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로마 황제 티투스(Titus, 39~81)에 대한 평가가 나온다.
티투스는 서기 79년 6월 제위에 올랐지만, 폼페이 화산 폭발에 로마 대화재, 전염병까지 겹치는 바람에 재위 내내 재난 수습에만 매달리다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 불운한 황제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좋다.
당시에도 불쌍한 황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단 뜻이다.
그런데 『로마인 이야기』엔 딱히 한 게 없는데 고평가를 받는 그를 비판하는 문구 역시 등장한다.
"치세가 짧으면 누구라도 좋은 황제가 될 수 있다."
난 인종에 대한 평가가 티투스의 경우와 같다고 생각한다.
인종은 백성들이나 사대부들 눈에 ‘아버지 죽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가엾은 왕’으로 보였다.
그의 죽음은 유교 사회가 숭상하는 최고의 가치, 즉 '효(孝)'의 가장 극적인 구현으로 받아들여졌다.
겉으로만 보자면, 그는 아마 한반도 역사 이래 '최고의 효자'였을 것이다.
사림은 그런 인종을 '효자 성군'으로 떠받들었다.
중종 치세 말기부터 사실상 조정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그들은 '유교 꼰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인종의 '아무나 할 수 없는 효행'을 적극 활용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사림 세력들이 인종을 더더욱 띄울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그들의 '슈퍼스타' 조광조 때문이었다.
나는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사림이 줄곧 중종의 반대편에 섰다고 본다.
그들에게 중종은 '대유(大儒)' 조광조를 죽인 것도 모자라, 여인들의 치마폭에 놀아나 서자(복성군)나 나이 어린 대군(경원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정신 나간 군주'로 비쳤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반대 급부로 중종의 적장자이자 가장 적법한 후계자, 인종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대윤의 수장, 윤임은 이걸 아주 영리하게 이용했다.
“경빈이 인종을 저주하기 위해 음사를 했다더라”, “문정왕후가 아들 낳고 인종을 박대한다더라.”는 식의 소문만 흘리면, 사림은 즉각 들고일어나 중종에게 그들을 처단하라고 압박했다.
이처럼 인종·윤임과 사림의 이해가 맞물리며 만들어진 정치적 산물이 바로 조광조의 신원 회복이었다.
인종은 죽기 전날, 중종에 의해 사사된 조광조의 벼슬을 회복시키라는 전교를 내렸다.
『"조광조 등의 일은 내가 늘 마음 속에서 잊지 않았으나 선왕께서 전에 허락하지 않으셨으므로 내가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하고 천천히 하려 하였다. 이제는 내병이 위독하여 날로 더욱 심해져서 다시 살아날 가망이 전혀 없으므로 비로소 유언하여 뒤미처 인심을 위로하니, 조광조 등의 벼슬을 일체 전일의 중의(衆議)처럼 회복할 수 있으면 다행하겠다. 현량과도 전에 아뢴 대로 그 과를 회복하여 거두어 등용하도록 하라."』 (《인종실록》 1545년 6월 29일)
그런데 조광조의 사면 복권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참고할 만한 과거 사례가 있다.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한 뒤, 터무니없는 이유를 들어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가문을 풍비박산 내버렸다.
세종은 태종이 사망하고 나서도 30여 년 가까이 왕위에 있었지만, 생전에 장인의 신원을 회복시키지 않았다.
심온의 신원 회복은 문종 대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도승지 이계전에게 명하여 정부(政府)에서 의논하도록 하며 말하기를, "모후의 황고(皇考)는 영릉의 비문(碑文)에 실리므로 관직이 없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대신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으나 중의가 한결같지 않으므로 직첩을 도로 주지 못하였다. 내가 굳이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비문이 한 번 새겨지고 나면 후세에 고치기 어려우므로 다시 의논하게 한다." 하니,...
임금이 곧 이조·병조에 명하여 그 직첩을 도로 주게 하였다.』 (《문종실록》 1451년 7월 22일)
세종이 장인 심온이 무죄라는 걸 몰랐겠는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치세에 신원 회복을 하지 못했던 이유가 뭐겠는가?
태종이 죽자마자 사면하고 신원을 회복시켜주면, 그건 곧 태종이 무고한 사람을 죽였다는 걸 시인하는 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야, 우리 아버지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잡아다 죽이고, 그 가족들을 노비로 만들었다."
이건 단순한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아버지를 천하의 몹쓸 인간으로 만드는 불효였다.
그러니 세종이 하지 못했던 것이다.
중종도 마찬가지였다.
중종은 복성군의 신원은 회복시켜 주었지만, 경빈은 끝내 복권시키지 않았다.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을 끝내 구해주지 않은 이유가 뭐겠는가?
경빈은 중종의 모후, 자순대비에게 ‘작서의 변’의 배후로 지목된 인물이었다.
즉, 경빈의 신원을 회복시켜준다는 건 “우리 어머니가 그때 잘못해서 엄한 사람을 잡았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니, 중종이 끝내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답하였다. "박씨의 죄는 선후(先后)의 결단에 의한 것이니 다시 논급할 수 없다. 그리고 미에게 사약을 내리자는 것은 선후의 생존시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간당(奸黨)의 논의에서 나온 것이다."』 (《중종실록》 1539년 윤7월 7일)
그런데 그 효심이 지극하다던 인종이, 조광조의 신원을 회복시키라고 명을 내렸다.
이건 곧 "중종이 죄 없는 조광조를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대외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뭘 의미하겠는가?
인종은 조광조 복권이 곧 부친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란 걸 이해하지 못했다.
즉, 그의 이해력과 사고력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요인들이 맞물리며, 인종은 후대에 “오래 살았다면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극찬을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종 치세의 실상이 어떠했는가?
그가 대신들과의 만남을 거부하고 제 방에 틀어박히는 바람에, 모든 나랏일을 대신들이 알아서 처리했다.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그가 한 일이라곤 명의 사신을 접대한 것뿐이었다.
『장사지내고 나서는 늘 상차(喪次)에 계셨는데, 궁인을 물리치시어 모시는 자는 다만 소환(小宦) 두어 사람뿐이었다. 비록 세대는 달라져서 양암(亮陰)에서도 명계하는 것이 없을 수 없으나, 군국의 일을 모두 대신에게 위임하였고, 혹 말하면 부드러우셨다.』 (《인종실록》 인종대왕 묘지문)
이게 8개월 만에 끝났으니 망정이지, 이 상태로 몇 년 더 갔다면 조정은 아마 난장판이 됐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암군(暗君)의 대명사, 서진 황제 사마충의 사례를 보자.
지능이 떨어져 국정을 장악하지 못하다 보니 결국 조정 내부에 대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황후 가남풍이 황태자 사마휼을 죽이자 그걸 빌미로 여러 사마씨 왕(王)들이 들고일어나 '팔왕의 난'이 벌어졌다.
가남풍은 죽고, 사마충은 제위에서 쫓겨났다가 복위하는 등 '개판'이 되어 버렸다.
인종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종 말기부터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 대윤과 소윤의 앙금은 이미 되돌릴 수 없었다.
그의 치세가 몇 년 더 이어졌다면, 결국 인종을 앞세운 대윤이 소윤을 몰아냈을 것이다.
효자 인종이 그걸 두고 봤을 리가 없을 거라고?
하지만 실록을 보면, 이미 그 조짐은 그의 재위 8개월 동안에도 드러난다.
중종의 졸곡제가 끝나자 도승지 윤원형이 공조참판으로 임명됐다.
『정순붕을 의정부 우참찬으로, 강현을 형조 판서로, 윤원형을 공조 참판으로, 이명규를 승정원 도승지로 삼았다.』 (《인종실록》 1545년 2월 28일)
이에 대간이 득달같이 반발했다.
『대간이 아뢰기를, "공조 참판 윤원형은 인물이 교만하고 망령되어, 전에 부경(赴京)할 때에 부상(富商)을 데리고 감으로써 중국에서 모욕을 받았으니 매우 비루합니다. 정원(政院)에 있을 때에 이미 물론이 있었는데 가선 대부의 중한 가자(加資)를 특별히 제수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랍고 괴이하게 여깁니다. 척리(戚里)인 사람은 어질고 재능이 있다 해도 특별히 제수해서는 안 되는데 더구나 적격자가 아닌 사람이겠습니까. 신정(新政)에 누가 되는 것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니 모두 개정하소서."』 (《인종실록》 1545년 3월 2일)
결국 인종은 윤원형을 파직시켰다.
『대간이 강현·윤원형의 일을 아뢰고 또 특별히 명하는 것이 그르다는 것을 논하니, 답하였다. "고사(古事)는 내가 모르지마는 당상 이상의 가자를 위에서 특별히 명하는 것을 내가 전에 친히 보았으니 그것이 그른 줄 모르겠다.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예전의 성제(聖帝)도 어렵게 여겼다. 그러나 물론이 이러하므로 따른다."』 (《인종실록》 1545년 3월 5일)
난 이때 인종이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본다.
승정원에 포진한 윤임 측 인사들이 인종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은 채, 임금의 이름만 빌려 자기들끼리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조차 이런 취급을 받았을진대, 다른 소윤 인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결국 인종의 조정은, 임금이 없는 나라나 다름없었다.
국왕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 윤임과 대윤 인사들이 왕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정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인종이 아무리 착하고 효심 깊었다 한들,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인종의 치세가 8개월 만에 끝난 건, 어쩌면 나라를 위해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역시 암군이었다. 군주로서는 낙제점이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보자면 난 그를 진심으로 동정한다.
그는 1년여에 걸쳐 서서히 죽어갔다.
왕위에 오른 직후부터 몰라볼 만큼 수척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이 극심했을 것이다.
그 오랜 고통을 그는 끝까지 견뎌냈다. 그것도 의식이 또렷한 채로.
이유가 뭐가 됐든, 그렇게까지 괴로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쓰럽다.
인종이 숨을 거두기 전날, 윤인경과 유관이 그를 보고 쏟아낸 눈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