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내 앞에 보이는 것은 나리타공항에 위치한 스타벅스 직원의 친절한 미소였다.
코로나라는 전쟁이 끝나자 내 작은 휴대폰 속 소셜미디어에는 여행 리스트들이 쏟아졌다. 운 좋게도 인기 있는 신주쿠의 헤어디자이너에게 헤어모델 제안을 받아 계획에 없던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더욱 예상치 못했던 것은 혼자가 아닌 엄마와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침묵의 미학을 즐기는 나에게 엄마와의 동행은 당혹스러우면서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계획에 변수가 생길까 염려한 나는 여러 가지 플랜을 세웠지만 세상은 비효율의 소중함을 깨닫길바란다는 듯이 수많은 변수를 던져주었다. 엄마와의 다툼에 지친 몸을 이끌고 노리코를 만나러 가는 지하철에서 입술을 깨물며 참았던 감정이 자꾸만 새어 나왔다. 내가 가진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현실은 내 마음을 외면한 채 코끝을 시큰거리게 했다. 마치, 4년 전처럼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느낌이었다. 또다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느낌에 고개가 숙여진 채 흔들리는 지하철 인파속에 앉아있었다.
그런 나를 가리키며 비웃기라도 하듯 지하철 상가거리에 위치한 플라워 숍의 화려한 꽃들이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노리코의 스타일에 어울릴 법한 노란 어피니티 장미와 주황색 그러데이션의 레카토 장미를 골랐다. 나는 종종 지인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을 위한 다기보다 상대의 취향과 그들이 뿜어내는 색깔을 떠올리며 꽃을 고르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포장이 끝난 꽃을 손에 들고 가는 발걸음은 조금씩 빨라졌다.
"시온, 여기야!"
조금 높은 그녀의 목소리가 등을 때렸다.
웨이트 한 헤어에 모스콧 안경을 쓰고, 빔즈의 카롤리나 글레이저 코트를 펄럭이며 나에게 팔을 휘적이는 그녀는 여전히 점잖으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가 예약해 놓은 비스트로에 들어가 서로를 마주 보며 그동안 하지 못한 말들을 접시에 쏟아냈다. 그녀는 4년의 시간 동안 얼굴의 주름 대신 그녀만이 줄 수 있는 느낌의 선이 더 선명해져 있었고, 그런 그녀와 함께 있는 이 공간이 너무 좋아서 아까까지 긴장했던 근육들의 힘이 풀려버렸다. 나는 가끔 너무 좋으면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다. 공백과 침묵의 시간을 좋아했던 나는 어디론가 도망가버리고 그녀의 맞은편에는 1분 1초가 아까운 듯이 조잘거리는 여자만 남아있었다.
" 사실, 시온에게 참 미안했어."
술잔을 기울이던 중, 그녀가 뱉은 말에 놀랐지만
애써 눈을 마주치며 글라스에 입을 마주했다.
" 사실, 나는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종종 나를 잃곤 했어. 그래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개인의 거리를 유지해. 일본인 특유의 성향일지도 몰라. 그런데 네가 떠나고 한동안 꽤나 후회했었어. 네가 떠난 공간의 여백이 많이 컸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너와 조금이라도 더 이야기할 걸, 쉬는 날에 한 번이라도 더 좋은 시간을 보내볼 걸 싶었어. 아직도 우리가 처음 이야기했던 순간이 생생해. 너는 정말로 사랑을 많이 줬던 사람이었거든."
지하철 노선까지 바꿔가면서 나를 데려다주는 그녀의 팔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가지 말라고 어린애처럼 떼를 썼다. 그런 나를 달래주느라 그녀는 꽤나 고생했을 것이다. 미련가득한 몸뚱이를 이끌고 호텔에 도착해 잠든 엄마의 이불을 정리해 주고 보라색 샤워밤으로 물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따뜻한 물에 눈을 감고 지나가는 하루들을 다시 돌아보기로한다. 한국인보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꽤나 나를 놀라게 했다. 사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그곳에서 얻은 언어스킬을 제외하고는 먹고살기 바쁜 일상에 치여 도쿄의 기억들은 금세 방치되어 먼지가 쌓여 있었다. 솔직히, 오늘만 해도 노리코를 만난 것이 기적 같았다. 4년 동안 교류가 없었던 외국인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써가며 만난다는 것은 나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그녀에게 연락한 후부터 4년이 공백을 매울 수 있을 것인지 어색한 공기가 맴돌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들었다. 내 예감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오히려 다른 과녁판에 화살이 맞춰졌다.
나는 거대한 도시의 무수한 사람들 틈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견뎌내는 그저 누구의 하루에 스쳐 지나가는 무색무취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보이지 않는 시간과 거리를 넘어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먼 곳에서, 다른 삶의 일부로 존재하는 내가 아직 여기에 있다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에 목이 조금씩 메어오고, 감정은 물밀듯이 밀려왔다. 결국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감정이 흘러넘치지 않도록 애써 숨을 참았다. 하지만 결국 수도꼭지를 틀어 물줄기에 감정을 가리며 흐느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차마 바라지도 않았던 따스한 위로가 나를 사로잡았다. 내가 보낸 감정들이 방사되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 듯했다. 이런 내가 어떻게 도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