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의 전설, 그레이스 켈리의 삶과 그녀가 남긴 발자취를 뒤돌아보자
영화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를 보신분이 있으신가요? 영화속에서 그레이스 켈리로 분한 배우 니콜키드먼은 이런 대사를 합니다.
"언제나 주인공으로 살아"
영화 속 그녀의 대사처럼 배우로도 왕비로서도, 그리고 사후 지금까지도 금세기 최고의 미녀로 손꼽히는 최고의 패션 아이콘 그레이스 켈리, 영원불멸한 스타이자 스타일아이콘인 그녀의 삶과 패션을 따라가보는 기회를 마련해봤습니다.
히치콕의 금발, 그레이스 켈리
스릴러 영화의 거장이며 그레이스 켈리의 대표작들을 연출했던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은 그레이스 켈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녀는 분명 눈덮인 산 만큼이나 차가운 존재였지만, 그 산은 화산이었다." 차가우리만치 청순하고 품위있는 대중적 이미지를 유지하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항상 화려한 스캔들을 몰고 다닌 그녀에 대해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눈덮인 화산"이란 표현은 매우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헐리우드의 영원한 전설로 남게 된데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3편 덕이 큽니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이탈리아로 떠나버리자 새로운 여배우를 물색해야 했던 당시 히치콕이 1954년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 켈리를 선택했고 이후 그녀는 히치콕의 대표작 2편인 <이창> <나는 결백하다>에 연이어 히로인으로 등장하며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여배우가 됩니다.
히치콕 감독은 결혼후 헐리우드를 떠난 켈리에게 딱 한번, 영화 제안을 한적 있는데요. 1962년 그는 영화 <마니>출연을 제안합니다. 실제로 켈리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배우로 복귀하려 했으나 켈리가 맡으려고 한 배역 "마니"가 도벽이 있는 캐릭터였으며 한 회사에서 돈을 훔친 다음 신분을 바꿔 다른 회사로 옮겨다니는 여자였다는것이 알려지자 품위 문제로 모나코 언론과 국민들이 반대해 결국 무산되었습니다. 결국 마니 역은 티피 헤드런에게 돌아갔으며 이 헤프닝은 결혼과 연이은 출산으로 피로도가 쌓인 왕국 생활에 피로도가 쌓인 켈리에게 큰 상실감을 줬을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레이스 켈리와 에르메스
에르메스는 1922년 최초의 가죽 핸드백을 출시한 이래 전 세계 여성들이 꿈꾸는 핸드백을 여럿 탄생시켰는데요. 1935년 선보인 여성용 가죽백은 모나코의 왕비가 된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1956년 미국잡지 <라이프> 표지에 임신한 배를 가리기 위해 들고 나온 모습이 실린 이후, 1977년 일명 "켈리백"으로 불리게 되며 현재에도 최고의 인기를 얻는 명품가방이 되었습니다.
에르메스가 그레이스 켈리를 기리는 한정판 켈리백을 선보일 정도로 켈리는 에르메스의 대표 뮤즈였는데요. 그레이스 켈리는 1954년 영화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서 에르메스 백이 켈리의 옷장으로 사용되며 에르메스 가방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에르메스로 이끈건 당시 파라마운트 영화사의 수석 의상 디자이너이자 영화 <갈채>의 의상을 담당했던 에디스 헤드였는데요. 에디스 헤드가 <갈채>의 의상을 준비하는 동안 그레이스 켈리는 히치콕 감독의 <나는 결백하다>를 촬영중이었고, 히치콕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녀가 맡은 배역인 석유 재벌 상속녀가 프랑스 남부의 고급 휴양지 칸에 묵는 장면을 위해 파리 생토노르 거리에 위치한 에르메스 부티크에서 필요한 액세서리를 제작하라고 헤드에게 지시했습니다. 에르메스 부티크에 간 켈리와 헤드는 넋을 잃고 말았는데요. "마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맛보고 싶어 하는 소녀처럼, 부티크 안의 모든 아이템과 사랑에 빠졌다"고 에디슨 헤드는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에르메스의 가죽 가방과 장갑, 핸드백, 실크 프린트 스카프, 럭셔리한 도자기 장신구들의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그날부터 모나코 공국의 왕비가 되어서까지 평생 에르메스 제품을 애용하는 단골 고객이 되었습니다.
모나코 왕자 레니에 3세와의 세기의 결혼식
1956년 4월 12일. 그레이스 켈리와 모나코 왕자 레니에 3세의 세기의 결혼식이 열렸습니다. 식은 모나코 대성당에서 6백명의 하객과 3천만명의 TV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톨릭 미사로 치뤄졌는데요. 높은 칼라와 긴 레이스 소매로 많은 이들에게 "왕실 드레스"라는 강한 인상을 남긴 그녀의 웨딩드레스는 MGM 스튜디오의 영화 의상 디자이너 헬렌 로즈와 36명의 재봉사가 6주 동안 투입되어 만든 화려한 드레스였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당시 켈리는 MGM과의 계약 기간 만료 전이었고 결혼으로 은퇴를 선언하게 된 그레이스 켈리에게 MGM은 계약위반을 무마하는 조건으로 웨딩드레스의 디자인을 MGM의 코스튬 디자이너였던 로즈에게 맡겨줄 것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합니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만남은 칸트 영화제에서 시작되었는데요. 모나코 대공이었던 그의 초청을 받아 칸트 영화제에 방문하게 된 켈리에게 첫눈에 반한 왕자는 만난 지 3일만에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두번밖에 만난적이 없는 사람의 프로포즈에 적잖이 당황했고, 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낯선 모나코에서 살아야 한단 사실, 당시 최고의 여배우로 잘 나가고 있던 상황에서 많은걸 포기해야하는 상황에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6년 켈리는 모나코의 왕비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레니에 3세의 프로포즈에서 청혼 선물로 받은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는, 켈리가 결혼 직전에 출연한 마지막 영화 <상류사회>에 착용하고 출연하기도 합니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의 군주 레니에 3세와 결혼해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날. 켈리를 태운 전용함이 미국을출발해 모나코 항에 도착했을때 바다에서는 모든 배들이 운항을 멈춘채 축포를 쏘고 뱃고동을 울렸고, 작은 도시국가 모나코는 국민들은 물론, 각국 취재진들, 축하객들이 모여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결혼식이 진행된 일주일 동안 도시 곳곳에서 축제가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왕실 법도에 따라 첫날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그 유명한 모나코 대성당 결혼식을 진행했는데요. 이날 참석한 3천명이 넘는 하객들이 모나코에서 쓰고 간 돈이 모나코 전체 국간 예산의 절반정도라고 하니 결혼식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부가 된 두 사람은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이동해 호화 요트로 지중해를 항해하며 7주간의 신혼여행을 떠난것으로 켈리는 그레이스 공비가 되어 모나코를 대표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모나코의 주요 수출상품이었으며 그녀의 존재로 인해 모나코는 널리 알려졌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로열 웨딩 후 미국인들의 모나코 여행이 몇배나 증가했다고 전해지며, 모나코 앞 지중해를 배경으로 007시리즈를 비롯한 여러 편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으니, 모나코가 관광대국이 된 데는 켈리가 지대한 역할을 한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