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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Mar 16. 2023

가짜 창의력을 강요받는 아이들

방문미술 선생님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한 지 어느덧 일 년을 바라본다. 일본에서 배웠던 다양한 아트워크숍, 미술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했던 경력, 서울문화재단에서 다양한 예술교육을 접하고 기획했던 경력, 아이들에게 창의적인 미술교육을 선보이겠다고 자신 있게 시작한 일이다. 그러나 어느덧 무엇이 '창의적인 미술교육'인지 그 갈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어른의 눈으로 보는 창의적인 작품이 나오는 것이 진짜 아이들을 위한 창의력일까?


소위 MZ세대 엄마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녀들은 이전의 엄마 세대들이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보다는 확실히 열려있다. 영어교육만, 지능교육만 주입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많은 MZ 엄마들은 알고 있고, 이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들을 다양하게 해 주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 음악, 체육과 같은 예체능 과목에 대한 수요가 줄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수업하고 있는 아이들의 어머님들도 사고가 굉장히 열려있다. 최대한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수업의 목적과 다소 벗어난 수업을 하더라도 어머님들은 흔쾌히 이해해 주신다. 비록 작품이 원하는 대로 완성도 있게 나오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 더없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신다. 어머님들의 이런 열린 교육관은 나에게 큰 힘이 된다.

하지만, 가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떤 아이들은 너무 바쁘다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이미 영유아기 때부터 창의력과 사고력을 키우기 위한 무수한 경험들과 활동들에 익숙해져 있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엄마들은 예체능은 공부가 아니라 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선생님과 한 시간 동안 정해진 주제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놀이가 아니라 학습이다. 놀이라는 형태만 빌려왔을 뿐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업의 형태가 되면 아이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긴장되고, 힘겹게 에너지를 짜 내야 하는 시간이다. 


아이들은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이 익숙하다. 첫 만남에서 많은 아이들은 '자네는 오늘은 어떤 것으로 나를 자극시켜 줄텐가, 어디 한 번 해보시게'의 자세로 선생님을 맞이한다. 아이들은 눈치 빠르게 선생님의 성향을 파악한다. 이 선생님이 엄격한 선생님인지, 다정한 선생님인지 단번에 파악하고 누울 자리인지 아닌지 결정한다. 아이들에게 나는 누울 자리인 것 같다. 나는 미술선생님 파견업체와 계약을 맺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업자료와 수업교안을 본사에서 지시한 대로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미 영유아기 때부터 너무 많은 자극을 받아 온 아이들에게 그러한 목적 지향적 프로그램은 뻔하기 그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종종 원칙에 벗어나 활동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근래에 유행하는 퍼포먼스미술이 거기서 거기이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이미 목적지를 아이들과 함께 향해 가기에는 물 건너갔다. 아이들은 그저 쉬고 싶고 놀고 싶다. 나에게 있어서 미술교육의 원칙도 그렇다. 이 시간만큼은 아이들이 숨을 쉬게 해 주자. 아이들이 원하는 생각,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최대한 자율성을 존중해 주자. 이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아이들이 너무 잘 아는지, 아이들은 정말로 원하는 대로 한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놀기만을 바랐다.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가고 싶은데 여지없이 삼천포로 빠지게 되거나, 완성도를 버린 작품들을 만나게 될 때, 조금씩 현타가 오기도 한다. 내가 바라는 어린이의 상상력, 내가 기대하는 완성도 있는 창작물에 미치지 못하게 될 때면 어머님들께 조금씩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차라리 표현력을 중시하는 고전적 미술교육에 방향을 두는 것이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본다. 그러면서 문득 어른들이 기대하는 아이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결국 진짜 아이들 것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나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창의력'이라고 이름 붙여진 수많은 영유아 사교육 마케팅은 아이들에게 '가짜 창의력'을 강요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쉴 틈이 없다. 너무 바쁘다. 이미 돌 때부터 각종 문화센터에 끌려다니고, 유아기 때부터 영어, 수학, 가베, 한글, 독서, 미술, 음악, 체육 시간 시간마다 선생님들을 만나 선생님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이끌려 가는 것에 지쳐있다. 나는 요즘 유행하는 '융합교육'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하는 모든 것이 이미 융합적 사고이다. 꼭 코딩을 하면서 미술을 하는 것 만이 융합교육이 아닌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멍 때리고 누워서 뇌를 쉬게 해 줄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의외로 우리가 기대하는 것만큼 창의적인 답변을 내지 않을 때가 있다. 의외로 자신이 보고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나, 자신이 좋아하는 색, 기호 등을 별생각 없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할 때도 있다. 그것을 우리가 기대하는 창의력과 다르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만약 실망하고 아이들에게 무언가 대단한 대답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창의력을 학습시키는 일이고, 결국 아이들은 '가짜 창의력'만 강요받게 된다. 이러한 '가짜 창의력'은 오히려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꺾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고 싶은 대로 응석 부리는 것이 창의력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때로는 아이들을 하고 싶은 대로 응석부리게 두기도 한다. 아이들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숨을 쉴 수 있기를. 행복할 수 있기를, 즐거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나는 아직 새내기 방문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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