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캐는 날

지인

by 무지개

“카톡” 습관처럼 핸드폰을 바라보니 “그 집 땅콩 언제 캐?”라는 카톡이다.

몇 해 전 정년퇴직한 지인이다. 부부가 날마다 우리 땅콩 캐는 날 만 기다린다고 하였다.

일을 남에게 시킬 수 없고, 거리가 가깝지 않으므로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한 후

밖을 바라보니 비가 계속 오고 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땅을 적시고 있다.

날씨를 검색하니 이틀에 한 번은 비를 예고하고 있다. ‘땅콩을 캐야 하는데~’


다음 날 해뜨기 전, 일찍 일어나 하늘을 보니, 구름 한 점 없이 날이 맑아 마음이 급해졌다.

무작정 호미를 들고 장화를 신으며 마당 옆 밭으로 가서 아직은 잎이 무성한 땅콩을 뽑아 보았다.

올해는 비가 많이 와서 캐내지 않은 땅콩이 다시 씨가 되어 자란 땅콩과,

쥐와 새들이 먹다 만 땅콩들이 뒤엉켜져 있다. 백오십 평 가까운 밭이 천 평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콩쥐팥쥐’ 동화가 생각났다. 그 동화에서는 콩쥐가 일하고 있으면 새와 쥐가 도와준다고 했는데

내 밭에는 훔쳐먹는 새와 쥐가 있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혼자서 땅콩을 캐는데 뒷 목이 뜨겁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가을 햇살이 하얀 구름 사이로 들락날락한다.


한동안, 비가 많이 내린 탓에 땅콩과 흙이 한 덩어리다.

땅콩을 정렬 지어 가면서 알맹이를 따기 쉽게 도랑 위에 올려놓는데

마을 아주머니가 밭 옆의 길을 지나가면서 한마디 하며 가신다.

“땅콩을 하늘 보게 하여 뒤집어 놔야 혀! 며칠 뒤 비 온다고 하니까 땅 보면 땅콩이 싹 나”

새로운 것을 알았다.

땅콩은 비를 맞아도 땅만 안 보면 된다는 것을 땅콩 농사 5년인데 이제 알게 되었다.

내년에는 더 지혜로운 농부가 되겠지? 생각하며 아주머니가 알려주신 대로 허리를 펼 시간도 없이

땅콩이 하늘을 보도록 놓으며 열심히 뽑았다.


도와주는 쥐와 새도 없으므로 비가 오기 전 모두 뽑아 놔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참 일을 하는데

“현지 엄마!” 하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안경을 올리며 집 입구를 바라보니 어제 카톡을 보낸 지인이었다.

“에고 오지 말라고 했는데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했더니 마음먹고 온 듯, 백화점 종이봉투에 담겨 있는 옷을 꺼내면서 “올해는 우리가 도운 다고 했잖아! 맨날 힘들게 농사지어서 준 마음 아는데 마침, 저녁에 김제에

모임도 있고 여기서 시간 보내면 되지”하고는 부부가 들고 온 봉투를 열어 일복으로 입으셨다.


‘아침부터 콩쥐팥쥐 동화가 생각나는 이유가 있었구나! ’라고 생각하며 서 있는데

지인의 남편이 일 장갑을 끼우면서 이야기한다.

“이번에 내가 전기톱 하나 샀는데 나무를 벨 일이 있으면 위험하게 혼자 배지 말고 언제든 말해요. 내가 자를 터이니” 순간 갑자기 내가 아기가 된 느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하였다.

‘땅콩이 이렇게 큰 씨를 수확하게 하는 힘이 있다니’ 하며 생각했다.


일의 끝마무리를 못 한 채 오후 출근 시간이 되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는 이제 직장에 출근해야 해서~”장갑을 벗으며 말하니 “응, 걱정을 말고 일하는 방법만 알려주고 가

훔쳐 갈 거는 없지?” 하며 언제나처럼 유쾌한 농담을 던지신다.

뒷일을 맡기고 출근길 운전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지인은 딸들의 유치원 친구다.

애들은 성인이 되어 서로 연락을 안 하지만 우리는 늘 할 말이 많아서 전화로 수다를 떨고,

그도 모자라 모임도 만들어 몇 개월에 한 번씩 만나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지인은 농사일은 전혀 알지 못한다.

땅속의 지렁이도 무서워하여 신발에 흙 묻는 것도 싫어해서 밭에 들어온 것은 더욱 싫어한다.


지인은 정리된 도시를 좋아하여 백화점 쇼핑을 즐기며 주말마다 여행할 정도로 여행도 좋아한다.

백화점에 대해서도 나는 감탄할 정도로 설명을 잘한다.

상품의 각층 별 놓인 위치 할인 기간 품목 특징 브랜드 등을 이야기하면 나는 못 알아들을 때가 많다.

역사도 잘 알아서 유적지나 여행지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여 가보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자연스럽게 대화 중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면의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시골 생활로 외출이 잦지 않는 나는, 가끔 예쁜 카페를 추천하여 달라고 하면

상냥한 목소리로 귀찮아하지 않고 장점들을 말하며 추천을 해주기도 한다.


농촌은 잡초와 전쟁이다.

빈터로 두면 잡초가 나오는 것이 싫어서 봄에는 해마다 땅콩을 심지만 거둘 때는 힘들어

‘내년에는 심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내 손길을 기다리는 땅콩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수확된 땅콩은 습관처럼 다음 해를 바라보며 또 씨앗을 남겨 놓는다.

땅콩의 반절은 공판장에 보내고 반절은 이웃과 나눠 먹는다.


직장일 마치고 퇴근 후 집에 와보니, 평상 위의 대야에는 얌전하게 담겨 있는 땅콩도 보이고,

평상 밑의 흙을 정리한 듯 마르지 않은 물기가 보였다. 수돗가 옆의 장독에는 아직도 열이 식지 않은

항아리 단지 위에 나란히 올려진 두 쌍의 장갑이 보였다.

“내가 남편에게 물로 청소하라고 했어.”라고 하는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항아리 위에 단정하게 놓여 있는 부부의 장갑을 보니 올해의 농사도 “풍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땅콩이 땅속에서 소리 없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요란스럽지 않게

내 작은 땅콩 한 알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

따뜻한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는 희망을 품어 본다.


다음날에는 비가 예고되어 있다.

콩쥐는 아니지만, 콩쥐가 쥐와 새의 도움으로 잔치에 간 것처럼 나의 주변에 맴돌고 있는

따뜻한 마음들이 여유를 갖도록 도와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창가에 앉아 비를 바라보며 음악을 들으며 올해의 햇땅콩을 삶아 먹어 봐야겠다.

생각만 해도 풍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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