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7)

by Loxias

* 1차 요동 원정 Part 1


1368년, 동북아 정세에 거대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원(元)이 명(明)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수도 대도(大都)를 포기, 상도(上都)로 달아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 김지수가 원에서 와서 말하기를, “명 수군의 함선 10,000여 척이 통주에 정박하고 〈원나라〉 서울로 들어오니, 원 황제와 황후가 상도로 달아났으며, 태자도 전투에서 패하자 또한 상도로 달아났습니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1368년 9월 18일)


흔히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하지 않는가.

주원장은 원의 수도를 함락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아직 대륙 전역에서 원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특히,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요동 지역에는 아직 원의 세력이 건재했다.


대도에서 쫓겨난 원은 고려에 지속적으로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원에서 이용감태경(利用監太卿) 만자한을 보내어 조서로 알리기를,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명령하노니, 회복할 방법을 꾀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고려사》 1368년 11월 19일)

『18년(1369) 봄 정월 신축에 요양성의 납합출과 평장(平章) 홍보보가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고려사》 1369년 1월 6일)

『원이 중서성우승(中書省右丞) 두리한(豆利罕, 투르칸)을 보내어 왕에게 옷과 술을 하사하였으며, 왕이 두리한에게 의복과 금으로 만든 띠를 선물로 주었으나 〈두리한이〉 받지 않았다.』 (《고려사》 1369년 2월 23일)


원이 갑자기 고려에 공을 들이는 이유가 뭐겠는가?

명과의 전쟁에서 고려의 군사적 지원을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던 1369년 4월, 이번에는 명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

작년 11월 남경을 출발했으니, 반년이 지나서야 도착한 것이다.

『대명황제가 고려국왕에게 서신을 보냅니다. 송이 통제력을 잃고부터 하늘이 그 제사를 끊어버렸으며, 원은 우리와 같은 족류(族類)가 아닌데 천명을 받아 중국에 들어와 주인이 된 것이 100년이 넘었습니다. 하늘은 그들이 어리석고 음란한 것을 싫어하여 또한 그 운명을 죽여 끊어버렸으니, 화이(華夷)가 어지러워진 지도 18년이 되었습니다...

옛날 우리 중국의 임금은 고려와 영토를 서로 접하고 있었으므로 그 왕은 혹 신하가 되거나 또는 빈객(賓客)이 되었으니, 대체로 중국의 풍교(風敎)를 사모하여 살아있는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하늘이 그 덕을 살펴보았으니 어찌 영원히 고려에서 왕이 되지 않게 하겠습니까?

짐은 비록 덕이 중국의 예전 현명한 왕들에게는 미치지 못하여 사방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복속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천하에 두루 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고려사》 1369년 4월 28일)


주원장의 서신은 사뭇 공손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명 역시 고려를 달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전체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고려가 원과의 관계를 끊고 명에 협조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러한 주원장의 제안에 고려는 즉각 편을 들지는 않았으나, 분명한 호감을 표하며 화답했다.

『〈원의〉 지정(至正) 연호 사용을 그만두었다.』 (《고려사》 1369년 5월 8일)

『예부상서 홍상재와 감문위상호군 이하생을 보내어 금릉(金陵)에 가서 표문을 올려 등극을 하례하게 하고, 이어서 사례하게 하였다. 그 표문에 이르기를,

"황제폐하의 문덕(文德)과 광명(光明)은 순(舜) 임금보다 뛰어나며 용맹과 지략은 탕(湯) 임금을 넘습니다. 우레가 몰아치고 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이 무력으로 전란을 평정하시는 커다란 업적을 이루셨으며, 옛 나라를 없애시고 새 나라를 세우셔서 위대한 국호를 일으켜 창업하여 자손에게 전하시니, 제도 문물이 찬연하게 빛나며 중국과 이민족들을 모두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신은 멀리 동쪽 바깥에 거처하고 있으므로 북쪽만을 멀리서 우러러보고 있는데, 비록 하례를 드리는 반열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있지만 항상 간절한 정성만은 바치고자 합니다."』 (《고려사》 1369년 5월 11일)


한 달 뒤인 6월, 주원장은 다시 한번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를 회유했다.

『황제가 환관 김려연을 파견하여 글을 보내왔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작년 겨울에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어 중국을 평정하여 편안히 만든 사정을 모두 알려주게 하였는데, 도착한 지가 이미 오래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래에 유연(幽燕) 지역의 민들을 이주시켜 남쪽으로 와서 생계를 유지하게 하였는데, 그중에 고려의 민이 165명 있었으니 어찌 고향과 골육에 대한 생각이 없겠습니까? 짐은 이를 매우 가엾게 여겨 즉시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배를 갖추게 한 다음 사신을 파견하여 〈이들을〉 호송해 동쪽으로 돌려보내려고 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사라(紗羅) 각 6필씩을 가져가게 하니, 예물과 서신이 도착하면 받도록 하십시오."』 (《고려사》 1369년 6월 4일)


훗날 조선의 사신들을 잡아 가두고 정도전을 압송하라며 윽박지르는 주원장이 이랬다는 게 상상이 되는가?

고려 유민들을 돌려보내면서 선물까지 챙겨주는 그의 내심은 아마 이랬을 것이다.

'야, 나한테 넘어와. 잘해줄게. 이건 내 조그마한 성의야.'


주원장만 고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던 게 아니었다.

원 역시 고려를 자기 편으로 묶어두기 위해 사신을 후대하고 왕실 간의 혼담까지 제안하며 매달렸다.

『북원의 오왕(吳王)·회왕(淮王)·쌍합달왕(雙哈達王)이 모두 사신을 보내어 보빙(報聘)하게 하면서 말 40여 필을 바쳤다. 이때 오왕 등이 우리나라에 먼저 문안사절을 보냈으므로 우리도 우제를 보내어 답례하게 하였는데, 오왕이 우리에게 〈왕실 간의〉 혼인을 요청하였으며, 회왕은 우제를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또 자기 딸을 우리나라에 시집보내려고 하면서 자기 딸을 〈우제가〉 볼 것을 요청하였다. 우제가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신은 문안인사 드릴 것만을 명령받았을 뿐이며, 청혼 같은 일에 대해서는 신이 아는 바가 없습니다.”라고 하였으나, 회왕이 억지로 가서 자기 딸을 보게 하였다.』 (《고려사》 1369년 9월 8일)


그러나 이러한 원의 뒤늦은 구애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냉정하게 명을 파트너로 선택했다.

『서원군 노은이 원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황주에 이르자, 왕이 대장군 송광미를 보내어 그를 죽였다.』 (《고려사》 1369년 11월)


고려의 결단은 단순히 관계 단절에 그치지 않고, 요동을 향한 실제 군사 행동으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1차 요동 원정이다.

『가을 이후 동북면과 서북면의 요해처에 만호와 천호를 많이 배치하였으며, 원수(元帥)를 보내어 장차 동녕부(東寧府)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북원과 단절하려고 하였다.』 (《고려사》 1369년 11월)

『수문하시중 이인임을 서북면도통사로 삼고, 큰 둑기(纛旗)를 하사하여 〈서북면으로〉 보내었다. 왕이 일찍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커다란 둑기를 제작하여 관리를 두어 지키게 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인임에게 주어 출진하게 하였다.』 (《고려사》 1369년 11월)


이때 이성계는 동북면원수로 임명되어 1차 요동 원정에 참전했다.

『우리 태조를 동북면원수 지문하성사로, 지용수를 서북면원수 겸 평양윤으로 삼았다.』 (《고려사》 1369년 11월)

『우리 태조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0,000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사》 1370년 1월 4일)


1370년 1월, 고려군은 우라산성(亏羅山城)을 포함한 여러 성을 함락시켰다.

『당시 동녕부의 동지(同知)인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 이오로테무르)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으로 이동해 주둔하여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항거하려고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하였으나, 조금 뒤에 무기를 버리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저의 선조는 본래 고려 사람이니, 〈고려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고 300여 호를 거느리고 투항하였다...

그 우두머리인 고안위(高安慰)가 휘하의 군대를 거느리고 농성하며 항거하였으므로 우리 군대가 이를 포위하였다. 태조가 마침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종자(從者)의 활을 취하여 편전을 사용하여 쏘니, 무릇 70여 발이 모두 적들의 얼굴에 명중하였다. 성 안의 기세가 꺾이자 고안위가 처자식을 버리고 밤에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가 도망갔다.

다음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무리를 이끌고 나와서 항복하니, 여러 성들이 소문을 듣고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모두 10,000여 호를 얻게 되었다. 노획한 소 2,000여 마리와 말 수백 필을 모두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으며, 귀순하는 자들로 저자거리와 같게 되었다.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 (《고려사》 1370년 1월)


고려군이 몇 개월 후 요동을 다시 공격하기 때문에, 둘을 구분하기 위해 1370년 1월의 전투를 '1차 요동 원정 Part 1'로 부르도록 하겠다.

기록만 놓고 보면 1차 요동 원정 Part 1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무려 주민 1만여 호를 얻었고, 압록강 이북의 넓은 지역에서 원의 세력을 몰아냈다.


그런데 이 화려한 전공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태조가 원의 추밀부사 배주(拜住, 바이주) 및 오로첩목아·이백연·이장수·이천우·현다사·김아로정 등 300여 호를 데리고 와서 바쳤다.』 (《고려사》 1370년 2월 19일)

이성계가 전리품으로 바친 인원은 우라산성을 공격하기 전, 오로첩목아가 항복하면서 데려온 300여 호가 사실상 다였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성계와 함께 원정에 참전했던 양백연의 전리품 목록을 살펴보자.

『양백연도 동녕부의 두목 5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고려사》 1370년 2월 23일)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 기록을 통해 우라산성 함락 당시 "무리를 이끌고 항복했다"는 동녕부 20여 두목들의 실제 항복 대상은 이성계가 아니라 양백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목을 무려 50여 명을 데리고 왔다는 걸 보면, 이때 고려군이 얻은 주민 만여 호의 실질적인 성과 대부분이 양백연의 손에서 이루어졌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고려사》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론해 보면 1차 요동 원정 Part 1의 '수훈갑'은 이성계가 아닌 양백연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성계가 양백연과 전공을 다투기 싫어 양보한 것이라고 반론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사》 양백연 열전에서는 그의 성품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양백연은 성품이 약삭빠르고 용모를 꾸미기를 좋아하며 재물을 탐하고 여색을 좋아하였다.』 (《고려사》 양백연 열전)


그러나 이성계가 전리품으로 바친 인원이 고작 300여 호였다는 사실은 명확한 증거다.

결국 결론은 둘 중 하나다.

동녕부 50여 명의 두목들이 처음부터 양백연에게 항복했거나, 아니면 양백연과 이성계가의 연합 작전 중에 항복했으나 서북면부원수 양백연의 원정군 내부 서열이 동북면원수 이성계보다 높았기 때문에 그의 성과로 기록되었던 것이거나.


그렇다면 왜 《고려사》에서는 양백연의 활약상을 지워버렸을까?

이는 조선 건국 이후 시행된 서사 재편의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를 ‘스페셜 원’으로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그의 전공은 최대한 부풀려지고 동시대 다른 장수들의 공적은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성계가 홍건적 지도부 사유와 관선생을 베고, 수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온 나하추를 격파했다는 서사들이 형성된 과정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특히 양백연의 기록이 말살된 데에는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 때 여러 번 관직을 옮겨 판각문사가 되었다. 〈이 때〉 판밀직 신귀의 처 강씨(康氏)를 간음하였는데 강씨는 찬성 강윤성의 딸이었다.』 (《고려사》 양백연 열전)

여기에 등장하는 강윤성이 누구인지 아는가?

그는 바로 이성계의 경처(京妻)이자 훗날 신덕왕후가 되는 강씨의 아버지다.


신덕왕후 강씨가 1356년생임을 감안하면 양백연이 건드린 여인은 그녀의 언니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양백연이 신덕왕후 강씨 집안과 악연이었다는 건 거의 확실하다.

당연히 《고려사》에서 그에 대해 좋게 써줄 리가 없다.


고려군이 돌아간 후, 나하추는 사신을 보내왔다.

『납합출이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치고 관직을 내려주기를 요청하였으며, 또한 황금 8량으로 부인(婦人)이 쓰는 허리띠를 구하였다. 〈납합출에게〉 삼중대광 사도의 관직을 주고 고운 삼베 2필과 부인용 금 허리띠 1개를 하사하였으며, 금은 돌려주었다.』 (《고려사》 1370년 2월 23일)

이때 나하추가 고려의 관직을 요청한 걸 두고 정말 귀부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난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후술하겠다.


같은 해 5월, 주원장은 공민왕을 고려 국왕으로 공식 책봉했다.

이로써 고려는 원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명의 손을 잡게 되었다.

『황제가 상보사승 설사를 파견하여 왕명을 내리니, 왕이 백관을 인솔하고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조서에 이르기를,

“그대 고려국왕 왕전은 대대로 조선을 지켜왔으며, 선왕을 이은 좋은 후계자로서 정성을 다해 중국을 따름으로써 동쪽 지역의 이름난 울타리가 되었다. 사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일찍이 사신을 보내 알리자 즉시 표문과 공물을 바쳐 충성스러움을 두루 알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평소 문풍(文風)을 익혀 신하로서의 직무를 부지런히 수행하여 온 결과일 것이다. 참으로 마땅히 가상하다고 할 만 하므로 이로써 포상해야 할 것이기에, 지금 사신을 파견하면서 도장을 가지고 가게 하여 그대를 고려왕(高麗王)으로 그대로 책봉한다."』 (《고려사》 1370년 5월 26일)


비슷한 시기, 주원장은 나하추에게도 서한을 보내 투항을 종용했다.

『황상이 사자를 파견하여 다시 서한을 가지고 납합출을 효유하여 이르기를, “짐이 듣건대 너는 그 무리를 총령하면서 거듭되는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고 하기에 특별히 사자에게 명하여 짐의 뜻을 알리게 하였더니, 사신이 돌아와보니 대략 그 요령을 이루지 못한 것 같았다. 어찌 요해(遼海)가 멀다 하여 우리 군사가 이르지 못하겠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모의가 정해지지 않은 까닭에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겠는가...

어찌 짐만이 요동을 위해서는 고인이 마음썼던 것을 하지 못하겠는가. 이에 사람을 보내 다시 가게 하니, 따를 것인지 거스를 것인지 이쪽 저쪽을 명백하게 고하라. 철인(哲人)들이 예견하시었으니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태조고황제실록》 1370년 5월 29일)


이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공민왕은 다시 한번 요동 공격을 명했다.

『우리 태조 및 서북면상원수 지용수와 부원수 양백연 등에게 명령하여, 동녕부를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고려사》 1370년 8월 13일)


나는 이 1차 요동 원정 Part 2가 공민왕의 섣부른 오판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큰 성과를 거두었고 나하추마저 굽히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이런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어? 이거 해볼 만하겠는데? 나하추가 명에 항복하기라도 하는 날엔, 요동이 통째로 명에게 넘어가게 된다. 서둘러야겠군.'


그러나 1차 요동 원정 Part 1을 냉정히 바라보면, 이때 고려군이 상대한 원군은 사실상 '변방의 이름 없는 장수들' 뿐이었다.

《고려사》의 '동쪽으로는 황성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이 텅 비게 되었다'는 기록이 말해주듯, 이때 고려군은 나하추·고가노 등 요동의 '네임드' 장수들의 근거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심하게 표현하자면, '국경수비대'에게 이긴 걸 가지고 오판해서 '요동 본진'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이렇게 1차 요동 원정 Part 2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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