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란 것도 하나의 상품으로써 각자의 취향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여기서 상품성은 나의 욕구가 반영되어 그것을 선택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어찌 보면 책을 사들이는 것은 꽃을 고르는 것과 같다. 분명 내 취미(趣味)에 맞게 선택했지만 그 판단의 근거는 모른다. 나는 흰색에 분홍색이 아주 옅게 물들은 리시안셔스를 좋아하나 그 이유는 모른다. 그저 그 꽃이 내 미적 취향에 상당 부분 들어맞을 뿐이다. 또한, 리시안셔스는 그 자체로 '쌍떡잎식물 합판화군 꼭두서니목 인동과의 한해살이풀'에 속하나, 우리는 의미 부여를 거쳐 '변치 않는 사랑' 혹은 '우아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욱이 이러한 꽃말이 중요해진 이유는 모든 꽃들을 품종개량하여 색깔을 마음대로 덧입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인간 간 일종의 주고받음에는 항상 어떠한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찌 됐건 리시안셔스는 선물하기에도 아주 유용한 식물이다.
나의 리시안셔스처럼, 나는 책을 고를 때도 철학책만 주야장천 골라댄다. 나의 전공이 철학인 것을 고려한다면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 있지만, 철학책을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분명 철학자들이 철학책 외에도 수많은 소설들과 사회비판서들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나는 공부 목적이 아니더라도 철학류의 책들을 주로 사들인다. 물론 '~의 말' 혹은 '하루에 하나~' 등의 책들은 내 기준에서 전혀 철학적이지 않다. 철학자의 내용을 담고 있더라도 철학의 방법론을 따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리시안셔스의 꽃말이 '변치 않는 사랑'이고, 철학의 의미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분명 나는 로맨티시스트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실로 사랑이 삶의 원동력임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리시안셔스
꽃을 모으는 것은 일종의 꽃다발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책장은 모종의 책다발이다. 그리고 그 책다발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구성된다. 그렇지만 꽃다발에는 내가 좋아하는 꽃들을 조화롭게 빛내줄 '잡풀'들이 필요하다. 그것들이 '잡-'이라는 접두사가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철학책들이 그 잡풀에 해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그 풀들에 눈길이 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뒤에서 은은하게 그것들을 뒷받침해 주고 있을 뿐이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모든 류의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못 읽긴 하지만 그나마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이 풍기는 색취는 '어두운 회색'이라 할 수 있다. 회색은 검은색과 흰색 사이에 존재하는 영역이다. 혹은 그 결합들로 발생하는 색깔이다. '밝은 검은색' 혹은 '어두운 흰색'이라는 영역은 없다. 흰색과 검은색이 서로 섞이는 순간 회색이 된다. 회색에게는 밝음과 어두움이라는 명도가 존재한다. 즉, 양가적이면서도 밝음과 어두움 중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렇기에 내가 읽을 수 있는 소설들은 중간보다는 더 검정에 가까운 회색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책들 중에는 <이방인> <인간실격> <사양> <1984> <데미안> 등이 그러하다. 이런 책들이 비판적 모습을 띠고 있더라도 소설 장르에 속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언컨대 이외 소설들은 읽지 못하거니와 읽고 싶지가 않다.
다자이 오사무(쓰시마 슈지) / 어두운 회색
위에 나열한 소설들을 읽으면 대체로 우울한 경험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 그 안에서 느껴야 할 감정은 후련한 쾌감이다. 예를 들어, 특히나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들은 지극히 솔직하다. 단순히 그의 소설이 주는 퇴폐적인 흥미도 있지만, 그 속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양가적 심정 사이의 고뇌가 핵심이다. 그곳에서 나오는 극단의 자기혐오는, 혐오에서 나오는 불쾌함을 넘어 지극히 폭발적이다.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그곳에 느껴야 한다. 물론 그의 소설에서는 자살로써 그 카타르시스가 완성된다. 사실 카타르시스의 사전적 정의를 따져봤을 때 그 감정이 카타르시스인지는 모르겠으나 비유하자면 그러하다.
"죽을 작정으로 마시고 있어. 살아 있다는 게 슬퍼서 견딜 수 없어. 외롭다느니 쓸쓸하다느니 그런 한가로운 게 아니고, 슬퍼. 음침한 탄식의 한숨이 사방 벽에서 들려올 때, 자신들만의 행복 따위 있을 리가 없잖아? 자신의 행복도 영광도 살아 있는 동안엔 결코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사람은 어떤 기분일가? 노력. 그런 건 그저 굶주린 야수의 먹잇감이 될 뿐이지. 비참한 사람이 너무 많아. 거슬리나?"
...
"전, 지금 행복해요. 사방의 벽에서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와도, 지금 제 행복감은 포화점이에요. 재채기가 날 만큼 행복해요." 우에하라씨는 후후 웃으며, "하지만 이미 늦었어. 황혼이야." "아침이에요."
동생 나오지는 그날 아침, 자살했다.
에곤 실레, <이중 자화상>
요즘 유행하는 소설들은 이러한 느낌을 주지 못한다. 세상이 소설보다 고달파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유행을 타는 소설들은 지극히 따뜻하다. 너무 따뜻한 나머지 그 소설 밖으로 나오면 우울에 휩싸일 지경이다. 반면 인간은 본래 타인의 비극과 추악함을 즐기기에, 흔히 '월드 클래식'이란 이름이 붙은 소설들은 주로 어두운 형태를 띤다. 다자이 오사무가 <사양>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의 감정은 내가 보기에 지극히 사실적인 감정이어서, 오히려 내 마음을 대변하는 목소리 같기도 하다. 물론 남동생 나오지의 일탈이 과연 합리적인 행동이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확실히 그것은 <사양>의 관심사는 아니다. 결국 소설은 이러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은 본래 인간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내가 이런 류의 소설들을 지향하는 것도 어쩌면 그러한 자기혐오 혹은 추악함에 대한 공경의 본성에서 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무수한 아름다운 상상만을 자아내어야만 하는 모종의 소설들을 읽지 못한다.
나오지의 유서.
누나. 안 되겠어. 먼저 갑니다. 난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걸 도무지 알 수 없어요. 살고 싶은 사람만 살면 돼요. 인간에게는 살 권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을 권리도 있을 테죠. 나의 이런 생각은 전혀 새로울 게 없고 너무나 당연해서 그야말로 근원적인 사실인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두려워하면서 분명하게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입니다. 살고 싶은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씩씩하게 살아남아야 하고, 이는 멋진 일이며 인간의 명예라는 것도 틀립없이 여기에 있겠지만 죽는 것 또한 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라는 풀은 이 세상의 공기와 햇빛 속에서 살기 힘듭니다. 살아가는 데에 뭔가 한 가지, 결여되어 있습니다. 부족합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나로선 안간힘을 쓴 겁니다.
*다자이 오사무, <사양>, 유숙자 역, 민음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