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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Oct 30. 2024

아직 메구로에 있어요.


운이 정말 좋으신 거예요!


 어떤 필터로도 보정될 수 없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이런 색깔의 길을 지금껏 내내 걷고 있었구나. 의식하지 않으면 지나쳐버릴 것들 투성이에서 일부러 느린 발걸음을 옮겼다. 평일 11시의 골목은 까마귀조차 바쁜 모양인지 나타나지 않았다. 실패자이자 백수가 되어버린 삶은 딱히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성과와 성공으로 줄 세우는 세상에서 벗어나 조금은 서툰 젊은 히피가 되어버린 나는 낯설면서도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5월이 다가오는 도쿄를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을 달래주려는 듯, 길가엔 아직 벚꽃이 풍성하게 남아 있었다. 평범한 주택 옆, 신이 화살을 꽂아둔 것 같은 기세로 자리 잡은 벚나무의 굵기와 웅장함은 압도적이었다. 2월의 예기치 않은 눈사태를 견뎌낸 벚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으면서도 어느새 새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그들을 바라보며 문득, 말없는 경의를 표했다. 존경은 꼭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구나. 어린 나에게 이 산책은 하나씩 깨달음이라는 길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염없이 걷다 보니 결국 나카메구로까지 와버렸다. 이상하게도 내 발걸음은 언제나 마지막엔 나카메구로로 향한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오던 중, 풀과 나뭇가지에 둘러싸인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어 구글에 검색해 보니 내 버킷리스트에 있던 그 카페였다. 언젠가 노리코와 함께 가기로 했던 곳. 하지만 이번엔 혼자 찾아왔다. 이상하게도 슬프진 않았다. 오히려 나를 이곳으로 이끈 무의식이 고맙기만 했다.



다행히 손님은 없었고 인도인으로 보이는 셰프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친절한 직원은 1층의 향신료와 식기를 차근히 설명해 주며 나를 2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녀의 추천으로 스튜와 카페오레를 주문했다. 잠시 후, 그녀는 스튜의 재료가 부족해 메뉴엔 없는 특별한 스튜를 준비해드리고 싶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 스튜가 온전히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져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카페오레의 농도는 깊고 진했고 건강한 재료들이 들어간 스튜는 풍미로 가득했다. 기분 좋은 배부름을 감싸고 계산을 부탁했다. 계산을 마치고 그녀는 잠시 내게 말을 걸었다. 유럽에서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온 자와 떠나려는 자가 만나 짧게 나눈 인사. 나는 오늘의 식사가 도쿄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약간의 아쉬움이 첨가된 밝은 미소를 섞어 말했다.


셰프가 특별히 오늘의 손님 스튜에
더 신경을 써주셨어요.

정말 운이 좋으신 거예요!




그녀의 말처럼, 나는 정말 운이 좋았다. 멀리서 다가오는 시바견이 눈에 들어왔을 때, 어디서 봤더라 싶은 낯익음에 이끌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몇 달 전 만났던 할아버지 시바씨였다.(안타깝게도 사진은 날아가 버려 예전 사진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다.) 주인분께 실례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양해를 구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바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생각보다 훨씬 묵직하고 부드러워 손끝에 감촉이 오래 남았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시바씨의 온기에 그녀의 말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운이 좋은 나는 불지도 못하는 휘파람을 마음속으로 흥얼거리며 또다시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름조차 알 수 없는 크림색 꽃들이 고개를 잔뜩 내밀고 존재를 뽐내고 있었다. 그들은 허리를 바짝 세우고 힘을 주지 않은 채로도 강인함을 드러내며 풍성한 잎사귀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꽃들은 약하면서도 강해 보였다. 그 순간의 아름다움에 젖어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맞은편 벽을 타고 흐르는 분홍색 꽃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모자를 쓴 한 아저씨도 있었다. 꽃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지금 서 계신 모습이 너무 멋지셔서... 뒷모습을 찍어도 괜찮을까요?"


깜짝 놀란 아저씨가 꽤나 부끄러운 듯이 말을 했다.


"저는 제 뒷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멋있는지 몰랐네요. 부디 멋지게 찍어주세요."




사실, 우리 모두 자신의 뒷모습은 보기 힘들 것이다. 그나마 볼 수 있는 건 발밑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뿐이겠지. 누군가의 뒷모습엔 고슴도치처럼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을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의 등에는 천사 같은 날개가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그 온화한 공기 속에서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그를 꼰대라고 부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존경하는 아버지로, 대단한 부장님으로 기억할지도 모른다. 이 긴 여정의 끝에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고 알게 된 것. 그 자체가 내겐 큰 위안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마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이 순간과 이 공간에 남아 있을 거라고, 아직 메구로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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