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코씨의 편지
이른 새벽, 점점 비워져가는 방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햇살이 내 피부에 닿는다. 그 따스함과 대조적으로 이전보다 넓어진 방은 텅 빈 마음을 더 부각시키는 듯했다. 문득, 그 공간이 어딘가 허전한 내 마음과 닮아 있다고 느꼈다. 우체통을 확인하려고 비밀번호를 돌리며 손을 뻗었다. 몇 장의 종이가 손끝에 닿았고, 혹시 내지 않은 세금 고지서일까 불안한 마음에 서둘러 확인한다. 그러나 예상 밖의 핑크빛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세금 고지서라기엔 이질적인 그 색감에 잠시 당황했다.
보낸 이의 적힌 한자를 확인했다.
호텔에서 인연을 맺게 된 나루코 씨의 글씨체였다. 몇주전, 집 주소를 알려달라고 부탁했던 그녀의 연락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뜻밖에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에 편지를 두 손으로 가슴에 꼭 안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텅 빈 방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 서툴게 그녀의 편지를 뜯었다. 수많은 하트들이 폭발할 듯한 그 편지 속에서 "좋아해요.칸피"
라는 별명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긴 두 장의 편지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하트들은 나를 속수무책하게 만들었다. 살아오면서 종종 감사의 편지를 받아보긴 했지만, 이렇게 하트로 가득 찬 편지는 처음이었다. 꽤나 시크했던 그녀의 모습과 대비되는 그녀의 그림에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완전한 이방인이였던 나와 함께 잠시동안 함께했던 소중한 직원들의 시선이 머리속에 선명해졌다.
출근을 한 나를 향해 항상 웃어주었고 종종 온몸으로 꼭 안아주곤했다. 그 사랑스럽고 애교섞인 목소리로 나를 환대해주었고, 불합리한 상황에서 내가 마주한 부조리에 대신 맞서 싸워주었다. 가끔씩 마주하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에게 또다시 무너지려는 나를 그들은 나보다 먼저 손을 뻗어 나를 끌어올려 주곤 했다. 나루코 씨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시온, 일본에서의 워킹홀리데이 수고하셨어요.
시온과 만나서 놀 생각에 기대가 가득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되어서, 만날 수 없게 되어서 너무 슬퍼요.
제가 시온의 나이였을 때는 그저 아무생각 없이 삶을 살아가고 있었어요. 하지만 시온처럼 일본을 사랑하고, 또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그런 시온의 용기에 그저 감사해요. 시온은 비상한 머리를 가졌기에 어떤곳에서라도 성공할 것이라는 이 나루코의 감이예요. 100퍼센트!!
성공한 시온의 모습이 제 머리에서 상상되네요. 인종이 달라도, 국적이 달라도, 만날 수 없어도, 말할
수 없어도, 친구라는 건 가능한 것이예요. 일본에서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와줘서 너무 고마워요. 반드시 이 힘든 시기가 끝나고 한국으로 놀러 갈 테니까 기대해줘요. 시온을 정말 정말 많이 좋아해요.”
투박하게 한글로 적힌 마지막 문장은 "우리 또 봐요"였다. 아마도 'またね(마타네)', 또 보자라는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듯했다.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기보다는 그녀의 "또 봐요"라는 말은 어떤 값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진정으로 다음에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담긴 말이었다. 그 무렵부터 나는 슬퍼서 울기보다 기뻐서 눈물이 나는 순간을 점차 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