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날로 먹었다.
8월 4일(금)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이 심상치 않다. 연이어 벌어지고 있다는 칼부림 소식에, 폭염소식을 듣고 있자니, 흐리고, 비만 오고, 으슬으슬 추운 영국날씨에 투덜거리려던 내 입술을 다스려 본다.
남편과 페톡을 하면서도 그 열기와 습기가 보이는 것 같다.
이곳 날씨는 가을날씨 같다. 오늘 아침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니 등굣길이 매우 쌀쌀했다. 나와 체질이 비슷한 큰애는 추위를 잘 탄다.
“엄마, 나 추워, 이건 한국에 11월 날씨 같아.”
“그러게, 엄마도 춥다. “
더위를 잘 타는 둘째만 이 날씨가 시원하다고 좋아하고 있다.
옛날의 나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영국도 한여름에는 꽤 더웠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되었었나 보다. 그때 당시에도 이례적인 폭염이라며 덥다고 했던 기억이 있었고, 그럴 때면 이모네 집 앞마당에서 사촌동생들과 물놀이를 했던 기억도 있다. 하지만 이번 여행 기간 동안에 ‘덥다’ 고 느낄 만한 날은 하루도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름은 여름이겠지 싶어 여름옷만 잔뜩 챙겨 왔는데, 조금 두껍다 싶었던 큰 아이 점퍼를 이렇게 하루도 안 빠지고 입어야 할 정도라고는 미리 예측하지 못했다.
아이들 캠프 기간 중에도 선크림을 혹시 몰라 가져오라고 했는데, 내가 보았을 때 선크림을 바를 만한 날씨는 캠프 끝날 때까지 오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추위를 잘 타면서도 더위에 약하다.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추위를 잘 타지만, 추울 때는 잘 안 아픈데, 더위는 안 타면서, 더우면 어느 날 갑자기 아프다.
작년 여름에는 삼복더위에 코로나로 고생했었고, 재작년 여름에는 대상포진으로 고생했었다. 평상시에 건강한 체질이라 잘 아픈 적이 없는데, 심하게 더운 날에는 꼭 면역질환에 걸려 고생을 한다.
이곳 영국의 첼튼햄에서 보내는 여름은 내 평생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것 같다.
오늘도 둘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한다. 오늘 처음 온 영국 아이였는데, 그 아이도, 그 아이 엄마도 BTS 팬이라고 한다. 그 아이는 블랙핑크 팬이기도 한데, 한국 물건들이 너무 귀엽 하면서, 우리 둘째가 물통에 덕지덕지 붙인 스티커를 극찬했다고 한다. 다음 주에 선물로 스티커를 하나 주기로 했단다. 어디 가나 친구를 만드는 둘째에 비해, 첫째는 오늘도 친구 이야기가 없다. 스스로 아쉬워하지 않으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지만, 친구를 사귀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많이 기쁠 것 같다.
이곳 캠프는 학습이 없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놀기만 하는 캠프이다. 한국에서 보면 프로그램이 다소 아쉽다는 지적이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일단 돈을 들이면 배움과 아웃풋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캠프는 아니다. 수영을 매일 한 시간씩 하고, 테니스, 배드민턴, 피구, 크리켓, 네트볼, 카트, 미술 등 매일 다른 종류의 활동을 한다. 그 안에 단지 배움이 없다는 것이 한국과 다른 점이다. 수영도 그냥 물에서 공놀이하고 놀면 되고, 테니스도 그냥 라켓으로 넘겨서 게임을 하면 된다고 한다. 그리기를 정말 싫어하는 큰애가 미술활동 시간에 그림도 그렸다고 하니, 배움이 빠졌다는 것 만으로 아이들은 모든 활동을 놀이로 받아들일 수가 있다. 반대로 모든 활동에 배움이 들어가는 순간 아이들은 그것을 놀이로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게임, 유튜브만을 놀이로 생각하게 된다.
한동안 방문미술 선생님으로 일했던 나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컸다. 아이를 즐겁게 하면 늘 어머님들의 ‘아웃풋’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그 요구에 응하려고 아이들을 끌어올리려 하면 아이들은 바로 팔짱을 끼고 하기 싫다고 한다. 어차피 사교육도 일종의 서비스이니, 고객의 입장에서 만족을 드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눈에 보이는 배움만이 진짜 배움인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보게 된다.
그렇게 벌써 아이들 캠프도 3/4을 마쳤다. 이제 슬슬 매일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익숙하면서 지루해질 때도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느리게, 이 시간을 만끽하고 싶다. 폭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이곳의 여름을 나는 평생 그리워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