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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Oct 10. 2024

원두가게 아저씨는 꽤나 다정하시지


커피 향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와버렸어요.
사실 커피를 마시는 방법을 잘 모르는데…




모든것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내 모습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참으로 맞다는 듯했다. 한국인이라는 장점 덕에 압박 면접을 뚫고 마침내 원하던 호텔로 이직할 수 있었다. 지혜롭고 따뜻한 동료들은 나를 진심으로 환대해주었고, 차별 대신 따스한 사랑으로 나를 감싸주었다. 그 온기 속에 안주할 무렵,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다. ‘코로나’라는 단어가 뉴스 자막에 올라오기 시작하고 호텔은 결국 '잠정적 휴식'이라는 화려한 말로 문을 닫았다. 행복을 찾았다고 믿었던 내 삶은 다시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한동안 눈물로 이불을 적시며 울고 또 울었다. 잔혹한 현실에 원망의 말도 수없이 쏟아냈지만, 도쿄의 하늘은 놀랍도록 청명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잔인하게도.





코로나라는 불행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귀국을 선택했다. 도쿄에서 허락된 시간은 겨우 한 달 남짓. 내 것이라 믿었던 모든 풍경들이 실은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을 탓하기보다, 그 현실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로 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가자며 저장해 두었던 카페와 식당들은 대부분 잠정 휴무 상태였기에 멀리 바라보는 대신 가까운 곳을 보기로 했다. 동네 가게들은 조금 일찍 문을 닫을 뿐,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만큼은, 내가 살던 이 동네의 모든 모습을 눈에 담아 가겠다는 다짐을 하며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무작정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제일 가까운 시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한국의 재래시장과는 사뭇 다른 이 거리도 예전 같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오밀조밀 모여 장을 보고 있었다. 예전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녁 시간에만 운영하는 비건 비스트로, 여러 색깔로 채워진 도시락을 가게 밖에 진열하는 아주머니, 인기가 많아 긴 줄이 이어진 정육점, 오래된 LP 가게, 그리고 한국인인 나에게 짜파구리 조리법을 묻던 교포 출신의 반찬가게 아저씨.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가게들과 풍경들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중, 향기로운 원두 향이 가득한 커피 가게가 나를 마치 홀린 듯 끌어당겼다.




여러 가지 원두를 직접 굽고, 커피 관련 물건들을 판매하는 이곳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가게였다. 사람들은 커피에서 다양한 맛을 찾지만, 내게 커피란 그저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기호식품일 뿐, 딱 그 정도의 의미를 가진 음료였다. 어느 나라 원두가 좋은지, 어떻게 주문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에, 나는 엄지손톱을 깨물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초록색 앞치마를 두르고 배가 조금 나온, 푸근하고 하얀 곰을 떠올리게 하는 사장님이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커피 향이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들어와버렸어요. 사실, 커피를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잘 몰라서요…."


"그렇군요, 그럼 지금부터 천천히 배워보시면 되겠네요. 산미가 있는 커피와 묵직한 맛이 나는 커피 중, 어느 쪽이 더 마시기 편하신가요?"


가느다랗고 또랑한 목소리의 사장님은 마치 처음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를 돌보듯, 따뜻하고 상냥하게 나를 응대해주셨다. 그저 향에 이끌려 커피 한 잔을 사러 왔을 뿐인데,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나도 모르게 작은 욕심이 피어올랐다. 방 안 가득 커피 향을 채우며 핸드드립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마침 가게에는 핸드드립 도구들도 판매하고 있어, 이 기회에 새로운 취미를 가져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장님은 커피 초보자인 나를 위해 하나하나 정성스레 핸드드립 도구들을 설명해주셨다. 그 섬세한 배려에 나는 조금씩 그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괜찮다면 핸드드립 추출 방법을 직접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실 줄은 몰랐기에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마치 풀숲에서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듯 기쁜 마음에 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동작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으며 설명을 이어갔고, 그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커피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손님과 직원의 관계를 넘어, 그는 최선을 다한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돈을 지불할 만큼의 값어치를 지녔음에도, 그는 내가 고른 원두를 직접 볶으며 로스팅에 대한 설명도 아끼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곳에 민폐를 끼친 건 아닐까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얼굴에 가려진 마스크 너머로 환하게 빛나는 눈웃음이 그를 바라보는 내 시선을 부드럽게 감쌌다. 두 손으로 힘차게 원두를 볶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만족스러워 보였다.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안도의 한숨이 작게 터졌다. 오랜 시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며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을 구분할 정도의 눈치는 생겼다. 그의 눈가에 옅게 퍼진 주름들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웃음이 틀림없었다. 그도 즐거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방인인 나에게 자신의 커피 지식을 나누는 그 행위 자체가 그에게는 기쁨이었을 것이다. 로스팅된 따뜻한 원두와 함께 사장님은 여러 커피 관련 읽을거리와 쿠폰까지 챙겨주셨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하고, 정말 즐거웠습니다. 덕분에 커피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집에서 열심히 연습해볼게요, 물론 사장님처럼은 어렵겠지만요.”


그는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대답하셨다.


“저야말로 커피를 좋아하게 된 분이 늘어난 게 감사한 일이죠. 앞으로도 커피를 더 많이 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든지 원두냄새를 맡으러 오세요.”



양손 가득 핸드드립 도구를 담은 봉투들과 은은하게 풍기는 원두의 향을 품은 채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스크 속에서 자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잠시나마 그의 세상을 다녀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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