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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Aug 10. 2023

구름이 거치는 찰나

영국날씨가 그렇지 뭐……


8월 2일 (수)


어제 혼자 멀리까지 다녀와서 인지 오늘은 집에서 조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몸이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 괜히 몸이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고, 눕고만 싶어 진다. 이제 정말 나이가 들어가나?

한국에서는 꾸준히 운동도 했는데, 이곳에서는 운동하기도 귀찮은 생각이 든다. 그나마 시내까지 한 시간 왕복으로 걷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는 있지만, 집에 있으니 앉아서 계속 먹을 것만 찾게 된다.

그러고 보면, 항상 해외생활 할 때마다 살이 쪘던 기억이 있다. 처음 영국에 왔었던 십 대 때에도, 왜 이렇게 단 음식이 먹고 싶어 졌었는지, 그때 찐 살이 내 평생의 몸무게 기준을 올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생각을 해 보면, 지금 쉬고만 있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도 어쩐지 스트레스를 은근히 받고 있는 것 같다.

원래 내향적인 성격이라 말할 사람이 없고, 친구가 없다는 것은 전혀 스트레스가 되지 않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사고 같은 것 때문에 불안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아이들은 비로소 캠프에 적응이 된 듯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처럼, 하루하루가 규칙적으로 바뀌었다. 긴 여름방학을 이렇게 규칙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곳에 온 것에 감사하고 만족한다. 한동안 아팠던 큰애, 아프고 난 후에는 신경이 예민해져서 하루하루 눈치를 봤지만, 또 한주를 맞이하면서 어떤 점이 편해졌는지 짜증이 줄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가 6학년 자기 아들이 같이 다니려고 하지도 않고, 말도 안 하려고 한다고 하는 이야기를 멀리서 나마 접하고 나니, 그래도 이렇게 엉겨 붙은 우리 애가 아직 순수한 것 같기도 하다.


벌서 아이들 캠프 시작 3주째의 중반을 왔다. 첫날 그렇게 긴장해서 새벽부터 일어나 부산 떨며 점심을 쌌었는데, 이제는 아이들 기상 한 시간 전까지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다가 일어나 후다닥 아이들 점심을 싸 준다.

잉글리시 머핀을 잘 먹길래, 잉글리시머핀에 참치샐러드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싸 본다. 이전에는 샌드위치만 싸야 한다는 고민에 책도 봐 가며 속 재료를 매번 고민했었는데, 이제는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대략 조합해, 샌드위치든, 주먹밥이든, 파스타든 뭐든 쌀 수 있다. 허긴, 이래 봬도 주부 경력 14년 차인데……


아이들을 보내고 집에 돌아와 평소처럼 부엌을 정리하고, 빨래를 돌리고, 부엌 식탁에 앉았다. 내가 이 숙소에서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창틀 너머에 고딕 양식의 오래된 교회 건물이 보이고, 그 앞으로 가로수가 살랑바람을 불어준다. 테이블 높이도 적당히 높아 커피 한잔 들고 노트북을 켜면 어디 조용한 카페에 와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가장 그리워하게 될 공간이 될 것 같다.

오늘따라 비가 제법 많이 온다. 주룩주룩 퍼 붓기도 하고, 바람 소리도 크게 들린다. 금세 식어버린 홍차를 더 끓여서 따라본다.

따뜻한 홍차를 여러 번 따라 마시니 배가 불러온다. 그냥 누워 있어도 될 법 한데, 낮에 눕는 것은 죄를 짓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 평생 바지런히 쉴 틈 없이 살아왔던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일분일초도 허투루 쓰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겨왔다. 그래서인지 가끔 나에게 쉼을 줘도 괜찮을 텐데, 쉴 수가 없다.

이런 날이야 말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쉬어 볼 기회가 아닌가! 죄책감을 뒤로 미루어 두고 이불 속에 들어가 본다. 그동안 있었던 긴장감이 풀리면서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은 두통이 해소되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보면 하루를 버린 것 같지만, 나는 온전히 휴식으로 하루를 썼다.

좋은 기분으로 또 아이들을 맞이하러 가 본다. 하늘의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언제 그렇게 비가 왔냐는 듯이 쨍한 햇빛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영국사람들이 왜 그렇게 햇빛만 나면 바깥으로 나가는지 이해가 간다.


보통 해외에 아이들을 데리고 간 엄마들 SNS에 아이들이 외국 아이들과 학교에서 생활하는 모습이라든지, 선생님하고 찍은 사진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올라오던데, 우리 아이들 보낸 캠프는 보안상의 이유로 그 안을 전혀 들여다볼 수 없다. 하루종일 아이들의 일상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아이들의 증언에 의지하는 수밖에……

우리 둘째가 말한다.

“엄마, 내년에도 이 캠프 또 오면 안 돼?”

“왜? 그렇게 재미있어?”

“응, 솔직히 별 프로그램은 아닌데, 한국에서처럼 숙제도 없고, 가서 배우는 것도 없고, 그냥 놀아! 그래서 좋아! 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좋고!”

“그래?”

아이가 이렇게나 만족해 준다는 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다. 물론 한국인 친구랑 베프가 되긴 했지만, 외향적이 아이 성격상 다른 나라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섞여 노는 이야기를 하니 조금 안심이다. 아무래도 초등학교 4학년이 6학년인 큰애보다 한 살이라도 어리니 더 쉽게 적응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반대로 큰애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물론 한국에서도 그랬다. 워낙 친구를 필요로 하는 성격도 아니고, 혼자 생각하는 걸 즐기는 아이이다 보니, 여기서도 굳이 친구들을 사귀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또 그 이야기를 굳이 나에게 하지도 않거니와……그래서 말보다는 표정과 행동으로 이 아이를 관찰해 보면 대략적으로 유추가 가능하다. 오늘 그렇게 나에게 짜증을 많이 안 내고, 간간히 웃는 모습도 보이는 걸 보니, 이 아이도 점점 캠프에 만족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다. 더운 여름을 피할 수 있어서도 감사하고, 너희가 여름방학을 신나게 놀면서 추억을 만들 수 있어 감사하고,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서 감사하고……

그러나, 내년에 또 오기에는 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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