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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Sep 25. 2024

파란색 마크제이콥스 가방을 멘 H는 별을 보러 왔다.


비우지 않는 이상 채워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하지만 사정이 생겨

이번 달 말로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이틀 뒤 도착한 답장은 나라는 사람이 아닌, 나라는 인력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뭐, 어쩌겠는가. 나는 떠난다.




퇴근 후, 마트에서 사 온 레몬 맥주를 홀짝거리며 친구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스타벅스를 좋아하는 그녀는 스타벅스 리저브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심드렁하게 그녀의 메시지를 읽다가, 나카메구로에 있는 전 세계에 세 군데뿐이라는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을 떠올렸다. 그곳 앞에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의 모습도 생각났다. 나는 웅장한 별이 박힌 스타벅스 건물 사진을 친구에게 보냈고, 그녀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



“나 이거 보고 싶어, 도쿄로 갈게”





오래 보지 못한 지인에게 흔히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 내가 무색할 정도로, 친구는 대화하는 짧은 시간 안에 비행기와 호텔 예약까지 끝냈다. 오랜만에 느끼는 한국인의 5G 속도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 계획을 최소 두 달 전부터 하나씩 조사하며 세우는 편이라, 그때의 친구의 신속한 결정을 떠올리면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되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너무 달랐기에 서로에게 끌렸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모르겠지만 도쿄 발을 디딘 후 지금까지 단 한 명의 한국인도 만날 기회가 없었다. 지인들이 도쿄에 아는 사람이 있다며 만남을 주선하지만, 아무리 외롭고 고독하더라도 내향성이라는 틀 안에 맞춰진 나에게는 아직까지 새로운 만남을 서로의 퍼즐에 빈틈이 있다는 이유로 억지로 맞지 않은 빈 곳을 채워 넣고 싶지 않았다. 분명 머지않아 그 퍼즐은 액자에 넣기도 전에 흐트러져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 이렇게 겁이 많은 내가 이곳에 서 있는지 가끔 놀랍다. 나는 나 자신에게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다.





이틀 뒤,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그녀가 머무를 롯폰기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주변 사람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엄청난 다리길이의 그녀가 걸걸하게 웃으며 나에게 뛰어왔다. 일본남성의 평균키를 넘는 친구 H는 중학생 시절부터 모델을 꿈꿨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고 미국에서 여군이 되고 싶어 했다. 꿈이 많은 그녀가 내 눈앞에 있다는 게 나에게는 꿈만 같았다. 그런 우리에게 정신이라도 차리라는 듯이 눈앞에는 사고 현장들이 맞이하고 있었다.

친구가 머무는 호텔에 엄청난 체구를 가진 서양인들의 싸움이 벌어졌다. 호텔 창문이 산산조각 나 있었고, 외부는 경찰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호텔 외부의 창문들은 산산조각이 난 채 땅바닥에 떨어져 반짝이고 있었고, 경찰들과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프런트 직원에게 산산조각 난 창문과 지금 현장의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렇습니까?"


순간 내 귀가 고장이 났나 싶었다.

아니면 내 어휘력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다시 물어보려던 찰나, 아차 싶은 마음에 하려던 말을 멈추고 조용히 친구에게 돌아갔다. 프런트 직원의 표정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초점 흐린 눈동자와 미묘하게 어색한 친절이 나에게 해석지문을

던져주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느꼈던 속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가면을 쓴 사람들, 알 수 없는 끈적하고 불쾌한 분위기가 순간 나를 압도했다. 단 1분도 안 되는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의 숨기기만 급급한 태도에서 느낀 환멸은 내 안의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역설적이지만, 그런 상황에서 두려움 없이 느낄 수 있게 된 것이 고마운 일일지도 모른다.





H와 함께 지유가오카에 있는 토끼들이 가득한 피터레빗 카페에서, 그동안 텍스트로만 나눴던 이야기들을 드디어 목소리로 풀어낸다. 가식 없는 웃음과 친구의 반달처럼 휘어지는 애교살,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따뜻한 분위기. 단지 나를 보러 온 친구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우리의 첫 만남은 17살, 작은 교실에서 시작됐다.



파란색 마크제이콥스의 가방을 멘 H는 흔히 말하는 좋은 동네에서 자란 친구였다. 그 시절 진부하게도 유행했던 아베크롬비와 켈빈크로스백 대신 감각적인 파란색 가방을 들고 등교한 그녀가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어색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가방에 대한 칭찬을 해주고 싶었지만 주위의 친구들은 이게 무슨 가방이냐며 야유를 부었지만, 일찍부터 다수의 취향에 휘둘려 따라가 봤자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그들의 지적질은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주는 재료가 되어주었다. 덕분에 H와 비교적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늘 밝았고 똑똑했다.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았고, 그녀는 나의 천성적인 예민함을 덮어주곤 했다.



옆 테이블에 시선을 옮겼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배가 불룩한 부장님들이 옹기종기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한다.

그들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쑥스러운 듯 소곤거린다.

"우리가 이런 곳에 와도 실례가 아닐까?"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실례라니요, 부디, 당신들의 취향을 존중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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