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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Aug 03. 2023

7월의 어느 멋진 날이지만……

왜 여기서 사춘기를 맞이하는 거냐!

7월 28일(목)


큰 아이의 기침이 여전하지만, 어제 사 온 기침시럽으로 더 심해지지는 않고 있다. 다행이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그저 집에서 쉬고만 싶다. 이제 또 곧 있으면 주말이 다가올 텐데…..

집에서 이것저것 정리를 마치고 한숨 돌리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남편으로부터 페이스톡 알림이 떴다. 남편과 그 간 있었던 일을 페이스톡으로 이야기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한국에 함께 있을 때나 크게 다를 것이 없게 느껴진다. 나는 아이를 보낸 동안, 남편 퇴근 후 적당히 시간도 맞는다. 남편 얼굴 뒤로 너저분한 한국집의 살림이 보인다. 그래, 지금의 이 공간, 이 시간, 이 여유를 누리자!

아마도 한국에 돌아가면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며 아이들 밥 차리고, 청소하고, 동네를 걷던 이 여유로운 삶이 그리워지겠지……

이곳의 풍경 속에서 쉬는 숨도 아끼지 말자.

그렇게 다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창문에서부터 햇빛이 내리기 시작했다. 걸핏하면 비가 오고, 흐린 날씨 속에서 너무나 반가운 햇빛이었다. 쨍한 햇빛을 보며 후다닥 창문을 다 열었다.

창문 밖으로 아름드리 정원이 드러난다. 이렇게 좋은 정원이 있는데, 숙소가 3층이라는 이유로 좀처럼 내려가 앉아보지 않았다.

이렇게 눈부신 날 정원에 나가서 햇빛을 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히 커피 한잔을 내려 1층 정원으로 향했다.

1층 정원에 집주인이 마련해 둔 천막을 조금 쳐 보았다. 의자에 앉아 살랑 살랑 부는 바람을 느낀다. 7월 말, 한국 같았으면 복더위에 지쳐 쓰러져 있을 텐데, 이렇게 햇살을 느끼며 가을바람을 느끼고 있노라면 바람 한 점도 놓치고 싶지 않다.

아랫집 할머니도 반짝이는 햇빛이 아쉬운지 이미 이불이며, 옷이며 빨랫줄에 널어놓았다. 한국에서는 10월이나 되어야 맞이할 수 있는 어느 멋진 날을 7월에 느끼고 있다니……

옆 집에서는 집수리가 한창이다. 내가 온 이후 매일 어떤 사람 한 명이 집에 올라가 페인트 칠이며 이일 저일 하고 있는데, 한 일 년은 걸릴 것 같다. 한국에서는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집수리 아저씨가 틀어놓은 라디오 소음이 저 멀리서 울려 퍼진다. 듣기에 썩 나쁘지 않다. 살랑바람 사이로 간간이 들리는 시골 영국의 지방 라디오 방송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시계를 보니 슬슬 아이들을 맞이할 준비를 할 시간이다.


아이들도 점점 이 캠프가 익숙한 것 같다. 새로운 아이들도 점점 늘다 보니, 어느덧 이 캠프에서 제일 선배가 되어 있었다. 새로 오는 아이들에게 시설 소개도 하고, 프로그램 안내도 하는 정도가 되었다.

큰아이는 지난주 선보인 태권도 시범으로 스페인 친구들이 늘어났는데, 그 친구들이 내일이면 캠프가 끝난다고 한다. 못내 아쉬운 것 같았다.

둘째 아이는 단짝인 한국아이 외에도 다른 아이들도 같이 친해졌다고 했다. 나보다도 훨씬 사교성이 좋은 둘째는 친구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걱정할 것이 크게 없다.


그런데, 큰 아이가 아픈 것이 조금 나아진 것인지, 오늘 기분이 별로인 일이 있었는지, 사사건건 내 이야기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토를 달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큰 아이의 컨디션에 눈치를 봐가며 지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내가 하는 이야기가 논점이 조금 흐리면 그걸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다. 물론 이건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우리 큰애의 성향이기도 하고, 어릴 적부터 논리적인 사고만을 지향하는 아이라 그 부분이 대화를 참 어렵게 한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아이는 서로 다른 화법 때문에 매번 오해하고 싸운다.

예를테면,  둘째 아이가 구름을 보고

 “와, 구름이 너무 예쁘다. 저 구름 위에서 뛰어놀면서, 구름 떼서 먹어보고 싶다. 엄청 폭신폭신하고 맛있겠지?”라고 한다면,

큰아이가

“야, 저거 그냥 수증기야. 구름 먹으면 물 먹는 거야. 그 위에서 뛸 수도 없어! “

이런 식이다.

어제도 큰애가 냉장고를 보더니 냉장고의 원리를 궁금해하면서 나에게 물어봤다.

“엄마, 냉장고의 원리가 열을 빼앗는 원리잖아, 그러면 오븐도 열을 주는 게 아니라, 바깥에 있는 열을 빼앗아서 그 열을 끌어들여서 작동하게 할 수 없을까? “

이 이야기를 들은 둘째는 이야기한다.

“엄마, 내 생각에는 냉장고는 펭귄들이 발명한 것 같아. 북극에서 놀다가 냉장고에서 주스도 꺼내 먹고, 아이스크림도 꺼내 먹고~”

그럼 또 첫째가 반박한다.

“야, 냉장고 온도가 이미 북극 온도보다 높은데, 뭐 하러 냉장고에 넣었다가 꺼내 마셔!”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한편으로는 이렇게 진지하게 논리적이기만 한 큰애가 친구하고 정상적인 대화가 될까 걱정이 되기까지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큰애랑 대화하는 것이 나는 너무 고통스럽다.

엄마가 좋아서, 엄마랑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 주제가 자기중심적이다. 수가 어떻고, 블랙홀이 어떻고, 시간여행이 어떻고…… 이러면 대단한 과학천재인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저 과학 유튜브 정도의 수준이고, 학교 성적과도 무관하다.


그런 큰애가 이곳에서 다양한 아이들과 대화하면서 성격을 극복해 보기를 바랐지만, 이렇게 단기간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아무튼, 그런 큰 아이가 이제 사춘기가 되어 가는 것 같다. 나와의 대화에서 어떻게 서든 자신이 논리적으로 맞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래서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엄마가 이렇게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그 이야기는 원래 이렇다는 거고, 그럼 엄마가 이렇다는 건데, 그럼 처음에 한 이야기랑 안 맞잖아.”

처음에는 이 이야기에 어떻게든 차분하게 대화해 보려고 한다. 그러면 점점 저 아이의 꼬임에 넘어가게 된다. 저 아이는 그렇게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더욱 장황한 논리로 나를 공격한다.

“아이고, 알았다. 네 말이 다 맞다. 이제 그만하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짜증을 낸다.

“엄마는 왜 항상 그런 식으로 내 얘기를 피해!”

으잉? 아니, 네가 다 맞다니까. 맞다는데 왜 또 뭐가 문제인 거냐고!!!

그래서 또 설명하고, 또 꼬리 물고 무한반복……


이 아이는 이 치열한 과정을 짜증 내면서도 끝내고 싶지 않아 보인다. 이 치열한 과정 자체를 즐기는 듯하다. 하지만 속에서 열불이 난다. 아…. 여기서 한국에 있을 때처럼 소리도 못 지르겠고… 한대 쥐어 박지도 못하겠고… 한동안 아파하던 큰 아이가 걱정스럽고 조심스러웠었는데, 며칠 아프면서 또 마음이 자란 것인지, 사춘기 초입에 들어온 듯하다. 아이의 성장과정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또 하나의 넘어야 할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를 돌이켜 보면, 나 역시도 가관이었다.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우리 큰애의 대부분은 또 나한테 온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나 또한 우리 부모님에게 늘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대들었다. 그러면 결국 아빠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면 내게 한마디 했다.

“하여간 우리 딸은 헛똑똑이야!”

아빠가 폐배를 인정하던 그 순간, 내가 오롯이 승리하지 못했다는 묘한 폐배감이 드는 그 단어! 바로 그 ‘헛똑똑’! 내가 지금 딱 우리 아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다. 그때는 그 헛똑똑이라는 말의 뉘앙스는 싫었지만, 내가 진짜 헛똑똑이라는 것은 인정하기 싫었다. 그런데, 살면서 그 ‘헛똑똑’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뼈저리게 느껴졌는지…… 한 살 한 살 먹어갈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헛똑똑이가 맞다는 것을…… 정작 내가 논리를 펼쳐서 내 주장을 펼쳐야 할 때에는 그러지 못했다. 인생에서 실패와 미완성이 한 획씩 덧칠해지면서 내가 얼마나 똑똑하지 못한 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 큰애를 보면 짠하다. 오히려 나 같은 실패를 겪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는 헛똑똑이 아니라 그냥 진짜 똑똑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엄마와 싸우지 말고, 저 밖에 있는 다른 사람과 논리적으로 싸워 이겼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떠나와 아이들과 오롯이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 더 내 아이를 자세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한국에서의 바쁜 생활 속에서는 매 시간마다의 스케줄에 따라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이들이 친구들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어떻게 대화하는지, 아이들의 건강상태와 체력은 어떤지, 아이들의 재능은 무엇인지 천천히 여유를 갖고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학교, 학원 선생님들이 듣기 좋게 포장한 말만 듣고 내 아이를 막연하게 알고 있었다. 오직 아이들과 나만 있는 이곳에서 아이들과 치열하게 대화하고, 놀고, 생활을 하다 보니 내 아이들이 온전히 보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엄마 역할에 더욱 진지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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