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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Dec 28. 2022

노교수님의 편지

옛 은사님을 추억하며


몇 달 전 일본에서 둘째 형님이 오셨다. 둘째 형님은 내가 일본에 있을 때 같은 교회에서 일본어 통역을 알려주셨는데, 그 일을 계기로 어찌어찌 동생을 나에게 소개해 주셨고, 지금은 형님과 올케 사이가 되었다. 일본사람보다도 더 고급 일본어를 구사하시는 형님은 일본에서 20년 넘게 거주 중이시며, 대학에서 심리학과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형님이 일본에서 오신 건 3년 만이었다. 코로나는 그렇게 서로를 단절시켰던 것이다.


형님은 항상 일본에서 오시면 일본식 가정 간편식을 해 주신다.

이번에는 오코노미야끼를 선보여 주셨다.

다른 가족들은 부침개 같은 게 뭐 특별할 게 있냐며 시큰둥했다.

하지만, 나에게 오꼬노미야끼는 특별한 추억이 담겨있다.



내가 무사시노미술대학 재학 중이었을 때, 나의 지도교수님은 매년 겨울에 지도교수실에서 오꼬노미야키 파티를 여셨다.

오사카 출신이셨던 교수님께서는 ‘동경음식은 정말 맛이 없어’라고 하시며, 손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레시피로 오코노미야끼를 만드셨다.

교수님 레시피의 특별한 점은 오코노미야기 반죽에 마를 갈아 넣는다는 것이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폭신폭신 촉촉한 오꼬노미야끼를 만들기 위한 비법이라고 하셨다.

아무튼 교수님의 지도를 받는 15명 남짓의 학생들이 모여서 교수님의 오꼬노미야끼를 먹었다. 오꼬노미야끼를 구우면서 해맑게 웃고 계셨던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교수님의 인자함은 얼굴에도 잘 드러났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교수님의 제자들 역시 하나같이 유하고 부드러운 아이들이었다.


교수님의 훌륭한 인품은 내가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면서 더욱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물론 모든 한국의 교수님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일부 교수님에게서 ‘허세’를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은 교수님 업적의 도구같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리고 교수님은 정말 연구를 하시는 건가 싶을 정도로 본인이 알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만 강요하셨다. 논문 심사를 받기까지 연구 본연의 문제보다, 그 외적 것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할 것이 많았다. 간혹 학교 공금임이 분명한데, 자기 돈이 아니니 막 써도 된다는 인상을 받게 하는 교수님도 계셨다.


그에 반해 나의 옛 은사님은 늘 한결같이 연구자이자 교육자셨다.

우리 교수실에는 말도 안 되는 논문주제를 갖고 오는 친구들도 있었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였으면 교수님께서 들어보지도 않고 반려하셨을 만한 주제인데,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면서 ‘정말 재미있는 생각인 것 같다’ 고 하셨다. 그리고 최대한 알고 계신 부분에서 다양한 서적을 권해 주시면서 논문의 방향을 지도해 주셨다.

‘아마도 이쪽 부분에서는 이런 내용으로 자료를 찾아보면 정말 재미있는 논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쓴 논문은 학과상으로 연결되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차이’라는 주제였는데, 한국에서였으면 교수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주제를, 좋은 논문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것이다.

졸업 이후 서울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을 때, 몇 번 교수님과 교류사업을 하였는데, 그때마다 실수투성이였던 나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해 주셨던 교수님이다.

아침을 편의점 주먹밥으로 때우시면서 학교 공금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고 하시던 은사님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형님이 해 주신 오꼬노미야키를 먹으며 옛 은사님에 대한 추억을 나누었다. 일본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계신 우리 형님은 학생들이 그런 추억을 마음에 갖고 있는 것이 선생에게는 정말 큰 힘이 된다며 은사님께 편지를 써 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늘 감사한 마음뿐인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몇 년 전 교수님께 은퇴선물을 보냈을 때 갖고 있던 교수님의 주소가 있었다.

교수님께 감사한 마음을 한 자 한 자 글자로 적어보았다. 무엇을 같이 보내면 좋을까 고민하다 한과를 한 세트 포장을 했다. 형님과 오꼬노미야끼를 먹으면서 나누었던 교수님과의 추억,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적었다. 연로하신 교수님께서 코로나 이후 혹시라도 건강님 문제가 생기셨으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했다. 분명 답장을 주실 분이신데, 혹시 답장이 안 오면 무슨 일이 생기신 걸까라는 걱정도 들었다.

다행히 며칠 뒤 무사히 도착했다는 ems 알림 문자가 도착했고, 작은 선물을 받고 기뻐하실 교수님을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들떴다.


크리스마스이브날. 일본에서 ems가 도착했다. 교수님께서는 직접 집필하신 책과 손 편지, 그리고 직접 작업하신 콜라주를 담은 엽서와 카드를 보내주셨다.

산타클로스에게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교수님께서 쓰신 손 편지를 읽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 일본행과, 그곳에서 있었던 4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오영주 님(일본사람들은 학생에게도 존대를 깎듯이 한다.)

나는 무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이번에 맛있는 한과를 보내주어 고맙습니다.

한국에서 우편물이 왔고, 오영주 씨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놀랐습니다. 얼른 받아 열어보니 정성스러운 한과와 편지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한국의 과자를 먹으면서 맛을 즐겼습니다.

대학시절의 오영주 씨를 지도했던 기억, 서울에서 만나 신세 졌던 기억들, 그리운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코로나 시기 3년간 이곳에서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예정되었던 일들이 많이 바뀌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마음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시간을 갖고 웹사이트도 정비하고, 그림을 그리거나 콜라주를 제작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웹사이트와, 그림 모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보다는 나 자신을 정리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코로나시기에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고 다시 바라보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코로나는 오영주 씨에게도 전환점이 된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는 것은 멋진 일입니다. 성과에 연연하기보다는, 아이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내재된 힘을 끌어올려 주세요.

아이들 한 명 한 명 진심으로 대하는 그곳에 반드시 새로운 시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오영주 씨의 미래에도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건강 조심히 잘 지내십시오.

가족들의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2022.12.13

이마이 요시로우


교수님이 코로나 기간 동안 만드신 웹사이트를 들어가 보니, 교수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신 업적들과 집필하신 책들, 작업하신 그림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교수님께서 간간히 쓰신 에세이도 읽어볼 수 있었다. 내가 대학에 있었을 때 참여했던 전시들도 보였다.

교수님께서도 은퇴 후에 남겨진 시간들을 값지게 보내시려고 애쓰고 계신 듯했다. 예전에도 그러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이야기를 제자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시는 모습은 한국의 대학원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존경심을 갖게 한다.


다가올 새해, 방문선생님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소박한 인생이지만, 은사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한 아이 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해야 하겠다.


“성과에 연연하기 보다는, 아이들 개개인이 갖고 있는 내재된 힘을 끌어올려 주세요. 아이들 한 명 한 명 진심으로 대하는 그곳에 반드시 새로운 시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일은 오영주 씨의 미래에도 연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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