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온 Sep 12. 2024

노리코 씨? 상담 좀 할게요


시간당 900엔짜리의 인생이라는 바다를
하염없이 헤엄치는 중이다.

모두가 이렇게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만 이렇게 아프게 사는 건지, 서점에서 마주치는 자기 계발서의 값싼 동정은 나를 쉽게 초라하게 만든다. 나의 인생과 얼굴 모르는 타인들의 인생을 바꿔 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매일 현재를 잃고, 가지지 못할 미래를 갖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을 쳤다. 이런 고통 속에서 조차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은 내 짧은 손톱에 박힌 부스러기보다 없었다.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산은 그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고, 모두의 응원과 기대를 한껏 비행기에 싣고 와버린 바람에 그 짐들을 다시 반송시킬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두려웠던 건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조차 내가 서있을 자리는 없을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이었다.


모든 건 지나간다는 말이 무색하게 내가 일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나약한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특유의 웃고 있지만 등뒤에

칼을 숨긴 것만 같은 미소,

침묵이라는 단어뒤에 보이지 않는

이방인에 대한 혐오,

뒷골이 서늘해질 정도의 무심함,


매일매일 나를 환대한다며 다가오는 그 모든 관계들이 두렵기만 했다. 그럼에도 제일 무서운 건 나에게서 나오는 생각이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다고 해도

이곳보다 좋을지 증명할 수 있어?

아직도 사람이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주제에 돈 좀 벌고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거 아니야?
머릿속에 생각들은 날카로운 칼로 나를 찌르기에 바빴다. 우물 안에 개구리가 밖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가야 하는 방향을 잃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본들 서로가 사는 환경 자체는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나열해 봤자 서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너와 나는 또다시 우울해질게 뻔하잖아?


슬픔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별조차 없는 검은 밤, 부엌으로 가는 도중 일을 마친 노리코와 마주쳤다. 늦은 밤에 귀가하였음에도 지치지 않은 미소로 수고했어라는 말을 건네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니 괜스레 고추냉이가 잔뜩 발린 초밥을 먹은 것 마냥 시큰해지며 나도 모르게 말을 뱉어버린다.


“저...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상담 좀 할 수 있을까요? 인생 상담이요”

꽤나 적잖이 놀란 듯한 노리코는 귀에 걸린 이어폰을 빼고 다시 미소를 섞으며 말했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을게, 30분 뒤에 내 방에 노크해 주겠어?"




초조하게 시계를 보며 30분이 흘러감과 동시에 206호의 문을 조심스레 두들겼다.

들어와라는 다정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처음으로 들어가 보는 낯선 그녀의 방은

그녀의 분위기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샤넬 넘버 5의 향기가 방을 에워싸고 있지만 머리가 아플 정도는 아니었다.

왼쪽 시선에는 책상에 올려진 아늑하고

따뜻한 조명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인사할 때부터 얼굴이 안 좋던데, 무슨 일이야? 카페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다정한 목소리가 나의 세계에 침입한다. 나는 빠르게 패배를 인정하고 차마 뱉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지금의 내가 겪는 현실과 나의 포지션들을 꽤나 빠르게 뱉어낸다. 그녀는 더 이상 웃지 않고 묵묵히 나를 응시하면서 무릎에 턱을 갖다 댄다.


“............. 이러한 일들이 있었어요.

저는 제 삶의 패배자가 된 기분이에요.”



“어째서 시온은 그렇게까지 자신을 절벽으로 몰고 가는 거야? 널 괴롭히는 건 주변 상황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말이지, 너를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너 스스로야, 모르겠어?"


친절했던 그녀는 사라지고 특유의 돌려 말하기는 찾을 수 없는 단호하고 차가운 말투에 힘이 느껴진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나를 가장 사랑하는 건 나인데?
반박하기도 전에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는 말을 덧붙여 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 다음단계로 가기 위한 결심을 고민하는 건 매우 좋아. 그런데, 마치 시온은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 마냥 눈치를 보고 있어,

넌 정말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거 맞아?


꽤나 오랜만에 맞아보는 망치의 타격감은

상당했다.



뭐든 가벼운 건 싫었다.

가벼운 남도, 가볍게 보이는 시선도 싫었다. 그 시선에 꼬투리 잡힐까 봐 사소한 모든 것에 하나하나 무게를 실었고 체중을 늘렸다. 더 이상 안을 수 없는 것들 조차 욕심 많은 나는 끝내 가져야만 했었다.

조금이라도 가벼워진다면 나라는 존재의 무게가 마치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티끌처럼 사라져 버릴까 하는 두려움은 나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막연한 연민이었을 뿐인데도,


늘 가진 것은 당연시 여겼고,

가지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갈구했다.

지금까지 나는 누구의 시야 속에 살고 있었을까.


아주잠시 적막감이 흐르고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김이 나는 포트에서 찻잔에 물을 부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는 주황색 차를 내가 있는 자리에 내민다. 나는 기름처럼 끈적이는 감정들을 품은 마음에 뜨거운 차를 목구멍으로 넘긴다.

억눌린 마음들이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마른 목을 축이며 잠든 어젯밤이 지나고, 오늘의 하늘을 마주하기 위해 어느 때보다 창문을 조금 더 활짝 열어보았다. 푸른 하늘과 구름 같은 강아지를 산책하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시야에 나타난다.

키치조지의 호수를 보러 가자.

딱딱한 스타벅스 의자에서 일어나서 촘촘한 한자들이 쏟아지는 책에서 벗어나 키치조지의 하늘을 바라보자. 다이어리에 쌓아놓은 계획들은 큰 용기를 내고 닫아버린다.


어두운 지하로만 다니던 지하철에서 지상을 오르는 JR 주오선으로 갈아탔다. 지하철의 창문은 두꺼운 벽이 아닌, 화면 속으로 본 만화에서 자주 만났던 다채로운 색깔의 풍경이었다. 이곳에 온 지 두 달이 넘어서야 비로소 그림 같던 장면들을 품에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입으로 뱉지 못하는 탄성을 우물우물 씹으며 키치조지 역에 도착했다.


이노키시라공원으로 향하는 한걸음 한걸음이 아까웠다. 발을 디딜때 마나 나와 눈을 마주치는 거리들은 아름다움을 넘어 삼켜먹고 싶을 정도의 사랑스러움이 녹아져 있었다. 그것들은 이방인과 여행객의 중간사이의 나를 거대한 어딘가로 안내해주고 있었다.


걷는 행위가 이렇게나 즐거울 수 있구나, 오랜만의 느끼는 쾌감에 취한 채 공원을 음미하던 도중, 피노키오가 아니라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등장하는 토끼가 얼굴을 내밀 것만 같은, 우리 같은 인간들이 살기에는 어쩌면 과분해 보이는 오두막의 커피냄새에 시선을 옮겼다. 연두색의 풀들에게 두 다리를 잡힌 채 계단을 올라가 향기의 범인인 커피를 주문한다.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 손을 내밂과 동시에 사장님은 푸른 눈을 가진 젖소인형을 손가락에 끼우고,

작은 꾸벅임과 함께 인형극을 선보이셨다.


이런 깜찍한 장난에 어떻게 소리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 귀여움에 몸부림치는 내 리액션이 꽤나 마음에 드셨는지, 그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셨다.




아이스커피를 목으로 흘려보내며 뜨거워진 흥분을 차분히 식혀본다. 이어폰에서 흐르는 음악을 멈추고 흙과 신발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그저 걷는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걱정은 없다. 결국 내가 닿아야 할 곳에 도착할테니까.


문득 느껴진다. 천국이란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곳이구나. 빈 벤치가 나를 품어주고, 고요하게 펼쳐진 호수를 그저 말없이 응시한다. 무심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벤치에서 기타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곱슬기가 섞인 단발의 히피머리와 짙은 체크 남방은 남자의 세월의 흔적을 담아내고 있었다. 검은색 컨버스에 짙은 청바지는 그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나도 모르게 기타 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풍경에 몰두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제 기타 소리에게 인사를 하고 내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작은 아쉬움을 벤치 위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나지만 기타를 연주하는 그의 뒷모습을 시야에 품기로 한다. 어깨에 힘을 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 그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고요하면서도 강렬했다. 호수의 풍경을 보는 핑계로 그의 뒷모습을 한동안 놓치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시모어 번스타인이 말했던 유쾌한 고독이라는 단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짧지만 긴 휴무를 보내고 집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던 중, 발소리가 울려 퍼지며 바닥에 전해지는 진동에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이어폰을 빼고,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휴무 잘 보냈어? 어제와 얼굴이 완전히 달라졌네?

어제 슬퍼 보였던 시온도 예뻤지만,

오늘의 시온은 더 이뻐보여."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내게 주어진 상냥함들이

나에게 차오른다. 그와 동시에 언젠간 끝을 맞이하게 될 먼훗날에 느낄 슬픔을 미리 아파하기 시작하고, 나는 또다시 쓸데 없는 걱정에 빠져든다.





이전 04화 노리코예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