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1차 요동 원정 Part 2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 태조와 지용수 등이 의주에 도착하여, 부교(浮橋)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사》 1370년 11월 2일)
『〈아군이〉 요성(遼城)으로 진군한 뒤 요성을 급습하여 함락시켰다.』 (《고려사》 1370년 11월 4일)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록은 이 두 가지가 전부다.
여기에 《태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덧붙인다.
『이때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성(城)을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게 됨은 고려와 같은 나라가 없을 것이다." 하였다.』 (《태조실록》 총서)
이렇다 보니 후대에서는 흔히 '아, 이성계가 원정을 통해 요양을 함락시키고 위엄을 떨쳤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러한 인식은 1차 요동 원정 Part 2의 실상과는 전혀 다르다.
당시 서북면상원수로 원정에 참여했던 지용수의 열전에는, 이 원정의 실제 전개가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다.
이제 《고려사》 지용수 열전의 기록을 차례로 살펴보며, 1차 요동 원정 Part 2를 재구성해 보겠다.
『사졸들이 다투어 건너다가 익사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3일이 되어서야 강을 건너는 것을 마칠 수 있었다. 이날 저녁에 천둥이 치고 폭우가 내리니 군중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병마사 이구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길조인데 왜 미혹됩니까?”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그 까닭을 물었다. 이구가 말하기를,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옵니다. 지금 상원수는 용을 이름자로 쓰고 있는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니 전투에서 승리할 조짐입니다.”하니, 군중의 마음이 차츰 안정되었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이 대목에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원정의 총대장이 이성계가 아니라 지용수였다는 사실이다.
병마사 이구의 순간적인 재치 덕분에, 자칫 나락으로 떨어질 뻔했던 군사들의 사기를 겨우 다스릴 수 있었다.
계속해서 기록을 살펴보자.
『군대가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니 요성까지 2일정도 거리였는데, 보급품을 그대로 두고 7일간의 군량만을 가지고 길을 떠났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여기에서도 중요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나장탑에서 요성까지 2일 거리라 했으니, 이곳은 압록강 너머 고려군의 보급 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원정군이 고작 7일 치 군량만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사실이다.
군량을 많이 들고 가면 진군 속도가 늦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시 원정군 지휘부는, 이 원정을 속전속결로 끝낼 계획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요성을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이성계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이 글의 핵심과는 다소 거리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고려군은 요성을 함락시켰다.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였으며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목석(木石)이 섞이어 날아왔으나 우리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에 가까이 가서 급작스럽게 공격하니 마침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으며, 기사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는 도망가고 김바얀(金伯顔)은 사로잡았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그런데 성을 함락시킨 직후부터 고려군의 이상행동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날 저녁 군사는 성의 동쪽으로 물러나고 방을 붙여서 납합출과 야선불화(也先不花, 에센부카) 등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기사인테무르는 우리나라의 미천한 신하로서 최근에 원 조정에서 특별한 은혜를 과도하게 입어 지위가 1품에 올랐다. 의리상 〈나라와〉 편안함과 근심을 함께 해야 하며, 천자께서 밖으로 몽진하시니, 의리상 좌우와 선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배은망덕하게 동녕부에 숨어 아버지 기철이 주살당한 것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원한을 품고 참람히 반역을 도모하였다. 작년에 나라에서 군사를 보내어 추격하였지만 도망가서 죽이지 못하였으며 또한 행재소에도 가지 않고 물러나서 동녕부를 지키고 있다...
〈기사인테무르의〉 죄를 용서할 수 없으니 지금 군사를 일으켜 문죄하려는 것이다. 또한 김바얀 등과 함께 〈우리나라의〉 소민을 유인하고 협박하여 견고하게 성을 쌓고 왕명에 저항하였다. 우리 군대의 선봉이 김바얀 외에 합랄파두, 덕좌불화, 고달로화적을 생포하고 총관과 두목은 모두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기사인테무르 또한 도망쳐서 죄를 자수하지 않고 있으니 그가 찾아온 각 성채에서는 〈그를〉 포획하는 즉시 알리도록 하라. 만약 그를 숨겨주는 자는 동경(東京)에서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겉으로만 보면, 이 방은 나하추 등에게 보내는 경고문처럼 보인다.
'우리는 고려의 대역 죄인 기사인테무르를 단죄하기 위해 왔다. 그가 도망쳤으니 보는 즉시 넘겨라. 그를 숨겨주는 자는 처벌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이 방의 진짜 목적이, 나하추에게 보내는 일종의 변명이었다고 본다.
뜬금없는 주장처럼 보일 수 있으니, 차근차근 설명해 보겠다.
먼저 질문 하나.
왜 굳이 이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갑자기 ‘기사인테무르를 잡으러 왔다’는 명분을 꺼냈을까?
요성을 함락시킬 때까지 그런 명분은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다.
결국 이 방의 메시지는 이렇게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기사인테무르 잡으러 온 거지, 너희를 치러 온 게 아니다. 오해하지 마.'
즉, 이 메시지는 면피용 제스처,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변명이었던 셈이다.
그 판단의 근거는 곧이어 등장한다.
『처음에 성이 함락되자 우리 군사가 창고에 불을 놓아 거의 태웠는데 이때부터 군중(軍中)에 군량이 부족해졌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고려사》에는 고려군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앞서 살펴봤듯 고려군은 나장탑에서 7일 치 군량만 가지고 출발했고, 이 시점은 이미 3~4일이 경과한 상태다.
곧 식량이 바닥날 게 뻔한데, 기껏 성을 함락해 놓고 제 손으로 군량 창고를 태운다?
말이 안 된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 미친 짓이다.
그보다는 기사인테무르가 도망쳤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성이 함락되기 직전, 청야전술의 일환으로 군량 창고를 불태웠다고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다.
적에게 정보와 물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퇴각 전 주요 문서와 군량을 불태워 없애버리는 것은 병법(兵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고려군은 급습을 통한 속전속결을 노리고 최소한의 군량만 들고 왔다.
이는, 원나라 지휘부가 대응하기 전에 각개격파하겠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기사인테무르를 놓쳐버렸다.
요성에서 탈출한 그가 어디로 가겠는가? 당연히 나하추나 에센부카에게 고려군의 침공을 알리지 않겠는가?
이로써 고려군의 작전 계획이 다 틀어져 버렸다.
아니, 그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때 고려군 지휘부의 머릿속에는 아마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조. 때. 따.'
그리고 그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다음날 군대가 성의 서쪽 40리 까지 왔는데 이날 밤 붉은 기운이 군영에 서리어 불과 같이 치솟았다. 일관(日官) 노을준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서리었으니 주둔한 것을 옮기면 크게 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만호 배언 등이 석성(石城)에서 고가노를 공격하여 돌아오지 못하였는데 머물면서 〈그들을〉 기다리고자 노을준의 말에 따라 퇴각하였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먼저 고려군의 위치부터 보자.
'성의 서쪽 40리까지 왔다'고 되어 있는데, 40리면 현대 도량형으로 16킬로미터다.
하루 만에 성으로부터 16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미 성을 버리고 튀고 있었다는 얘기다.
즉, 노을준의 조언에 따라 퇴각한 것이 아니라, 기사인테무르가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탈출한 걸 안 순간 위기라 판단하고 퇴각을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어지는 '붉은 기운이 군영에 서리어 불과 같이 치솟았다'는 표현.
이것이 정말 천문이나 자연 현상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것을 야습에 대한 묘사로 해석한다.
즉, 고려군의 침공을 보고받은 나하추가 급히 추격을 개시, 요성 서쪽 40리 지점에서 고려군을 따라잡고 야습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어지는 기록도 눈여겨봐야 한다.
《고려사》 국역본에는 '〈그들을〉 기다리고자 노을준의 말에 따라 퇴각하였다.'는 식으로 어색하게 해석되어 있는데, 원문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명확해진다.
"時萬戶裴彦等, 擊高家奴于石城未還, 欲留待, 以乙俊言班師.
그때 만호 배언 등이 석성에서 고가노를 공격하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들을 기다리려 했으나, 노을준의 말에 따라 철군하였다."
여기서 기사인테무르를 벌하려 했다는 고려군의 명분이 거짓임이 다시 드러난다.
정말 기사인테무르만 잡으려고 왔다면, 석성의 고가노는 왜 공격했는가?
조금만 생각하고 들여다 보면,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무엇보다 석성을 공격하러 간 아군조차 기다리지 못하고 서둘러 철군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이후 고려군의 퇴각 과정은 처참함, 그 자체이다.
『여러 장수들이 직로(直路)로 되돌아갈 것을 청하였는데, 지용수가 듣지 않고 열병(閱兵)하여 해변을 따라 군사를 되돌리고자 하였다. 사졸들은 크게 굶주리자 소와 말을 잡아먹었으며 군대는 대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군사들이 〈굶주리고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이〉 더욱 심해지니 마침내 지름길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적병이 추격하는 것이 두려워 사졸들에게 들에서 자도록 하였으며 각각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도록 하였다.
납합출이 과연 2일 동안 뒤를 밟아 오며 말하기를,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고 군대의 행렬이 가지런하니 습격할 수가 없다.”라고 하고는 이내 돌아가 버렸다. 3일이 지나자 군대가 송참(松站)에 이르렀는데 진무(鎭撫) 나천서가 수백석의 곡식을 얻어 배불리 먹이니 군대가 마침내 구제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눈보라와 심한 추위로 길이 얼고 미끄러워 사졸과 말이 많이 죽었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
우선 고려군의 퇴각 경로를 살펴보자.
왜 총대장 지용수는 다른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변을 따라 돌아가려 했을까?
나는 이것이 석성을 공격하러 갔던 배언의 군대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
석성의 위치에 관련된 기록이 있다.
『《성경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석성산(石城山)은 개평성(蓋平城)에서 동북쪽으로 13리 되는 곳에 있는데, 일명 고려성산(高麗城山)이라고 한다.』 (《해동역사》 지리고 6, 고구려)
여기에서 등장하는 개평성은 현재 중국 요녕성 개주시(遼寧省 蓋州市)로, 석성이 발해만 인근에 위치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지용수는 원정군의 총대장으로서 석성에 있는 배언 등을 데려가려 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결국 그들을 포기한 채 냅다 지름길로 튀었던 것이다.
나하추가 이틀간 고려군의 뒤를 쫓다가 그냥 돌아갔다는 《고려사》의 기록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위에서는 '군대는 대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고 서술해 놓고, 바로 다음에는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고 군대의 행렬이 가지런하니 습격할 수가 없었다'며 횡설수설하고 있다.
그리고 앞선 '이성계와 나하추의 첫 대면' 파트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 사관이 나하추가 저런 말을 했는지 어떻게 알고 기록할 수 있단 말인가?
기사인테무르가 군량을 싹 태우고 도망친 걸 알고 '1차 멘붕'이 왔고, 퇴각하다 나하추에게 따라잡혀 '2차 멘붕'이 와 경로마저 바꾸고 튀었던 정황상, 고려군은 패닉에 빠져 무질서하게 퇴각했을 것이다.
이런 군대야말로 최고의 먹잇감이며, 이를 추격해서 전과를 확대하는 것 역시 병법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나하추가 뒤만 쫓아오다가 그냥 돌아갔다고? 천만에.
그는 고려군을 추격해서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 것이다.
나하추가 이틀 만에 발길을 돌린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원정군의 베이스 캠프 나장탑에서 요성까지가 이틀 거리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즉, 나하추는 이틀 동안 퇴각하는 고려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다, 고려의 세력권이 가까워지자 더 이상 추격하는 건 위험부담이 있다고 판단, '이 정도 줘팼으면 됐다.' 하고 되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3일이 지나자 군대가 송참에 이르렀는데 진무 나천서가 수백석의 곡식을 얻어 배불리 먹이니 군대가 마침내 구제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의 원정 기록과 나의 해석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과연 이것이 승리한 전쟁인가?
승리한 전쟁이라면 이유는 무엇인가? 요성을 함락시켰으니까?
그렇다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도 모스크바를 함락시켰으니 승리한 전쟁인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은 수많은 병력과 물자의 대부분을 잃은 처참한 패배였다.
같은 논리로, 1차 요동 원정 Part 2 역시 명백한 대실패였다.
《고려사》 지용수 열전의 맨 마지막 문장이 모든 진실을 말해준다.
"사졸과 말이 많이 죽었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이때 이성계를 비롯한 고려군은 나하추에게 '영혼까지 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대패를 기록한 것이다.
1차 요동 원정 Part 2가 패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이후에도 등장한다.
이듬해 8월, 공민왕은 안우경 등을 보내 오로산성(五老山城)을 공격했다.
『서경도만호 안우경, 안주상만호 이순을 보내 오로산성을 정벌하게 하였다.』 (《고려사》 1371년 9월 2일)
이때 고려군은 성을 함락시키고 원나라 장수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다.
『판사 황용성이 와서 보고하기를, “우리 군이 오로산성을 함락시키고 원 추밀원부사 합랄불화(哈刺不花, 카라부카)를 생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1371년 10월 7일)
이 오로산성은 1차 요동 원정 Part 1에서 고려군이 함락시킨 우라산성(亏羅山城)과 표기만 다를 뿐, 같은 성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즉, 우라산성을 함락시키고 요양으로 진격했다가 나하추에게 털려 퇴각한 이후, 이 지역을 다시 원이 차지했단 얘기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1371년 오로산성을 함락시킨 안우경은 홍건적의 침입 때부터 맹활약하여 원 황제로부터 벼슬을 받은 적도 있는, 고려의 '네임드' 장수였다.
『안우경은 세계(世系)와 이력이 자세하지 않다. 공민왕 8년(1359)에 안우 등을 따라 홍건적을 격퇴시켰고 뒤에 안우 등과 함께 경도(京都)를 수복하였는데, 공로가 모두 1등이었다. 또 흥왕사의 적을 토벌하니 공을 기려 역시 1등으로 하였다. 원에서 홍건적을 평정한 공로로 사신을 보내어 봉훈대부 광문감승을 제수하였다.』 (《고려사》 안우경 열전)
이토록 유능한 베테랑 장수를 왜 1차 요동 원정에 쓰지 않았던가?
그리고 고려 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무장, 최영은 또 어디에 가 있었단 말인가?
안우경과 최영 등이 1차 요동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당시 고려의 실질적 행정 리더였던 신돈에게 찍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안우경은〉 오인택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가 일이 누설되어 장형(杖刑)을 받고 남원으로 유배되었으며 노비가 되었고 집을 몰수당하였다.』 (《고려사》 안우경 열전)
『최영이 일찍이 밀직 김란이 딸을 신돈에게 주었음을 꾸짖어 신돈이 그를 미워하였다... 최영이 명령을 듣고 궁궐을 향하여 탄식하기를, “지금 죄를 얻은 자는 목숨을 보전하기 드문데, 나는 계림윤이 되었으니 임금의 은혜가 두텁구나.”라고 하면서 마침내 떠났다. 신돈이 다시 최영이 이구수 등과 함께 환관들과 결탁하여 왕과 신하를 이간시켰다고 무고하니, 〈왕이〉 그 당여인 이득림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였다. 최영이 거짓으로 자백하면서 말하기를 “청컨대 빨리 처형하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3품 이상의 작위를 빼앗고 그의 전민(田民)을 적몰하여 유배 보냈다.』 (《고려사》 최영 열전)
신돈에게 쫓겨난 고관대작들은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정권을 잡은 신돈은 고려 조정을 거의 통째로 물갈이하다시피 했다.
『정권을 잡은 지 30여 일 만에 대신들을 참소하여 영도첨의 이공수, 시중 경천흥, 판삼사사 이수산, 찬성사 송경, 밀직 한공의, 정당 원송수, 동지밀직 왕중귀 등을 파직하여 내쫓았으며, 총재(冢宰)나 대간(臺諫)도 모두 그의 입에서 나왔다.』 (《고려사》 신돈 열전)
종합해 보면, 신돈이 권력을 잡은 후 그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기득권 세력 상당수가 조정에서 내쫓겼던 것이다.
이성계는 신돈이 일으킨 숙청의 폭풍에 휘말리지 않고 살아남았다.
부친 이자춘을 따라 고려에 귀순했으니 조정 내 기반이 없었고, 이자춘 사후 동북면 군대를 맡아 전쟁터에서 활약한 지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즉, 이때 이성계는 '그 정도 급'이 아니었단 얘기다.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신돈은 반원파였다.
《고려사》 신돈 열전에는 그의 이런 성향이 잘 나타나 있다.
『〈공민왕〉 16년(1367) 원에서 신돈에게 영록대부 집현전대학사로 삼고 의복과 술을 보내니, 신돈이 받아서 자리 옆에 두고 말하기를, “이 물건들을 무엇에 쓰겠는가? 다만 저들이 준 것이니 버릴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고려사》 신돈 열전)
1368년 명나라가 원을 밀어내고 사신을 보내오자 정몽주 등 신진사대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원을 버리고 명과 손을 잡았다고 알려져 있다.
『처음 명이 건국되자 정몽주가 조정에 극력 요청하여 맨 먼저 귀부하였는데,...』 (《고려사》 정몽주 열전)
물론 정몽주 등이 명과 손잡을 것을 주장한 건 맞지만, 당시 실질적 정책 결정권자인 신돈이 반원파가 아니었다면 고려가 그토록 빨리 원을 버리고 명과 손을 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더구나 신돈이 이미 말 안 듣는 기득권 친원파 세력을 싹 밀어버렸기에, 정몽주 등의 주장이 힘을 받을 수 있었다.
명에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공민왕〉 19년(1370) 〈명〉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책봉의〉 명을 내리고, 아울러 신돈에게 채색 비단에 황제의 옥새가 찍힌 글을 내리면서 ‘상국(相國) 신돈’이라 칭하였다.』 (《고려사》 신돈 열전)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1차 요동 원정은 명과 손잡고 원을 버리는 신돈의 외교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자 그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요동 원정이 대실패로 끝나자 그의 권력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큰 사고를 쳤으면 마땅히 자중해야 하건만, 거의 모든 권력자가 그러하듯 신돈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마 이를 계기로 조정의 반발이 거세졌을 것이고,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요동 원정이 실패로 끝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서였다.
『신돈이 처형되고, 그 일당 대호군 이백수를 처형하였으며, 성여완·조사겸·유준을 유배 보냈다.』 (《고려사》 1371년 7월 9일)
신돈의 최후는 《삼국지》에서 흥세 전투의 대패 이후 권력을 유지하려다 사마의에게 몰락한 위나라의 조상, 합비에서의 대실패 이후 조정을 힘으로 억누르려다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 오나라의 제갈각 사례와 별반 다르지 않다.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글쓰기를 중단하려고 합니다. 7~8월 이후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