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나의 탄생
갈래머리 여고시절 로망이 하나 있었다.
하얀 미사포를 쓰고 성당에 앉아서 기도하고 있는 천사 같은 소녀.
마리아, 스텔라, 율리아나, 아녜스. 기타 등등 내 이름보다 훨씬 세련되고 우아한 세례명.
하느님에 대해서 알기도 전에 소위 말하는 믿음이 생기기도 전에 이런 보이는 이미지에 매료되었다.
고향 절친 '옥'이 다니던 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김수경 추기경님도 재직하셨던 유서 깊은 학교였다.
옥이 세례를 받는다고 했다.
평소 동경하던 성당에 다니는 천주교 신자가 되고자 세례 공부를 한다고 했다.
가슴속에만 품고 있던 열망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나도 세례 받고 싶어."
세례를 받으려면 6개월 동안 세례 공부를 해야 한다.
주 1회 평일 저녁에 받는 세례 공부에 참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동안 따 놓은 모범생 타이틀로 내 말을 철석같이 믿어주는 엄마에게 걸릴 일은 없었다.
공부하고 온다고 하면 모든 것이 프리패스였다.
독일신부님의 가르침과 수녀님의 헌신으로 무사히 6개월의 여정을 마치고 드디어 세례를 받게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
옥과 함께 나란히 세례를 받았다.
보통 세례명은 자기의 생일에 맞는 성인과 성녀의 축일로 삼는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사뿐히 즈려밟고 여자 세례명을 몇 번이나 훑고 또 훑어서 무조건 예쁜 이름만 찾았다.
"유스티나"
성녀의 업적이나 일생은 보지도 않고 운명처럼 유스티나가 되었다.
하늘에 계신 유스티나 성녀님 당황하셨지요?
남모를 기쁨과 벅참으로 세례식을 성대하게 치르고 집에 왔다.
그때는 몰랐다.
나에게 닥칠 시련과 핍박을.
성당에서 받은 미사포와 기도문을 외투 안에 숨기고 현관문을 여는 순간,
"애야, 이리 와 앉거라."
서릿발 같은 엄마의 차갑고 단호한 목소리에 당황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너무나 다른 엄마의 온도차에 새가슴이 되어 찌그러져 앉았다.
그 와중에도 아랫목을 찾아 앉은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애야, 니 오늘 성당에서 세례 받았다며? 엄마가 너 낳고 생긴 산후병으로 모두 죽는다 캤는데 천리교에 다니면서 살았는 거는 알제?"
그렇다.
우리 엄마는 사이비종교라고 지칭하던 '천리교'에 다니셨다.
그리고 죽음까지 갔던 병이 나으셨다.
수천 번 들어서 알고 있는 천리교 입교 히스토리다.
"그런데 니가 성당에 다니면 되것나? 한 집안에 종교가 2개 있음 집안 망하는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엄마는 기도문과 미사포를 낚아채고 다시는 성당 근처도 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지독한 모범생이었고 무엇보다 소녀적 낭만과 감상으로 세례를 받았기에 믿음이 싹트지 못했다.
눈물콧물 다 빼고 세상 가련한 크리스마스이브의 길 잃은 양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세례를 받으면 다음 날 성탄절 미사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족쇄령이 내린 나는 집 밖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고, 세례 후 첫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다.
교회의 표현대로 죄속에 살다가 친정아버지께서 암 판정을 받으셨다.
아버지께서 세례 받기를 원하셨다.
평생 믿어 오던 천리교를 하루아침에 버리고 엄마도 개종을 하셨다.
그렇게 친정 식구들은 모두 세례를 받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애야 니가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었다."
20년 전 크리스마스이브에 뺏겼던 기도문과 미사포를 내놓으셨다.
"엄마, 이걸 갖고 계셨다고요?"
"그래, 내가 비록 인간의 의리로 천리교를 배신하지는 못했지만 어쩐지 이것들은 못 버리겠더라."
나와 엄마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지금 구순이신 우리 엄마의 신심이 제일 크다.
평화방송에서 방영되는 미사를 하루에 4번 이상은 보신다.
엄마의 새벽은 가족의 평안과 건강을 기원하는 기도로 시작하신다.
역시 우리 엄마는 종교에 심취하는 성향을 가지셨다.
사이비 종교라지만 천리교 시절에도 얼마나 열심히 믿었으면 그 중한 병이 씻은 듯이 나으셨을까?
아버지가 하느님의 품 안으로 들어가시던 그 해,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다시 미사포를 쓰고 미사를 올렸다.
20년 전 미사포와 세례명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세례를 받았던 소녀가 중년의 나이가 되어 아빠 앞에 앉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베드로께서 부르는 기쁨의 나팔 소리가 천상에서 울려 퍼졌다.
잃어버렸던 한 마리 양을 찾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하늘에서 잔치를 여셨으리라.
두 분의 파파. 너무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잊을 수 없는 두 번의 크리스마스이브는 내가 요단강을 건널 때까지 나의 기억 속에서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