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언덕
8월 1일 (화)
어제 하루종일 비가 온 탓인지, 오늘은 날씨가 좋을 것 같은 기대를 갖고 아침을 맞이하였다. 기대대로 햇살이 반짝 창가로 스며들어온다. 이 기분을 그대로 어디론가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분명 내 기억 속의 첼튼햄은 넓게 펴려 진 언덕이 지천에 있었는데, 그때 그렇게 가깝다고 느껴졌던 언덕이 너무나 멀리 느껴진다.
아마도 그때에는 이모가 차로 이동을 해 주어서 근처에 쉽게 갈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차가 너무 아쉬우면서도 이모에게 다시 감사함이 몰려온다.
차를 한 대 빌려볼까 싶기는 한데, 왼쪽 오른쪽이 반대인 것도 신경 쓰이고, 혹시라도 사고 한번 나면 이 모든 일정이 망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다시 차 빌리는 생각은 접는다. 대신 첼튼햄 택시비가 그리 비싸지는 않으니, 여차하면 택시를 탈 생각을 해 본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조금 멀리 가 볼 생각이었다. 시내는 몇 번 가 보았으니, 저 언덕을 향해 정처 없이 걸어보기로 했다.
우선 구글지도를 보니 언덕 가까운 곳에 옛날에 이모가 살았던 동네 이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Charlton Kings!’ 그래! 내 기억에 그 동네 이름이 Charlton Kings였어!
그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사촌동생들이 다니던 도서관 이름도 분명 Charlton Kings Children’s library였다! 그래! 오늘은 Charlton Kings에 가보자! 그곳에 가면 분명 내 기억 속의 그 언덕이 펼쳐질 거야!
내가 거주하는 숙소에서 시내까지 걸어서 30분, 시내에서 또 Charlton Kings까지 걸어서 30분이다. 이번에는 작정하고 한번 시내 반대편까지 걸어서 가보기로 했다. 운동삼아 걸어도 좋고, 또 걸으면 차로 보지 못하는 풍경들도 볼 수 있으니까.
차로 다니면 볼 수 없는 풍경들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사진을 찍어본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이할 것이 없는 풍경이겠지만, 나는 이런 일상의 풍경조차 하나도 놓치고 싶지가 않다. 이 작은 타운에 어쩜 그렇게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지천에 있는지…… 벌써 영국살이 한 달이 다 되어가니 익숙해질 만도 하지만, 분명히 한국에 돌아가면 이 풍경을 그리워할 것이다. 오늘은 말 그대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작정해 보았다. 구글 지도만 보다 보면 놓치는 풍경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감각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목표는 저 멀리 보이는 언덕이다. Charlton Kings를 검색해 일단 방향을 잡았다. 방향을 잡았으니 이제부터 정처 없이 걷는 거다!
걷다 보니, Charlton Kings Park라고 쓰인 곳이 보인다. 예전에 내 기억 속의 동네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않았지만, 많이 가까이는 온 것 같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하게나마 이곳 코츠월드의 언덕의 정취가 느껴졌다. 그러나 아직 내 기억 속의 드넓은 들판은 아직 아니다. 공원을 지나고 보니, Public Footpath라고 쓰인 길이 보인다. 이제부터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변이 아니라, 오솔길을 따라 언덕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든다. 간간히 개를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동양인 여자 혼자 이런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한 것 같다. 나 역시도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게 조금 겁이 나기는 했지만, 이런 대낮에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씩씩하게 걸어 나갔다.
긴 오솔길을 지나고 나니, 집들의 간격이 더 듬성듬성 해졌다. 간간히 비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한참을 걷고 나니, 어렴풋이 나의 기억 속에 맴돌았던 그 이미지가 오버랩된다!
‘Cirencester Rd.’라는 표지판을 보니 기억이 났다!. 26년 전 이모가 살았던 그 집이 ’Cirencester Rd.’ 였어! 선명하게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작은 집들이한 줄로 이어졌던 그곳! 아! 그곳이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마을이었구나!
내 머릿속의 빛바랜 사진들이 선명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집들 저 멀리 보이는 그 언덕! 바로 그 언덕이었다. 그 언덕이 점점 손에 닿을 것 같았다.
조금 더 걸어간 곳에는 그 당시 이모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꼬맹이 사촌동생들을 데리고 다녔던 동네 서점과, 동네 작은 슈퍼마켓도 보였다. 모든 것이 내 기억 속의 그 모습과 일치했다. 그랬었구나, 그 동네가 이랬었구나, 그래서 내가 그리도 아름답다고 생각했었구나!
지금 마주한 이곳은 내 기억 속의 그곳보다도 더 한적하고, 소박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이제 정말 더 언덕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내 걸음은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동네의 작은 Glenfall Preparatory School도 보인다. 이곳에서 그 당시 주일마다 예배가 있었다. 그곳의 교인들이 늘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 정도 올라오니 사람이 하나도 안 보인다. 정말 이 동양인 아줌마 겁도 없이 혼자 이대로 길을 가도 되는 것일까 덜컥 겁도 났지만, 여기까지 와서 저 손에 잡힐 듯한 언덕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오솔길을 지나가니 한쪽 길은 Private area, 한쪽은 Public Footpath라고 되어있다.
주저 없이 Public Footpath라고 쓰인 곳의 철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인지 진흙뻘이 되어있었지만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발을 내디뎠다.
그래! 이거야! 안 올라와 봤으면 후회하지 않았겠니?
눈앞으로 넓게 펼쳐진 언덕, 그 위로 바람이 지나간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그림자를 만들며 이동한다. 이 광활한 공간을 나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
어렴풋이 그리웠던 노스탤지어적 감상에 젖어있는 것도 잠시, 이내 이질적인 풍경 속에 나 홀로 있다는 것이 조금 두려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내 작게 나 있는 길을 따라, 이곳을 나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점점 풀숲이 높아지고, 사람이 다니던 길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커지고 내 귓가에 벌이 윙윙 거리는 소리도 더 자주 들렸다. 다행히 이곳에도 GPS는 잡혔다. 반대쪽으로 나가면 대로가 나올 테고, 그곳까지 그다지 멀어 보이지는 않으니, 이곳을 나가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주변에 그 누구도 산책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 길이 맞는 건가 불안해지기 시작하면서 내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언덕 넘어 걸음을 재촉하니 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대로변까지 무사히 나왔다.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집까지 가는 택시를 불렀다.
아이들이 없는 동안 모험심을 발휘해 보았는데, 혹시라도 내게 사고가 생긴다면 아이들에게 가장 타격이 크다. 아이들 캠프 간 동안 함부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강행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