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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 제본서 전기

'너를 닮은 사람' 소설집 중

by 정유스티나



TV에서 '너를 닮은 사람'이라는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봤다.

정희주역의 고현정 배우가 주연인 드라마였는데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급부상한 신현빈 배우가 열연한 구해원 역할에 빠졌었다.

도서관에서 익숙한 제목의 책을 발견하고 주저 없이 빼들었다.

그런데 표제 소설을 뛰어넘는 '양장 제본서 전기', '실수하는 인간', '지나간 미래'라는 작품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특히 눈이 번쩍 뜨일 정도의 참신하고 매력적인 소재로 풀어쓴 작가의 등단작인 '양장 제본서 전기'를 집중적으로 감상해 보겠다.


작가 정소현은 1975년 서울 태생으로 2008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서 '양장 제본서 전기'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실수하는 인간'_개정판 '너를 닮은 사람', '품위 있는 삶', 중편소설 '가해자들'이 있다. 젊은 작가상, 김준성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양장 제본서 전기(작가의 등단작)

-작가가 소설 속에 만들어 놓은 기본적인 설정을 눈여겨보는 것이 이 소설을 읽는 재미이다.

이 소설은 작가가 초반에 만들어 놓은 기발하고 환상적 요소라는 소설적 설정이 이 소설 전체를 지배한다.

-나는 자신의 근원 즉 출생에 대해 알기 위해 도서관에 간다.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존재와 근원을 부정당한 뒤 출생과 진실을 알기 위해 도서관에 가서 신문 기록을 찾다가 결국 도서관에서 책이 된다.


-소설에서 인물의 캐릭터와 관계를 잘 살펴보면 소설의 아주 중요한 축을 알 수 있다.

소설 초반에 나오는 나와 엄마의 관계는 일반적인 모녀 관계가 아니다.

나는 엄마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고, 엄마는 나를 죽은 이모로 착각한다. p13

그 후 엄마는 두 번 다시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내게 언니, 아줌마, 아가씨 등등 여러 호칭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돌아 다니지 않는 엄마 덕택에 생활비가 3분의 1은 줄었다. p16

엄마가 나를 돌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일찍 노동을 시작하고 삶이 고단하다.

일을 했던 건 노동의 기쁨이나 자아성취 같은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가 벌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혼 후 엄마는 집안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그러다가 한 번 나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빌린 돈으로 생활을 해야 했음에도 엄마의 씀씀이는 점점 커졌다. p15

중학교 때 나는 자주 굶었고, 방학 동안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만으로 부족할 때가 많았기에 주말에는 예식장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했다. p16

나와 엄마는 가깝지만 서로에게 모진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결코 소화되지 않았고, 기어이 태어났다. 이것이 엄마가 말해 준 내 출생의 전모였다. 나는 네 친엄마가 아니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널 데리고 오지 않는 건데. 엄마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게 사실인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p22~23

엄마뿐 아니라 아버지와 나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새카맸던 아빠의 얼굴은 뽀얗게 변했지만 나는 쉽게 알아보았다. 아빠는 손을 흔드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유심히 살폈다. '이런, 너무 자라서 못 알아봤네.' p25

쓸데없이 써 버린 회수권 두 장과 함께 아빠를 버렸다. 회수권 쪽이 조금 더 아까웠다. p26


소설의 전반은 나와 엄마의 관계를 통해 내가 왜 도서관에 와서 출생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는지 드러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리고 아빠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면을 회상 한 뒤 소설은 새로운 서사로, 합법적으로 사라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한 무료 서비스로 나아간다. p12


자신의 근원에 대해 찾을 수없게 되자 인물의 욕망이 변한다.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낡아빠진 인생을 어찌하면 좋을지도 알지 못했다. p18

"이건 죽는 것과는 다른 거겠지요?"

"그럼요.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죽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 서비스는 개인의 기억을 추출해 내 양장 제본서로 남겨 주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추출된 기억은 표지 속의 칩에 이식되고, 동시에 책으로 기록되어 허가한 대상에 한해 열람이 가능하게 되죠. 몸은 사라지지만 정신은 제본된 기억 속에 머물게 되는 거지요. p.27


이 소설에는 사람이지만 무언가 다른 것이 되는 사람들이 나온다.

나는 엄마가 이미 집이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놀라실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집이 돼 버렸어요."

"요즘 같은 세상엔 책상이 되기도 하고, 신발장이 되기도 하고, 이름조차 안 남고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들도 허다한데 그런 것에 비하면 네 엄마는 괜찮은 편 아니냐?" p33


위의 과정을 거쳐 나는 책이 되기로 결심한다.

나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사라지기로 했다. 여기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라면 사라지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일대기를 쓰는 부분을 먼저 메워 나갔다. 쓰다 보니 내 삶이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고 너무 평이해서 탈락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쓰레기통에서의 출생을 끼워 넣었다. p36

나는 마치 도서관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에 마음이 울컥했다. p21

마지막 공란의 남기고 싶은 기억을 선택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가능하면 행복한 기억 속에 머물고 싶었다. 나는 기억의 대부분을 삭제하고 도서관 창가에 앉아 보낸 시간만을 남기기로 했다. p36

내가 선택한 기억의 한 부분은 몸에서 분리되어 깨끗한 붉은 벨벳 표지로 양장제본되었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래된 서가와 서가들이 만드는 통로로 둘러싸인 도서관의 구석, 해가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화장실에 들어앉은 것처럼 편안해져 더 이상 알고 싶은 진실 같은 건 없었다. p40~41


소설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아이러니를 눈여겨보자.

존재를 부정당한 인물이 도서관에 와서 자신에 대한 기록을 찾다가 차라리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게 되고 작가가 만든 소설적 장치인 사람을 책으로 만들어주는 도서관 서비스를 활용해서 책이 되어서라도 이 세상에 남아있으려는 안간힘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결국 이 소설은 사라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존재하고 싶어 하는 욕망에 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참신한 소재이다. 기억의 한 부분을 제본해 책으로 남기고 사라진다는 설정은 환타스틱 하다. 정소현 작가의 많은 작품들이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지만 특히 '양장 제본서 전기'를 읽으면서 작가의 기이한 소설적 장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조금 슬펐다. 나는 부모의 몸을 빌어 이 세상에 왔지만 나의 가치는 나의 존재만으로 빛날 수 있다. 부모의 거부와 출생의 비밀이 모호할지라도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 유일한 존재이고 나의 부모가 누구이던 나 자체로 독립적인 개체이기 때문이다.

정소현 작가의 지인인 어느 교수님이 들려준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정소현 작가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온 가족이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이 소설을 가족 중 한 사람이 읽었는데, 읽을수록 부모님의 낯빛이 좋지 않았다.

"소현아, 우리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니?"

하시는 엄마 아빠의 말씀에 엄청 난감했다고 하더란다.

픽션도 논픽션에서 탄생한다고 생각하시는 부모님의 지나친 감정이입이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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