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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Oct 03. 2024

별과 얼음을 넣은 진저에일

어떻게 너랑 이 거리를 같이 걸을 수 있지?





안전한 삶을 원하면서도, 남들과 똑같은 길을 걷고 싶지는 않았다. 겁 많고 소심한 나에게도 자존심은 남아 있었다. SNS 속 수많은 ‘좋아요’를 받는 화려한 핫플레이스 대신, 나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는 순간은 의외로 대형마트에서 장을 볼 때였다. 현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재료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놀라울 만큼 훌륭한 음식들. 한국에서는 무심히 지나쳤을 것들이, 이곳에서는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는 기쁨처럼 내게 다가왔다. 손끝에 닿는 신선한 채소와 향신료 하나하나가 마치 나만을 위한 작은 축제처럼 느껴졌다. 장바구니에 담길 때마다 나는 그곳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는 듯했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오히려 평범함 속에서 특별함을 찾아내는 그 소소한 순간이, 나를 진정으로 설레게 했다. 이 행복을 그녀도 느끼길바랬다. 물론 누군가는 이를 보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비싼 음식이나 멋진 풍경이 아닌, 내 삶의 소소한 즐거움이 진정한 가치였기에 그 작은 선택이야말로 내 자존심의 표현이었다.




장을 마치고 친구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 장바구니는 묵직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내딛을수록 가벼웠다.어둠이 깔린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서로 고른 재료들에 대해 웃으며 얘기했다. 집에 도착해 작은 내 방에 둘러앉아, 간단하지만 정성스레 준비한 음식을 나눠 먹었다. 작은 방 안 가득 퍼지는 따뜻한 음식 냄새와 우리의 웃음소리가 행복이 무엇인지를 경각시키기에는 충분했었다.



배불리게 먹인 H를 역까지 바래다주고 나서, 홀로 돌아오는 길은 왠지 더 길고 더 어둡고 더 조용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차가운 공기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웃으며 지나쳤던 거리들이 이제는 고요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가슴 깊숙이 고마움이 밀려왔지만, 그와 동시에 그 빈자리가 쓸쓸함으로 채워졌다. 혼자서 다시 걷는 이 길 위에서, 눈 주변에 조금씩 통증이 올라왔다.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의 따뜻함이 아직도 머물고 있지만, 그 체온이 사라져가는 걸 느끼며, 황급하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다음날, 우리는 그토록 바라던 별이 있는 나카메구로의 스타벅스로 향했다. 대기시간은 무려 3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은 우리에게 30분과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의 물결에 밀리고 밟히며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마신 '별의 커피'는 기대와 달리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어설픈 위로를 주고받았다.


"실망도 결국 행복을 위한 필요조건이겠지."

그렇게 마음속 실망을 억누르며 우리는 시부야의 초밥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친 우리의 얼굴을 알아본 듯, 초밥집의 쉐프는 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그의 눈웃음은 깊은 주름과 함께 따뜻한 빛을 띠었고, 그 주름은 세월의 흔적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웃어온 인생의 선물같았다. 그의 얼굴은 사랑스럽고 다정한 선으로 가득했다.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초밥의 맛에 우리는 자연스레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다. 우리의 리액션을 눈치챈 쉐프는 다시 한번 그 다정한 미소로 말을 건넸다.

"와사비는 맵지 않나요? 너무 맵다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한일 관계를 급속히 악화시켰던 '와사비 테러' 사건은 어느새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있었다. 진실을 외면한 채 조롱과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그 사건들은 서로를 파괴하기에 충분한 힘을 지녔었다. 가해자는 잊더라도, 피해자는 절대 잊지 못하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단순한 사람에겐 몇 년이 흐른 지금, 그저 희미해질 뿐이었다. 상냥한 셰프는 끊임없이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입에 맞는지 맛은 괜찮은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셨다. 맛있는 식사에 감사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셰프님은 어눌한 한국말로 우리의 발을 멈추게했다.


"행복하세요!"


그의 다정한 눈웃음과 따스한 목소리가 귀에 고인다. 늘 지인들에게 장난처럼 내뱉던 "행복하자, 우리"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 속엔 큰 진심이 담겨있지 않았고, 그저 물 흐르듯 흘러가는 상투적인 긍정의 표현일 뿐이었다.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정의조차 내리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셰프님의 한마디는 나를 멈추게 했고, 그의 다정한 말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멈추고 우리를 그 자리에서 행복하게 만든 것 같았다.






다시 돌아온 나카메구로의 다리를 걸으며, 그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헤어짐을 미루고 싶어 카페와 킷사텐을 두리번거렸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것은 불이 꺼진 가게들뿐이었다. 그때, 저 멀리 하나 남은 불빛을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열자마자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11시까지예요.

일요일과 축일은 6시까지인데, 운이 좋으시네요!”


운이 좋은 우리는 주황색 불빛으로 가득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 색깔의 술병이 나열된 바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할아버지, 손님과 이야기하며 아이처럼 꺄르르 웃는 사장님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흥겨운 재즈 선율과 어우러져 있었다. 그 순간,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가 재즈 LP를 들고 곧 나타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음이 녹아드는 진저에일,

흘러내리듯 귓가를 감싸는 재즈 LP의 따스한 선율,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정한 속삭임이 퍼지는 공간.

주황빛 조명이 아늑하게 비추는 이곳에는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손안에 쥔 작은 일회용 필름 카메라까지.

순간들이 그대로 필름에 새겨질 것만 같은 그 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랑하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남부럽지 않은 집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행복했을 것만 같았던 그녀에게도 삶은 많은 대가를 요구했다. H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도수 없는 진저에일을 한 모금 마셨다. 나는 그녀의 슬픔을 들으며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자아로 가득 차 있던 나는 언제나 '왜 나만'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왜 나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걸까, 왜 나만 이렇게 아프게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좁은 시야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다.  제3자의 눈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 순간, 나는 깨달았다. 조금만 시야를 넓히면, 세상은 그리 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나에게 선과 악의 경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우리를 괴롭힌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지키고 있었고, 반대로 상냥한 미소를 짓던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깊이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이 세상을 조금 더 살아보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H와 함께라면, 슬픔도 허무도 행복도 그저 체험하고 싶었다.







11시가 되자 시곗바늘은 어김없이 자리를 찾았고, 우리는 늘 그랬듯 아쉬운 마음을 안고 가게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필름 카메라로 남겼다. 이제 돌아갈 길을 걸으며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마치 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검은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 깊고 어두웠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한쪽에서 환하게 빛나는 스타벅스 건물의 별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그녀와 함께 그 별을 보기 위해 이끌리듯 이곳에 온 것이 떠올랐다. 여행의 마지막 날, 그렇게 우리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 별을,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는 이제 그녀를 웃으며 보내 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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