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
며칠 전 국립현대미술관에 방문해
여러 전시를 관람했다.
관람한 날에는 1세대 조경가인 정영선 선생님의
작품들을 다루는 전시가 가장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많은 시간을 보낸 전시는
<사물은 어떤 꿈을 꾸는가>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 전시는 '비인간에 대한 정의 및 공생 윤리를 위한 예술적 전환'이다.
내가 정의하기에도
이 전시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존재의 확장'이었다.
하지만 두 정의는 비슷하지만 다르며, 다르지만 비슷하다.
비교에 들어가기에 앞서
'비인간'이란 '인간 외의 모든 것', 즉 동물과 식물, 사물, 기술 등을 모두 포괄한다.
물론 이 전시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전적으로 주최 측의 설명을 따라야 한다.
그래야 전시가 던지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볼 수 있고,
그것이 그들의 노력과 시간, 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정의는 지극히
관람후기 혹은 사유의 연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논의들은
다소 철학적으로 될 수 있다.
기존의 우리는 철저히 인간중심이었고,
인간에 의한 윤리를 주장해왔다.
탈인간적 사고가 많이 퍼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인간중심적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토록
환경에 무심한 행위들을 행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러한 문제들의 차원은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윤리라는 말은 그 자체로 인간에 의존하며,
그 단어 하나로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성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팽배해진 요즘은 더욱 윤리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 문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존재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철학자들은 흔히
존재와 존재자를 구별한다.
존재는 말 그대로 '있는 것'이고,
존재자는 '내가 있는 것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존재의 범주는 대체로 넓고
존재자는 인간으로 대부분 한정된다.
하지만 존재자란 단어는
인간에게만 특별한 지위를 확보해주기 위한 장치 같기도 하다.
존재자도 존재자이기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나 모든 차원의 논의들은
존재자의 차원에서만 이뤄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존재자이기에 앞서
존재로서 존재해야 한다.
따라서 이 전시는 그러한 측면에서
유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존재를 인간으로 한정하는 행태에
날카로운 지적을 하고 있다.
이 전시가 20세기 후반의 철학자들에게서 동력을 얻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에 해당하는 철학자들의 사유가 대부분 이렇다.
프랑스의 철학자인 질 들뢰즈는
존재를 인간을 넘어 동물과 식물, 사물까지 확장하고, 그 관계성을 주목하기도 한다.
존재자는 존재가 있기에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연장에서 내가 보기에
이 전시는 윤리적 차원을 넘어선 존재적 차원의 물음을 던지고 있다.
물론 전시 속 작품들의 출발점은
비인간 존재들에 대한 도덕적 감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따라서 '공생 윤리'라는 설명이 붙었고,
이는 사실 우리의 최종 목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목표 달성을 위한 사고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비인간과 같이 살아야 해'가 아닌 '다른 것도 존재야'이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윤리의 배려적 차원에서
주체적 차원으로의 전환과 동일하다.
애초에 인간이 내리는 '비인간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비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비인간에 대한 배려보다는
존재 개념의 확장과 주체적 활동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전시는 매우 주체적 활동이며, 내 존재를 넘어서고 있다.
루시 맥레이의 <고독한 생존보트 34.0549°N, 118.2426°>와
박소라의 <시티펜스>가 지극히 그러하다.
전자는 사물과 인간 사이 경계가 무너진 모습을,
후자는 모든 것이 엮여있는 관계성을 보여준다.
두 가지를 종합하면 결국 우리는
존재자가 아닌 하나의 존재로서 여러 관계에 묶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