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사람' 소설집 중
'지나간 미래'
아이러니한 제목이 호기심을 갖게 만든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인데 '지나간'이라는 과거 시제를 수식어로 넣음으로써 문법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담은 제목이 되었다.
소설적 장치가 아주 요망하다. 소설 초반에 독자들에게 앞날을 보는 능력이 생겼다고 못 박아둠으로써 독자들의 의심을 지워버린다.
앞날을 보는 능력이 생기고부터 시간 감각이 완전히 흐트러져버렸다. p203
우리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만약 좀 더 일찍이 앞날을 내다볼 수 있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p205
혹시 과거에 있었던 일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p208
그제야 그토록 알고 싶었지만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앞날을 보았다. 다가올 어느 날 남편을 찾아 부산에 간다. 아직 겪어 보지 않은 일인데도 마치 오래전에 직접 겪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p214
내가 보았던 미래는 내가 직접 부산을 찾아가는 것인데 남편이 이곳으로 온다고 하니 조금 의아했다. 미래라는 게 내가 어떤 일을 하든 그대로인 건지. 변하기도 하는지 알 수없으므로 그의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p217
소설 초반은 이게 뭔 말인가? 시제가 들쭉날쭉하고 도대체 화자의 상태가 뭘까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중반으로 넘어가며 소설은 미스터리적인 요소를 활용한다.
멀리서 멀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세상 모든 것이 멈추고 그 남자만 움직이는 듯했다. 정말 그가 남편인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와 보니 남편과 놀라울 정도로 닮긴 했지만 남편보다 스무 살 가까이 많아 보이는 중년의 신사였다. 한편으론 실망하면서도 남편과 닮은 모습이 너무나 신기해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그가 마치 나를 아는 것처럼 말했다. p208
어머니랑 같이 사는데 뭐가 어때요. 곧 돌아오실 건데요. p212
왠지 그리운 맛이어서 그가 나쁜 사람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213
드세요.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했어요.
어머니는 왜 안 오세요?
나가서 길을 잃으셨나 봅니다. 치매가 있으시거든요. p218
난 이 부분에서 전류에 감전된 듯 온 몽이 찌르르르하고 바보가 도가 트이듯이 화자와 남자의 상황을 알아차렸다.
화자는 치매환자인 어머니이며 남자는 아들이었다.
화자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남편은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된 것이다.
아들을 보고 남편과 너무 닮아서 놀라면서도 남편보다 스무 살 가까이 많다고 실망하는 장면이 가슴 아팠다.
화자의 기억은 남편이 죽기 전에서 멈췄다.
엄마, 엄마.
내 손이 몸에 닿자 초로의 남자는 어린애처럼 엄마를 불렀다. 나는 그가 불쌍해 엄마라도 되는 거처럼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엄마, 이제 돌아온 거예요?
엄마, 버린 거 미안해요. 내 몸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었어요. p221
엄마, 나 오래 못 살아요. 우리 같이 갑시다.
저 아저씨 엄마 아니에요. 정신 차리세요. 제발 남편 만나게 놓아주세요. 그럼 어머니도 찾아드리고 병간호도 해 드릴게요. p222
남편 죽었잖아요. 아시면서 그래요. 원했던 거잖아요. 이제 여기서 못 나가요. 나랑 아버지한테 같이 가야 돼요.
엄마가 괴롭히지 않았다면 자살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아버지의 고통을 알기나 하셨어요? p223
임학평이를 어떻게 했지?
죽었잖습니까. 아주 오래전에 자살했잖아요. 하긴 따지고 보면 전쟁터에서 죽은 거나 마찬가지네요. p228
엄마, 놔두고 가서 미안해요.
마치 내게 하는 말인 양 슬프게 들려 우습게도 눈물이 났다. 그의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아니야. 내가 미안하구나. p230
이 부분은 거의 오열 수준이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남편이 전쟁에서는 살아 돌아왔는데 본인이 남편을 자살로 몰아간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을 치매인 엄마는 기억하지 못할까? 아니면 기억하기에 기억을 지워 버리기 위해 치매를 자청한 것인가?
소설은 두 개의 서사로 흘러간다.
-전쟁에서 헤어진 남편을 기다리는 나의 이야기_전쟁으로 인한 이별, 기다림의 이야기
-치매에 걸린 엄마를 찾아다니는 아들과 엄마의 이야기_여자가 보는 미래에 해당하고 실제 소설에서는 여자가 이미 살아온 시간인 과거에 해당한다.
이 소설에서 치매는 나이가 들면서 그냥 기억을 잃는 질환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어떤 사건,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겪는 증상으로 사용된다.
이 소설에서도 작가는 제목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삶의 아이러니를 사용한다.
나는 그제야 이것이 내가 보는 미래라는 것을 알았다. 현실보다 더 생생해서 깜빡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서 잠에서 깨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날이 오지 않도록 어떻게든 도망쳐야 한다. 정신을 차리면 나는 다시 서울역에서 남편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그나마 가장 행복하였다. p235
그녀의 삶에서 가장 불행하고 무서운 때인 전쟁이 가장 그리운 때라는 역설이 이 소설의 묘미다. 추위와 배고픔, 누군가 해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그토록 기다린 남편, 삶의 단 하나의 이유이자 희망이었던 남편을 사실은 만났으며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자살하도록 만든 것이 결국 자신이었기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래서 기억을 지워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치매라는 막연히 두려운 세계를 이 소설을 통해 치매 환자의 머리 속을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치매의 특징이 이미 일어난 일인데 기억나지 않고 조각조각 기억난다는 것인데 작가는 앞날을 보는 능력으로 탈바꿈한 작가의 상상력에 다시 한번 탄복한다.
치매환자의 머릿속은 미래가 지나가고 과거가 다가오나 보다.
소름이다.
전쟁과 역사가 낳은 비극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고 파괴하는 지를 생생하게 느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