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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Sep 18. 2024

중고서점, 킷사텐과 클래식 담배


담배를 입에 물게 된 이유를 물어보면
마치 죄를 고백하는 사람처럼 죄책감이
나를 조이고 무언가 거창한 서사를 만들어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이 나를 짓누른다.



누군가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또 누군가는 담배 연기 속에 빠져든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담배를 피운다. 이유는 가지각색이다. 때때로 질문을 위장한 비난이 섞인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재빠르게 주제를 바꾼다. 그들의 기준에 맞출 필요 없다는 듯이 내 방식대로.


그대들이 걱정하는 건 내 폐가 아니라, 그대들이 만든 틀에 벗어나려는 나의 모진 성격이겠지!




무심코 라이터를 찾는 내 모습에 스스로 위화감을 느꼈고, 나는 생각보다 쉽게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런 내가 지금, 이 매력적인 킷사에서 이마에 손을 얹고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다.




타국살이의 마의 구간이라고 불리는 3개월을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세계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그저 막연하게 머물러있을 뿐이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감히 닿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듯했다. 혼자가 되길 바라면서도 누군가가 다가와주길 바라는, 결국엔 버려지기 전에 내가 먼저 등을 돌리는 가엾은 이기주의인 나만 있었다.




퇴근길에 매번 밟던 익숙한 길을 뒤로하고, 오늘만큼은 다른 길을 택했다. 어둑한 골목에 예상치 못한 따스한 빛을 발하는 가게가 눈에 띄었다. 책들로 가득 찬 쇼핑카트가 있는 그곳은,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어질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잡지부터 그림책까지, 헌 책이지만 새것처럼 정성스럽게 포장된 모습이 눈을 사로잡는다.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퇴근 준비를 하는 듯한 사장님의 모습에 발길을 돌렸다. 아쉬움을 달래며 캘린더에 서점의 이름을 적었다. 流浪堂(Ruroudou )






오후 3시가 되어 가방에는 일기장과 보라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넣고 그곳으로 발을 옮긴다. 한적한 낮의 서점은 어젯밤의 풍경과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조심스레 그 비밀스러운 곳의 문을 열자, 작은 종소리가 울리고 내부의 고요함이 나를 맞이한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 속으로 발을 들였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힌 책들이 나를 환대한다.

여기는 천국인가? 나는 또 입을 틀어막은 채 카운터에 계시는 백발의 주인에게 고개를 꾸벅인다. 사랑스럽다 못해 경이로울 정도의 이 공간에 존재하는 내가 오늘만큼은 자랑스럽다.



이곳에서는 어떠한 카메라 셔터도 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오직 은은하게 흘러내리는 음악소리만 존재한다. 가게 내에 규정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손님과 사장님 모두가 암묵적으로 지키는 룰 같았다. 사람들은 오직 눈과 손으로 책을 마시고, 그 깊이를 음미할 뿐이다.



신비한 책들 사이에서 나는 장그르니에의 섬을 찾는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바로 그 섬이었으니까. 섬의 재고를 여쭤보자, 사장님은 재빠르게 수많은 선반 중 한 곳을 유심히 훑어보기 시작하셨다. 겉보기엔 성의 없이 투박하게 아무렇게나 꽂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지만 아마도 그들만의 규칙이 있는 듯했다. 제3자의 눈에는 그저 혼돈처럼 보일지라도, 그곳에는 질서가 존재했다. 사장님의 눈은 확신에 찬 듯 정확히 책을 찾아내려 했다.

사장님은 결국 마지막 남은 한 권이 이미 팔렸다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그 말과 함께 아쉬움과 미안함이 섞인 미소를 지으셨다. 조금, 아니, 사실 많이 아쉬웠지만 나보다 먼저 그 책을 손에 넣은 사람도 아마 나와 같은 마음으로 섬을 찾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서점의 문을 나서다 구석에 자리 잡은 피아노 선반 위에 투박하게 놓여 있는 책들이 눈에 띈다. 이 역시 사장님의 섬세한 감각이 드러나는 배치일 것이다. 소리 없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앨범에 담는다.

장그르니에를 손에 얻지 못한 보상심리라는 얄미운 나의 마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길.




다음 목적지는 'parlior ikoi'이라는 킷사텐이다. 오고 가는 길에 항상 나와 마주쳤던 호기심을 주는 킷사였다. 이쯤에서 킷사텐(喫茶店)의 한자를 풀어보면,

喫(마실 끽)"은 '마시다'

茶(차 다)는 '차'

店(가게 점)은 '가게'

즉 차를 마시는 가게이다.


실제로는 직접 내린 커피와 흡연과 식사 또한 가능한 옛날식 카페라고 볼 수 있겠다. 내가 유독 킷사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만큼은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유행과 넘쳐나는 정보의 홍수시대에서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들은 자신들의 자리를 지킨다. 주인장의 취향이 들어간 찻잔 속에 있는 커피를 바라보며 사색에 빠지고 바깥의 세상과 분리되는듯하다. 이곳에서 만큼은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최고도, 프로도 될 필요도 없다. 나의 가치를 알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 허락되는 공간이다.



가장 구석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홍차와 피자 토스트를 주문한다. 주황색 스탠드의 은은한 빛이 가게 구석구석을 물들인다. 오래된 만화책과 빛바랜 서적들이 놓여 있고, 커피를 내리는 할아버지는 구부정한 허리로 이리저리 바빠 보인다. 옆 테이블에선 연륜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 담배를 피우며 책을 읽는다.



가방에서 노트와 책을 꺼내고 다 읽지 못한 책을 펼치지만, 옆자리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가 오감을 자극한다. 아마도 담배 냄새보다는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에 더 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이라도 담배 자판기로 뛰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체 못 할 감정을 담아 다리를 떨다 테이블의 볼펜을 떨어뜨린다. 그녀가 볼펜을 주워 나에게 건넸다. 감사 인사를 건넨 후 스스로 다리를 탓한다. 그때 그녀가 은근슬쩍 말을 걸어왔다.


"어머, 한국분이세요?

읽고 있는 책이 한국어네?"

소소한 스몰토크 사이에서 기회가 왔다.


"혹시 그 담배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는 내 속내를 알아차린 듯, 씩 웃으며 peace라고 적힌 담배값에서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건넸다. "난 이거밖에 안 피워. 전 남자친구랑 함께 폈던 건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말이지."


두 손으로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클래식한 맛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흥분이 연기와 함께 느리게 천천히 가라앉는다. 그녀는 읽던 소설책을 다시 펼치며 마지막으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이제 책을 읽을 때만 담배를 피워.

그럴싸한 핑계로 삼기엔 딱 좋더라고. "


나는 말없이 긍정을 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으로 책장을 넘겼다. 굵은 볼드체로 쓰인 니체의 문장이 써져 있었다.


"우리에게 죄가 없음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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