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일어난 것이 아닌 잠들지 않은 것
일반적인 기준으로 하루를 24시간으로 규정한다면, 부지런한 사람의 경우 수면을 약 7시간 정도 취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17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효율적으로 산다는 것은 비단 외출을 전제한다. 외출이 아니더라도 씻기는 해야 한다. 외출 준비 및 귀가 후를 고려하면 1.5시간 정도 소요된다. 또한, 삼시 세끼 식사로 1.5시간 정도 소요된다. 백수가 아닌 일반 직장인 기준으로는 하루 8시간이 최대 법정근로시간이므로 6시간이 남는다. 결국 평범한 직장인 기준 이 6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일명 '갓생'이 결정된다.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는 것과 무관하며 공통으로 주어진 시간이 6시간이라면, 나에게 맞게 6시간을 더욱 부지런하게 살면 '갓생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피곤하다. 찬란한 아침은 생명의 태동 혹은 역동성을 의미하지만, 이것은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다. 더욱이 출근할 필요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밤샘 공부하는 것보다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남들의 아침만큼 새벽을 활용해도 됨을 확인했다. 어차피 11시까지 숙면을 취할 것이면 차라리 새벽 4시쯤 잠자리에 드는 것이 낫다. 누구나 강제적 혹은 자연스레 정오 이전에는 눈이 잠시 떠진다. 심지어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정오에 일어나도 최소 30분은 더 잘 수 있는 효율을 얻는다. 더군다나 늦은 밤에는 거한 식사를 하지 않기에 일종의 다이어트가 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의 효과는 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 계산상 그럴듯해 보인다.
어찌보면 자연의 태동은 아침에 이뤄질지 모르나 인간 사유의 태동은 주로 새벽에 일어나는 것 같다. 우리가 흔히 받아들이는 '창작자의 이미지'는 어두운 방에서 노란 조명에 의지한채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이다. 그것은 일종의 창작에 대한 의지의 표상이자 사유의 깊이에 대한 표상과 같다. 또한, 침대에 누운채 잠들기 직전에 잡다한 생각이 많아지는 것처럼 새벽은 사유가 태동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분명 사유는 무언가를 발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혹은 그러한 특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고요함이다.
사유는 고요 속에서 발생한다. 무언가 태동한다는 것은 시끄러워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해가 떠있는 시간은 잡다한 소음들의 공존이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수많은 요소들이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으로 흘러 들어오며, 그 사이에 나의 잡다한 두뇌 활동이 들어갈 틈은 미세하다. 이는 곧 나에게 집중할 시간은 줄어듦을 의미한다. 물론 그러한 역동성으로 활력을 얻는 사람은 있다만, 고요함을 좋아하는 이에게 새벽은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온전히 나의 방을 내 사유의 브레인 맵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 그들에게 새벽은 잠으로부터의 투쟁이 아니라 하루의 수고로움을 견뎌낸 모닥불과 같다. 출근길의 여러 분주한 소음보다 새벽의 은은한 새의 지저귐이 안정적이다. 햇살의 뜨거움보다 서늘한 공기가 편안하다. 지는 해의 몰락보다 붉음과 푸름이 완연히 조화를 이루는 여명의 시간이 후련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결국 아침에 잠을 자는 모종의 반역자들은 그만큼 새벽의 혁명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분명 그들의 고요한 혁명은 '얼리 버드'들의 역동적 날갯짓에 눈길을 빼앗겨 있을 뿐, 그들이 일용할 작은 벌레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 쓰인 모든 책들이 우리 삶의 영양분이 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