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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온 Sep 05. 2024

노리코예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나는 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니길 바랐다. 그저 하루이틀이면 지나가는 먼지보다 아주 조금 더 무거운 감정이길 바랐다. 그 정도 무게는 모두들 짊어지고 살고 있을 테니.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검은 감정들은 내가 감시하지 않은 동안 스스로 힘을 키워나갔고 더 이상 내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나보다 더 큰 주도권을 가진다.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항복을 선언한다.

나는 결코 우울한 나를 이길 수 없어.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며 나를 쪼아댔던 그 1년의 시간의 결과가 결국 이거라니.


지독히도 울었고, 지독히도 아팠던 그 순간도 잔인한 나는 나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저 오늘은 무엇을 잃어버릴지, 다가오는 내일은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뺏어갈지, 상실한 세계에서 내가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던 것은 그저 쓰디쓴 약을 말라비틀어진 입에 넣는 것뿐이었다.





일을 마치고 바지를 질질 끌며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는다. 내 앞에 보이는 계단은 마치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폴이 발을 디딘 둥근 계단의 모양과 흡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폴과 함께 묵묵히 계단을 오른다. 나를 맞이해 주는 세면대에 손을 씻고 방 키를 꺼낼 준비를 한다. 동시에 206호의 문이 열렸고, 방 주인과 마주친 기억이 되살아나며 입술에 힘을 꽉 준다.


내 신념에 깊게 자리 잡혀있던 일본사람의 틀을 완전히 부숴버린 예의라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머리 긴 여자였다. 눈마저 감아버리고 투명인간 취급을 하고 싶지만 최소한 그녀와 같은 수준의 사람으로서는 존재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는 남아있었다. 찌들어가는 목소리로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깨끗해진 손을 털며 점잖은 척 말을 뱉었다.

-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

-

..... 어라?

-

-

 

긴 머리였던 키가 큰 206의 여자가 아닌, 초코 브라운의 칼단발의 마른 여자의 실루엣이 느껴진다.

아아,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구나.

드디어 그 무례한 사람 덕분에 이사 갈 걱정은 줄었다는 생각에 안도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던져놓고 책상에 엎드려 머리를 묻고 지친 몸을 맡긴다. 아까 마주친 새로운 206호의 단발의 그녀가 생각이 난다.

형식적인 겉치레 인사와는 조금 다른 결이었다.

아주 조금 더 진심이 느껴졌달까.


아니지, 또다시 착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 모두 다 진심이 아니니까.

올라오는 외로움에 옐로카드를 내밀며 경고를 준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흘러가고 어느 늦은 저녁,

세면대 거울 속에 비친 초라해 보이는 나를 마주하지 못하고 그마저 고개를 숙이며 이빨을 닦았다.

지치지도 않고 하루에 12시간을 넘게 일하며 내 몸을 괴롭혀도 가소롭다는 듯이 우울함은 나를 떠나지 않고 나보다 먼저 침대에 누워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에게 말을 뱉는다.



"안녕하세요. 수고 많으셨어요!"

정면으로 마주한 206호의 그녀는 마르면서 탄탄한 비율의 누가 보더라도 웃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사람이었다. 아, 네..... 멋쩍은 듯이  방으로 들어와 바보같이 후회한다.

좀 더 밝게 인사해 줄걸.

복층에 둔 선물 받은 한국 음식들이 생각난다.

주섬주섬 작은 쇼핑백에 담아 조심히 밖으로 나가본다. 다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는 그녀는 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저기......."

조심스럽게 말을 붙인다.

날렵하고 가녀린 몸이 돌아가며 귀에 꼽힌 이어폰을 빼고 아까와 같은 웃음을 띠며 나를 바라본다.

생각해 보니 나는 언제 저렇게 웃어봤더라?


아까는 당황해서 인사를 제대로 못했다는 적절한 변명을 섞어 그녀의 손에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연신 감사함을 표하며 내게 이름을 건넸다.


“노리코예요. 앞으로 잘 지내봐요."





북적거리는 시장의 사람들 틈에서 핼러윈의 유령들과 주황색의 호박들이
10월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바빠 보인다.
trick or treat!
신발가게 앞에서 주인보다 주인행세를 하는 시바견은 분홍색의 조그마한 딸기 같은 혀를 내밀며
곱게 나이 들어버린 그는 조용히 작은 눈을 끔뻑거리며 흥미로운 듯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본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그저 젓가락 같은 다리들의 행진일 텐데도 말이다.


고즈넉한 투명한 오렌지색의 햇빛과
주인 할머니와 함께 나이 든 주먹밥가게에서는
 TV 소리가 흘러나온다.

모든 순간들이 그렇게나 눈에 담고 싶어 하던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음미하지 못한 채 흘려보낸다.






“저번에 준 김과 음식들 너무 맛있었어요!”

퇴근 후 나를 반겨주는 그녀의 음성에 깜짝 놀라버렸다. 부드러운 갈색 머릿결은 문득 다람쥐를 연상케 했다. 부엌을 사이로 퇴근한 나와 요리하는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어쩌다가 도쿄에 오게 되었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시시콜콜한 신상정보와 함께 그녀 또한 몇 년 전 해외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거지에서 떠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높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녀는 꽤나 특이했다. 영어를 좋아하지만 영어를 하지 못해 어느 호주농장에서 미친 듯이 일을 했다며 과일을 따는 흉내를 내는 그녀는 점점 더 내 흥미를 끌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지 않았어?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혼자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본인도 의식하지 않으면 몰라,

무너지고 싶을 때마다 끊임없이 자신을 칭찬하고 응원해줘야 해."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말들을 그녀에게 선물 받는다.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나도 모르게 멀리하고 은거하였던 지난날들이 선명하게 추억되며 지나간다. 어쭙잖은 위로보다 현실을 위한 조언을 진리라 받아들이고 축하받는 소리보다 적적한 고요함을 원하며 살던 나에게 겉치레 일 수 있던 그 말이 어떤 초콜릿보다 달고 귀하게 느껴진다. 나의 황량한 사막에 작은 오아시스 같은 그녀를 보며 감히 확신했다.



아마도, 나는 이 사람을

아주 많이 좋아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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