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되면 여행할까?’ 생각하며 긴 연휴를 기다렸었다.
막상 연휴가 시작되니 인천에 계시는 연로하신 부모님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은, 연휴 첫날 시장을 보고 전주에 사는 남동생과 함께 상경을 하였다.
다행히 상행선은 붐비지 않아 저녁쯤 정해진 시간에 친정집에 도착했다.
다리가 불편하여 걷지를 못하시는 엄마가 계시므로 저녁을 준비하려고 불편한 몸으로
분주하게 움직일 것 같아 미리 연락을 안 했다.
도착하니, 두 분이 저녁 식사 동안 있었던 서로 소통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식사 시간 지키지 않는 것과 어머니는 담배 피우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그러실 때마다 두 분 다 서로 제지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동생과 간식거리로 저녁을 대충 마무리하고 오랜 운전으로 몸이 피곤하여 자리에 앉으려는데
남동생이 가스레인지에 기름기가 덕지덕지 붙은 것을 보며 수세미를 들고 청소를 시작하였다.
나는 냉장고에 시장 본 것을 넣으려고 하니 냉장고 손잡이 문이 끈적끈적 불편함에
어느새 수세미를 들고 몸을 움직이게 하였다.
몇 년 전부터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는 산림 하는 것을 자연스레 아버지께 맡기셨다.
몸은 불편하지만, 시력은 좋으시므로 집안 살림에 서투른 아버지를 향한 어머니의 명령 섞인 잔소리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가 감당하기 힘들어 우리에게 하소연하시곤 했다.
구십일! 아버지의 나이다. 백 세 같은 팔십오 엄마의 나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두 분이 요양원에 계시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다음날. 며칠 동안 내리던 비는 맑은 가을 하늘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단장을 하시고 의자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 바다 구경 가실래요?” 하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면 좋지.” 엄마가 단장이 늦어지자
“너희 엄마는 항상 어디 가자고 하면 늦어” 하였다.
엄마가 얼굴을 찌푸리며 “남자들하고 여자들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다른데 본인만 생각해.”
하시며 차에 타셨다.
부모님의 고향은 ‘진도’인 섬이라 바다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바다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강화도’를 향해 출발하였다.
명절 연휴라 교통체증이 심했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농촌의 모습을 보여 주는 자연이
부모님의 추억을 되새김하게 하였다. “나락이 벌써 저렇게 익었다냐?”라는 엄마의 말에
“도시에서는 나락이라고 안 하고 벼라고 혀” “나락이 더 쓰러지면 안 되는데”
“풍년이네!”라며 서로 주고받으면서 소풍 온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에
밖에 모시고 온 그것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석모도에 가까웠을 때 차창 밖으로 ‘강화도 쌀로 지은 밥’의 간판을 보시고
아버지께서 “저곳에서 점심을 먹자” 하여 차를 주차하고 ‘밴댕이 회무침’을 주문하였다.
강화도 쌀로 지은 하얀 돌솥밥이 나왔다.
아버지는 조금 드시고 하얀 쌀밥을 어머니 앞으로 가만히 밀었다.
“너희 엄마는 밖에 나오면 밥을 두 그릇을 먹는다”하며 아버지께서는
내가 떠준 누룽지를 조금 드시고 나보다 먼저 나가시며 밥값 계산 후, 담배를 피우며 밖에 앉아 계셨다.
엄마는 밑반찬으로 나오는 나물들까지 깨끗하게 비우시며 늦게까지 식사하시고는
내려가는 계단이 힘드신지 기다려 주시는 아버지를 향해 지팡이를 찾아오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차에서 지팡이를 엄마에게 가져다 드린 후,
이런 나들이가 마지막일 것 같다 하시며 음식점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허리가 반쯤 구부러져 지팡이를 짚고 있는 어머니와 반대로
카메라 사각 안에 보이시는 아버지는 중절모에 단정한 옷차림을 반듯하게 하신 멋쟁이시다.
두 분의 사진을 찍은 후에 온천수에 몸을 담그려고 바로 밑 석모도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석모도 온천 표는 명절의 많은 인파로 입장권이 일찍 마감되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걸어서 볼 수 있는 석모도 바로 옆의 수목원, 보문사 등의 산책길과 볼거리가 있지만,
연세가 있으시고 거동이 불편한 부모님을 생각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모노레일을 탈 수 있는
교동의 ‘화개정원’을 향해 출발하였다.
화장실을 자주 가고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를 하는 것은 선택권이 한정되어 있었다.
일찍 이라고 생각하고 석모도에서 출발하였지만 교통체증은 계속되고 있었다.
1시간 30분 후인 3시가 되어서야 ‘화개정원’이라는 연산군의 유배지에 도착했다.
매표소 앞에는 긴 줄이 서 있었고 이미 모노레일 표는 마감되었다.
부모님을 편하게 구경을 할 수 없음이 아쉬움으로 남아 그냥 돌아갈 수 없어서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입장권을 샀다.
휠체어를 대여하여 걸음이 불편한 어머니를 앉히고 남동생이 밀도록 하였다.
남동생은 어머니를 밀고 정상을 향해 먼저 올라갔다.
화개정원의 관망대까지는 약 2km 정도 되어 보였지만, 아버지는 잘 오르지 못하셨다.
가파른 오르막길로 되어있어서 나는 아버지와 옆에서 동행을 하였다.
아버지는 예전과 달리 계단을 피해 지름길을 찾아 땅만 보고 걸으셨다.
느린 걸음으로 연산군의 흔적을 느끼며 아버지와의 추억을 쌓으면서 정상을 향했다.
남동생은 어머니 태운 휠체어를 먼저 밀고 올라갔지만, 관망대까지 못 올라갔다.
나는, 아버지 뒤를 따르며 어린 시절 앞서 걸으신 아버지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세월은 그렇게 조금씩 흐르고 있었나 보다.
멀리 보이는 산책길 옆에는 숲을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숲 옆에는 계절을 알리는 국화와 이름 모를 들꽃들이 가끔 부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의자가 있으면 쉬시고 숨을 돌리시곤 힘이 생기면 다시 일어나 걸으셨지만
흔들리는 풀잎처럼 다리가 흔들리곤 하였다.
아버지를 가만히 기다려 주며 중간중간 “아버지, 내려갈까요?”를 반복하였다.
아무 말 없이 걸으시던 아버지는 중간쯤 올라섰을 때 “차가 밀리기 전에 집에 돌아가자” 하여
매표 안내소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결국 관망대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 걸었다.
동생은 오르막길 휠체어를 미는 것이 힘들고 아버지는 올라가는 것이 힘이 들므로
또 아쉬움을 뒤로하고 집을 향해 내려왔다.
강화도를 나오면서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 강화도는 밤이 많다고 했는데” 하시며 나무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집에 오시는 동안 차안에서 또 엄마와 고향을 떠올리며 한 마을 살았던 마을 분 중 누가 돌아가시고 누가 안 돌아가시고 등 주변 분들 이야기를 하시며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9시가 되어 친정집에 도착하니, 옆집에 사는 신혼부부가 시골 부모님이 밤을 주셨다고
한 포대를 가져다주었다.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밤 이야기를 하셨나 보다.
그렇게 이틀 밤 저녁에는 아버지는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은 저녁부터 내리는 비로 날이 조금 추웠다.
아침 식사를 하며 어머니는 부평병원에서 불편한 다리 때문에 드시는 골다공증 약을 타오라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전기 자전거 이야기를 하셨다.
경로당에 엄마가 매일 가는데 걷지를 못하므로 전기 자전거로 태워 주면서 몸에 힘이 없어
위험한 경험을 많이 하였다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김포에 있는 3륜 오토바이 공장으로 보러 가자는 이야기를 하였다.
“아버지! 오토바이는 위험해요”를 여러 번 하였으나 “지금 타는 전기 자전거가 더 위험하다”라고
하며 옷을 입고 준비를 마치셨다.
비가 제법 많이 내려 운전하기 싫은 날이다. 순간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쉽지가 않구나’를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았다. 아버지는 어제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아버지, 꼭 사셔야 해요? ”라고 다시 묻자
망설임 없으시고 “세 발 이 두 발보다 안전하고 속도도 느려서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이야기하였다.
나는‘설마 사지는 않으시겠지?’라고 생각하고 김포로 출발하였다.
그칠 줄 모르는 비는 와이퍼를 쉬는 틈 없이 차창 밖 유리를 왔다 갔다 했다.
공장에 도착 후 내부에는 여러 대의 3륜 오토바이가 전시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여러 물건을 만져 보시며 웃음을 머금고 마음에 드신 물건을 고르시고 흥정하였다.
비는 계속 내리고 병원에 약을 타러 가려면 일찍 출발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흥정은 끝날 줄을 모르셨다.
“아버지 더 생각해 보시고 나중에 사셔요”를 하다가 결국은 내가 오토바이값을 계산하고 있었다.
연휴가 지나면 직원이 배달하여 준다는 말을 듣고 아버지는 차에 타셨다.
병원으로 오는 길 아버지는 장난감을 산 어린아이처럼 색깔을 이야기하며 빨간색이 좋은지 하늘색이 좋은지 나에게 물어보셨다. 나는 저절로 말이 없어졌다.
젊었을 때의 엄마는 표현이 없으셨다.
‘아버지의 완고한 성격이 엄마를 힘들게 하기도 하였겠구나!’ 생각하였다.
아버지는 그 옛날 고등교육을 받으셨다. 그것이 아버지에게는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살아오신 동안, 힘든 일을 하지 못하여 일정한 직업이 없으셨다.
어머니와 우리 어린 4남매가 생계를 책임지며 가족의 경제를 이끌어왔다.
나는 가끔, 부모에 대해 생각해 보곤 한다.
그러면 어느새 가슴이 답답하여진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운전하다 보니 비가 내리기 때문인지 날이 어둑하여 병원에 도착했다.
접수하고 대기 시간이 길어 병원 밑 빵집에서 빵과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으로
아버지와 함께 나누어 마시며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여쭈어보았다.
피곤함을 잊고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시는 아버지는 꼭 어린 소년 같았다.
부잣집 귀한 아들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다가 어린 시절 전쟁으로 아버지를 일찍 잃고
아버지의 삶을 익히지 못한 아버지의 입장이 되어 들어 보았다.
‘부모가 되어 자식을 책임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쩌면 어려웠을 수도 있겠구나!’
조금은 이해할 때 아버지의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의 전화다.
수화기 너머로 골다공증 약 이야기 같았다.
어머니는 아버지 앞에서 아기와 공주의 중간쯤이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어떨 때는 내가 들어도 무안하여 언젠가는 내가 아버지에게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는 “내가 젊었을 때 잘못을 많이 해서 그래 그리고 불쌍하잖아.” 하시곤 하였다.
어쩌면 나는 친정집을 향한 나들이가 책임과 의무로 행동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오랜 세월 동안 즐거웠던 경험은 없다.
요즘 부모와 추억 쌓기를 한다.
앉았다가 일어설 때 이제는 부모가 내 손을 잡고 일어선다.
과거의 경제적 부족함이 부모를 탓할 나이도 지났으므로 태어나 부모에게 도움받고 자란 것이 적다 하여
행복한 추억을 담을 시간을 버려 버리지 말자.
이제는 서운한 과거는 묻어두고 앞으로 남겨진 부모의 삶에 행복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 가다 보면
그 자체가 행복한 삶이 된다는 믿음이 생기고 있다.
우리의 삶의 끝은 같은 결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하더라도 과정은 같지 않으므로 행복한 추억을 담기 위해 아버지와 2박 3일을 보내며
아버지의 발걸음이 되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