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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Feb 22. 2023

모성애 판타지에 기댈 수 없는 시대

왜 엄마가 애를 버려?

올해 초등학교 4학년인 우리 딸은 드라마 광이다. 유치원 생 때부터 할머니가 보는 드라마를 옆에서 같이 보고, 등장인물 이름, 인물구도, 전체 스토리에, 나오는 배경, 게다가 PPL까지 완벽하게 파악하고 외워버리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내가 모르는 드라마까지 유튜브 편집 영상들을 보며 다 꿰뚫고 있다. 

최근 우리 딸과 같이 '일타스캔들'을 보게 되었는데 우리 딸이 보다가 한마디 했다. 

"엄마, 아니 왜 드라마에서 다 엄마가 애를 버려?"


그런가? 

생각해 보니, 요즘 드라마들은 정말 엄마가 애를 버리는 경우가 많다.

"전에 '신사와 아가씨'도 그랬고, '우영우'도 그렇고 '일타스캔들'도 그렇잖아"

우리 딸이 최근 본 드라마에서만도 세 개가 엄마가 아이를 버리고 떠난 설정이다. 생각해 보니 최근 드라마들은 엄마가 애를 버리는 설정이나, 미혼부 설정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또 다른 미혼부 설정의 드라마로 배우 정해인이 미혼부 역을 맡았다.

그렇다면 2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간 시점의 드라마는 어떨까? 

여러분은 혹시 '청춘의 덫'이라는 드라마를 기억하시는지...... 사랑의 배신과 응징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다루는 원조 히트작 제조기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로, 국민 청순녀 심은하, 배신의 아이콘 이종원이 열연한 1999년 드라마이다. 이 극에서 주인공 윤희(심은하역)는 동우(이종원역)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키우는 미혼모로 분한다. 딸 혜림이 죽자 동우에게 복수할 결심을 하며 내뱉은 대사 "당신 부숴버릴 거야!"는 두고두고 기억될 명대사이다. 

심은하의 명대사 '당신 부숴버릴거야!'

그 당시의 드라마들은 그랬다. 그보다 조금 전에 방영해 인기를 끌었었던 '젊은이의 양지'도 비슷하게 사랑, 배신, 미혼모 설정이었는데, 여자 혼자 애도 잘 키워내고, 꿋꿋이 생활도 잘해 나가고, 경제력 있는 남자를 잘 만나 행복해지는 설정이 그때 유행하던 패턴이었다. 

이종원 배우가 그렇게 배신하고 떠나는 악역을 맡더니, 20년 후에 '신사와 아가씨'에서 아이와 함께 버림을 받은 미혼부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드라마의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지만 요는 지금 시대에서 얼마나 모성을 기대할 수 있고, 기대해도 되는지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모성'이라는 것은 인류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독일의 인문학자 엘리자베트 백 게른하임은 '모성애의 발명'에 서구에서 모성애가 탄생된 배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서구의 경우 19세기 부르주아의 탄생으로 남자들이 경제활동을 통해 집 밖으로 나가게 되면서 가사와 육아의 영역을 전담할 여성의 성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아동을 노동력으로 보기보다는 양육과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형성되면서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역할은 한층 더 견고해졌다. 시와 문학은 모성의 위대함을 찬미하기 시작한다. 

20세기에 이르러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남을 위한 희생의 인생이 아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의식이 생겨나게 되고, 모성에 반기를 든다. 이를 계기로 1960년대에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출생률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는데, 이 시기에 모성과 애착형성을 위한 심리학적, 교육학적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역설적으로 출산율이 모성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가치관에 배경을 두고 있는 한국의 모성애는 서구에서 주장하는 발명된 모성애 그 이상이다. 전통적으로 뿌리가 깊던 모성애에 대한 판타지는 급격한 근현대화를 겪으며 빠르게 해체되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아빠는 애를 버려도 엄마는 애를 버리지 않는다.'는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이야기가 당연시되었는데, 지금은 '엄마도 애를 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최근 들어 의도적으로 부성애의 판타지를 생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드라마에서 엄마가 버린 아이까지 키우는 부성애가 강한 아버지들이 있는데, 현실에도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모성애와 부성애', 어느 것이 더 위대한가를 떠나서, 인간에게 그렇게 '자신이 아닌 존재를 온 마음을 다해 나를 희생하며 사랑할 힘이 있던가?'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지... 최근 사회면의 기사를 보면 경악할 때가 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홀로 방치하고 쾌락을 좇아가다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사를 종종 본다. 이런 기사를 볼 때 어떻게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분노하다가, 한 편으로는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일말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 인간은 그토록 원래 이기적인 존재이다. 아동학대의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부모들이 분노하지만, 가끔은 그들에게 묻고 싶을 때도 있다. 

'당신들은 당신의 아이의 행동에 화가 나 본 적이 없는가?'


나는 있다. 아주 많다. 밖에서는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할 수 있지만, 나의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는 훈육의 목적을 넘어서 내가 화가 나서 화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이들에게 윽박지르고, 짜증을 표출해 놓고 나는 아동학대와 영 무관한 척 하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아닐지 조심스레 솔직해져 본다. 

결국 인간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아이를 위해 희생할 정도로 선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가 인류의 존속을 위해  발명된 사상임에 동의한다. 그것이 한국의 현대사회에 이르러서는 성역할의 평등이 강조되면서 '부성애'에로 확대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모성애의 판타지에 기댈 수 있던 시대'가 그립다. 육아를 의무로 인식한다면 '왜 엄마만 육아를 전담해야 하는가?'라고 분노할 수 있다. 육아는 괴롭고 희생이 따르는 노동이다. 의무라고 인식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권리라고 인식해보자. '엄마도 육아를 전담할 수 있다.'라고 말이다. 대부분의 형태의 노동이 그렇듯 우리는 노동을 통해 생산을 하고 산물을 얻는다. 농사를 지으면 농산물을, 공장을 돌리면 공산품을, 회사에서 일을 하면 월급과 같은 물질로 보상을 받기도 하고, 보람, 성취감 등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보상도 얻는다. 육아도 마찬가지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하고 나면 보상도 있다. 비록 돈이나, 물질로 보상을 받기는 어려우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라는 무형적 가치가 분명히 있다. 


많은 여성들이 육아를 전담하면서 억울해한다. 나 역시 그랬다. 어린아이들을 키우느라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 같았다. 아이를 위해 나를 버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은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아이를 돌보면서 어떤 존재를 소중히 다루는 것을 배웠고, 더욱 단단한 마음을 얻을 수 있었고,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아이들을 끌고 열심히 다니던 공원에서의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사진으로 보물이 되어 남겨졌다. 지금 아이들의 자는 모습을 보면 그때 잠투정을 부리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며 아이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각별해진다. 아이와 함께 했던 절대적인 시간이 충분하였기에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부성애 판타지'를 시도하려는 최근 드라마의 경향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이를 버리고 떠나는 엄마, 애써 '모성애 판타지'를 지우려는 시도는 다소 우려스럽다. 나는 더 이상 이 시대의 여성들이 '모성애 판타지'에 대해 분노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물론 성역할의 불평등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비단 여성들에게만 모성애를 강조하는 것도 불합리하다는 것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초월하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 여성들의 특권이고, 그것을 '모성애'라고 칭한다고 한다면 듣기 괜찮은 찬사이지 않은가...... 이기적인 인류는 그 '사랑'으로 존속해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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