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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돌아갈게요

마지막 이야기

by 시온


새벽의 이케부쿠로의 공기는 도시의 호흡을 서서히 깨우는 듯했다. 오전 6시, 윤곽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흔들리는 거리에서 얼굴 없는 군상들이 부지런하게 제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교향곡의 연주자들처럼, 그들은 각자의 리듬으로 도시를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을 치른듯한 어제가 지나고 오늘의 엄마를 깨우며 아주 잠시 무게 있는 정적이 잠시 머물렀다. 침묵조차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듯 사라지는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에서 우리를 맞이하는 앳된 미소의 안내원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를 자리로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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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도자기 위로 고운 채도의 샐러드를 담으며, 주름진 손길로 병아리색 오믈렛을 만드는 노련한 셰프와 눈을 마주쳤다. 나의 커다란 인사에 살짝 당황한 그의 미소는 곧 고개 숙인 정중함으로 화답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큰소리로 말한다는 엄마의 작은 잔소리가 귓가를 스쳤지만, 나는 이 순간의 순수함을 외국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여겼다.


오밀조밀 개성이 가득한 음식들의 색을 포크로 눌러 입 안으로 보낸다. 색에 대한 나의 집착은 음식을 입으로 먹기보다 눈으로 먹는 기이한 의식으로 이어졌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부드럽게 커피크림을 흘리는 손길, 그 행위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었다. 이런 시각적 향연이야말로 내 감각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주는 기쁨이다.







문화의 날인 오늘, 아사쿠사는 생명의 진동으로 가득 찼다. 사람들과 서로 부딪히고 흩어지면서도 내 천성적인 예민함은 오늘만큼 발동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놀랍게도 한국어는 귀를 울리지 않았고, 오히려 유창한 한국어로 자신을 뽐내며 칭찬해 주길 바라는 매력적인 일본인들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말투 속에는 언어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경이로움이 묻어났을 뿐이다. 아사쿠사의 지하철 한 구석에서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앉았던 작은 스낵바를 발견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며 나는 그의 고독과 풍요를 상상했다. 그는 과연 혼자였을까, 아니면 내밀한 풍요로움 속에 잠겨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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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많은 시간을 소모한 엄마는 나에게 나만의 시간을 가지길 권유했고, 뜻밖의 선물을 받은 듯한 나는 4년 전 밟았던 나카메구로의 거리를 향하는 노선을 밟았다. 변화한 풍경 속에서 옛 기억의 흔적을 더듬었다. 한때 나의 바지를 칭찬하던 그가 있던 마가렛 호웰 매장은 이제 브런치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티 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아주 조금씩 달라진 흔적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그 자리에 있는 츠타야 서점에 문을 열고 조용히 들어갔다.


진열된 책들 사이를 천천히 스치듯 걷던 내 눈앞에 수많은 재고들 사이에 남아있는 단 한 권의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제목이 왠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전 공항으로 향하기 전의 새벽이 떠올랐다. 김영민 작가의 책을 읽던 중 나를 붙잡았던 문장.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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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문장은 쓰가 아쓰코라는 작가의 구절이었다. 나는 그 문장에 줄을 긋고, 마음에 작게 담아두며 책을 덮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 그녀의 책이 내 눈앞에 놓여 있다니,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나를 위해 준비된 세상의 작은 선물일까? 구매를 끝낸 그 작은 책을 꼭 끌어안은 채로 서점 문을 나섰다. 다시 밤빛에 젖은 나카메구로의 거리를 걸어본다. 이 만남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으면서, 나는 느렸다가 빨라지는 걸음을 반복하며 책의 온기를 품었다.



팝업 행사가 열렸던 날인지, 거리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멋진 젊은이들로 붐볐다. 활기찬 에너지가 거리 곳곳에 스며드는 듯했다. 수많은 가게들 사이에서 눈길을 끈 곳은 꽃과 커피를 함께 파는 멋진 남성들이 운영하는 작은 매장이었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며 자연스럽게 그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거스름돈을 건네받음과 동시에 그들이 물었다.

“이쪽 사람이세요?”

그 말에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쪽이 어딜까요?”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곧 도쿄 사람이냐, 아니면 혼혈이냐는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대답했다.


“혼혈도 아니고, 이쪽 사람도 아니에요.

저쪽, 한국사람이에요.”


그들은 내 손가락에 낀 특이한 반지를 가리키며, 그것에 대해 물었다. 소중한 친구가 선물한 반지라고 설명하며 우리는 잠시 짧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언어와 국적을 넘어선 가벼운 대화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주 가끔, 이방인이 아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기분도 나쁘지 않구나.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들 앞에 놓인 분홍색 백합이 눈에 들어왔다. 남성들의 환한 미소와 어우러지며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분홍색은 어쩌면 남자들에게 더 잘 어울리는 색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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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메구로를 지나 가쿠게이다이가쿠역. 크레디트카드를 터치하며 변하지 않은 풍경 속에서 내가 지나온 시간과 공간이 겹쳐졌다. 예전에는 읽을 수 없었던 비스트로바의 메뉴들이 이제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타치노미(선채로 술을 마시는 문화)를 즐기며 건배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내가 살던 하얀 집을 향해 무작정 발길을 옮겼다. 늘 장을 보던 마트의 입구는 꽃과 식물을 파는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1층 식품 코너는 사람들로 북적였고, 형형색색의 식재료들을 바라보며 50엔짜리 빵으로 하루를 버텼던 과거가 상기되었지만 그 기억은 가엾은 연민보다 향기 있는 추억으로 다시 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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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간식거리를 계산하고 매장을 나서던 중, 주머니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고, 매장 직원들과 함께 내가 지나온 곳들을 뒤져봤지만 휴대폰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멀리서 할아버지의 큰 외침이 들려왔다. 8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셀프 계산대. 그의 바구니 밑에서 눌려 있던 휴대폰을 건네받았다. 할아버지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오히려 미안한 것은 나였다. 그의 친절함과 그 자리에 있어준 우연이 아니었다면, 내 소중한 것을 다시 찾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서로 고마운 인연이네요."


그는 그 말 한마디와 함께 키가 큰 할아버지는

가득 채워진 봉투를 들고 자리를 떠나셨다.



거리로 나서자, 도시의 특유한 향기가 코끝을 울렸다. 향수와 그리움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 냄새.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향기를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찾지 않아도 그 향기가 나를 찾아왔다. 해가 저문 저녁 8시, 도시는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4년 전, 슬픔에 잠겨 울었던 그 거리를 나는 지금 또 다른 의미로 눈물을 흘리며 걸었다. 그 눈물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겹쳐져 있었다. 발걸음 끝에 마주한 나의 하얀 집은 변함없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고, 고요히 그 풍채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집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주 잠시, 이 집과 이 거리를 내 눈에 다시 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모습을 눈에 담고 나는 다시 떠나야 한다. 이건 비단 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지나온 자리와 풍경은 누구에게나 잠시 스쳐가는 찰나일 뿐, 오래 머물 수 없는 법이니까.


길을 걷던 중,

맞은편에서 커다란 캐리어를 힘겹게 끌며 계단을 오르는 작은 체구의 할머니를 마주쳤다. 불편해 보이는 다리로 한 걸음씩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내가 지나치려고 한 작은 신사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마치 그 순간, 그녀와 신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대화가 오가는 듯했다. 삶의 무게가 담긴 짐을 이고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의 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예를 잊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일그러진 나의 부끄러움이 존재를 드러낸다. 내 일상 속에서 무심코 흘려보낸 순간들과, 간과했던 존재들에 대한 회한이 마음을 적셨다. 잠시 발을 돌리고 그리고 불이 희미하게 켜진 신사를 향해 나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 자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풍경들이 하나의 맥락을 이루며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삶은 결국, 우리가 지나쳐버린 것들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마음속으로 보이지 않는 신에게 말했다.



"이제 나는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순간에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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