 모기(耄期, 70-80세)에는 이르지 않으셨는데 갑자기 이러한 전교를 내리시므로 신민이 놀라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 또한 진정하는 방도가 아닌 듯합니다."』 (《중종실록》 1544년 10월 10일)


한마디로 이렇게 들린다.

(대윤) "야, 우리 안 속아. 꿈 깨. 아직 70살도 안 되었으면서 조금 아프다고 죽는소리는."


그러나 이때 중종의 말은 그의 진심이었고, 다른 정치적 의도 역시 없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 생의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1544년 11월 14일, 중종은 정승과 승지 등을 불러 다시금 전위의 뜻을 밝혔다.

『이어 홍언필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비록 형체는 있으나 사람 구실을 할 수 없다... 내가 국사를 볼 수 없는 사실을 조정 대소인(大小人)이 누가 모르겠는가. 세자에게 전위를 해야 인심에도 합할 것이니 조정 상하가 억지로 고집해서는 안 되고 대신들도 내 뜻을 따르면 매우 다행하겠다. 내가 말하는 어조만 보아도 병이 중하다는 것을 알 것이니 이 밖에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상의 병환이 아주 위독하여 숨이 곧 끊어질 지경이었고 말도 이어지지 않았으며, 편히 앉아 있지도 못하므로, 좌우가 모두 소리없이 울었다.】』 (《중종실록》 1544년 11월 14일)


중종이 위독한 상태임을 빤히 보면서도, 게다가 직접 저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인종과 대신들은 전위를 반대했다.

인종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다들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가? 당장 숨이 넘어가게 생긴 판에, 중종이 뭔 정치적 노림수가 있겠는가?


사신 역시 이렇게 평했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즉위한 이래 권간(權奸)이 용사(用事)하여 조정을 제멋대로 어지럽혀서 골육에까지 화가 미쳤으니 심려가 마침내 병이 된 것은 당연하다... 또 임금의 대권을 행사하지도 못하고 억지로 따르다가 이것이 쌓여서 고황(膏肓)에 병이 들어 끝내 구제할 수 없는 슬픔에 이르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병세가 이와 같은데 어찌 다른 생각이 있겠는가.』 (《중종실록》 1544년 11월 14일)


결국 다음 날, 중종은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닷새 뒤인 11월 20일, 인종은 창경궁에서 조선 제12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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