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생각
지금은 50대를 훌쩍 넘긴 나의 제자들이 6학년때의 기억을 소환한다.
그때의 나는 햇병아리 초임 교사였고 솜털이 송송난 애송이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유튜브가 생기지도 않았던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음악시간이 되면 반에서 키가 큰 남학생들이 우르르 풍금을 교실로 옮겼다.
교육대생 시절에 오르간실의 독방에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연습한 오르간 실력으로 반주를 넣었다.
화려한 반주를 넣을 실력은 안되니 주로 쿵작작, 쿵작작작, 박자만 맞추는 코드로 반주를 했다.
물론 이건 순전히 나의 경우이다.
하지만 내 일생을 통해 오르간 실력이 최고조였던 것은 그때였다.
애국가를 4부로 치고, '오빠 생각'을 3부로도 연주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의 능력이 놀랍다.
악보 궤도를 교실 앞에 세워 두고 풍금에 맞추어 아이들이 노래 부르던 그 교실로 타임머신을 타고 떠난다.
초여름의 열감은 있지만 아직은 상큼한 공기가 창문을 타고 우리의 콧등을 간지럽히던 어느 날.
지난 음악 시간에 각자의 파트는 이미 익힌 '오빠 생각'의 3부 합창을 드디어 완성하는 날이었다.
무려 3부 합창이었다.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알토의 세 파트를 다시 한번 불러 보았다.
흠, 이 정도면 꽤 좋은 합창이 완성되겠는걸?
드디어 3부를 함께 부르는 합창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완벽한 불협화음으로 교실은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얘들아, 각자 자기 파트를 지켜서 불러야지. 다른 파트를 따라가면 어떻게 해. 소프라노도 메조도 알토도 아닌 어중간한 소리가 나 버렸잖아."
그랬다.
각자의 파트를 부를 때는 나름 잘 소화하던 아이들이 합치니까 자꾸만 옆에서 내는 소리를 따라가려는 본인의 파트를 급하게 잡느라 죽도 밥도 아닌 평평한 노래가 되었던 것이다.
심기일전하고 다시 몇 번을 맞추어 보았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처음의 불협화음에서 점점 환상의 하모니를 흉내 내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자기의 목소리를 내되 다른 사람의 소리를 귀 기울이며 화음을 맞추니까 멋진 합창이 되었잖아."
아이들의 얼굴은 벅찬 감동으로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유리창을 타고 들어 온 초여름의 바람도 잠시 머물다 갔던 평화로운 시골 학교의 교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기억 저편, 여름의 초록초록한 내음이 코끝을 찌르고 고막을 어루만지던 천상의 합창 소리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들려온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수십 년이 흐른 오늘, 나는 여전히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이제 음악책에서 '오빠 생각' 노래는 사라졌다.
가사가 너무 구시대적이기 때문인가 보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를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에 이 동요를 반드시 들려준다.
리코더로 연주하기도 한다.
나 혼자 감상에 젖어서 연신 감탄사를 날린다.
"얘들아, 이 노래 너무 좋지 않니?"
"뚱~~~"
아이들의 반응은 전혀라는 표정으로 뚱해 있다.
아닌대요 라는 말이 안 나오는 것이 다행일 지경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실망하지만 절대 당황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월 따라 정서가 많이 변했음을 온몸으로 절감한다.
말 타고 서울 간 오빠도 없고, 비단신을 신을 일도 없는 아이들의 공감을 바란 것은 내 욕심이다.
전혀 가슴에 와닿지 않는 아이들에게 나의 감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살짝 든다.
아이들이 부르는 천사의 목소리와 리코더의 선율을 들으며 나의 눈은 감긴다.
그 옛날, 시골 학교에서 부르던 3부 합창의 추억과 그 여름의 냄새를 떠 올린다.
마음을 모아 멋진 3부 합창을 완성했던 그 아이들은 어느 하늘 아래에서 나처럼 늙어가고 있겠지.
초여름,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때쯤이면 우리가 함께 불렀던 이 노래를 한 번은 떠올려 줄까?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랑과 감사를 나누며 어울려서 인생을 잘 살고 있을까?
우리가 함께 만들었던 그 여름 환상의 하모니, 오빠생각 3부 합창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