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쓸데없이 사람을 물렁하게 만든다. 내 키보다 몇 배는 더 클 트리 나무 위에 얹힌 오색 빛 전구들. 금방이라도 흰 눈송이가 뺨에 살풋 내려앉아 녹아버릴 것만 같은 경쾌한 캐럴. 말 많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후년을 기대하는 마음에 방방 뜨는 기분이 그러하니, 괜스레 주변이나 둘러보게 되겠지.
나는 지금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고 있다. 며칠 전, 의도치 않게 몇 작가님들의 랜선 와인 파티를 훔쳐본 것을 들켰다. 다정한 시트러스 작가님께서 내게도 그 파티에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어오셨지만, 아싸 기질이 다분한 나는 “저는 당신들처럼 개 쩌는 고오급 티(Tea) 찻잔도 없는 데다, 무식해서 와인 보단 소맥파인 것을요”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래 놓고 이런 글이나 쓰고 있다. 아, 참고로 사진에 따라져 있는 액체는 레드 와인인 척하는 펩제라임이다. 나는 혼술은 하지 않으니까.
늦은 밤 적당한 조명으로 조도를 맞추고, 다섯 시간짜리 광고 없는 캐럴을 틀어놓았다. 그 앞에는 내가 좋아하는 통통한 감바스가 있다. 감바스가 먹고 싶어질 때면 보통 밀키트를 사서 적당히 조리해 먹는 편이지만, 가끔은 하나부터 열까지 대접받는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굳이, 설거짓거리나 늘어날 게 뻔한데도 배달 용기에서 꺼내 보기 좋게 플레이팅까지 하는 것이다.
예쁜 조명과 커다란 화면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 앞에는 레드 와인인 척하는 콜라까지 둔 채, 나는 주섬주섬 노트북을 켜 아주 오랜만에 스팀 게임에 로그인한다. 그리고 익숙한 퍼즐게임을 설치해 접속한다. 작년까진 무료더니 갑자기 결제를 유도한다. 고얀 놈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9.99$를 결제하는 호구다.
어릴 적 나는 ‘갖고 싶지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구를 거의 거세당하듯 억눌려 자랐으니, 쓸모없고 비싸기만 한 퍼즐 역시 몇 번이나 미련한 얼굴로 뒤돌아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마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러니 아마 첫 자취를 시작해 조금 작은 원룸에 몸을 구겨 넣던 그 시절부터, 수선 떠는 미련을 회수하듯 퍼즐을 사다 모았을 테다. 나는 늘 제멋대로인 조각들을 잔뜩 펼쳐놓고 캐럴을 틀었다. 음악은 언제나 사람을 느슨하게 하니까.
며칠 밤을 새워 퍼즐을 완성하고 나면 “에구구…” 한숨 같은 소리나 흘리며 굳은 허리를 두들겨야 했지만, 나는 그럴싸하게 완성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혹여 지나가다 건드릴까 조심조심 까치발로 돌아다니면서도, 나는 완성된 그 모습을 일주일 남짓 흡족하게 바라만 보았다. 그리고 이만하면 됐다 싶은 기분이 들 때쯤 그것을 모조리 부수었다. 생산성 따윈 일절 찾아볼 수 없는 행위였으나, 그저 나의 작은 크리스마스 일탈이었다.
세 고양이가 일상에 끼어들면서 호기심이 왕성한 녀석들은 그 조각들을 얌전히 구경만 할 생각이 없는 듯했으니 조금 난해한 나의 일탈은 막을 내리는가 싶었다. 그런데 나는 집착이 좀 있다. 연말이면 손끝이 여간 간지러운 기분에 기어코 온라인 퍼즐 게임을 찾아내 실실 웃던 것이 재작년의 일이다. 어차피 부숴버릴 것인데, 그게 물성이 있는 것이든 0과 1로 이루어진 데이터 쪼가리든 알게 뭐람. 챱챱 조각을 맞춰 끼우는 맛이야 조금 덜하겠지만, 확실히 허리는 덜 아프겠거니 싶은 거다.
나는 욕심쟁이다. 어릴 적 시험공부를 하느라 밤을 새울 때, 밤의 적막이 무서워 백색소음처럼 텔레비전을 틀어두었던 것이 그 시작이었을까. 아니면 생계가 다급해 무리하게 직장과 아르바이트를 동반하던 때였을까. 그 시작점이 언제였는지는 이제 크게 중요하지 않지만, 나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마치 직장생활과 함께 늦깎이 대학 생활을 영위하는 현재처럼. 작은 사업을 함께 꾸려나가는 것 또한. 뒤늦은 미련에 십수 년 만에 다시 펜을 잡고 글을 쓰는 지금처럼 말이다.
그건 아마 오래 이루어지지 못했던 간절한 소원 탓이라 생각한다. 산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시렸던 여섯 살의 겨울에 이미 눈치채고 말았지만,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꼬박꼬박 같은 소원을 빌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 지독하리만치 염세적인 현실감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선 떠는 미련 같은 성미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그 어떤 것도 손에 쥐고 놓고 싶지 않은 욕심 많고 미련한 인간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늘 바쁘고 시간이 부족하다. 흔하디 흔할 숏츠 같은 것에 관심을 둘 시간과 여력이 있을 리 없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생산성 없이 시간이나 축내는 행위에 불과하니까.
어김없이 돌아온 크리스마스였지만 근래의 나는 어느 때보다 내게 가혹했던 터라, 해마다 반복하던 그 버릇을 올해만큼은 그냥 지나치려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한심해서 참을 수 없었다. 존재부터 부정당하는 기분에 하염없이 무너졌다. 그 끝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이 주저앉았다. 나 따위가 살아 내쉬는 숨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어 끝없이 스스로를 다그쳤다.
새로운 직장에서는 출근 이틀 차부터 프로젝트를 떠맡아 적응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야근과 특근이 밥 먹듯이 이어졌다. 화장실에 갈 시간도, 점심시간에 숨을 돌릴 여유도 없었다.
틈틈이 들어오는 주문에 대응하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학기 고사도 준비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눈앞의 기회 같은 것들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직접 책을 편집해 POD출간을 하고 난생처음으로 신춘문예라는 것도 써보았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이름을 올린 공모전만 해도 두 손을 다 써야만 세알릴 수 있다.
집까지 끌고 온 회사 일을 간신히 마무리한 뒤, 공부하고 글을 쓰고 누우면 새벽 네 시였다. 주말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쉴 수는 없었으니, 연속으로 굴린 몸뚱이가 이리저리 휘청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러다간 단명하겠다 싶어, 그 와중에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며 이직 준비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이 고작 한 달 동안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리멸렬한 나는 지독하게 조급했다. 나는 확실히, 나 자신에게 지나치게 야박했다.
그러니까 한량처럼 배달 음식이나 시켜 그럴싸하게 펼쳐놓고 레드 와인인 척 기분이나 내는 것도, 반짝이는 캐럴을 틀어 유유자적 퍼즐이나 설설 맞추고 있는 꼴도, 일시적이나마 그 마음을 관대하게 대하고 있는 셈이다. 비록 영 진도가 나지 않을 때면, 괜히 뜨개질이나 했다가, 새로운 공모전이 열렸는지 확인해 보고, 그러다 몇 줄을 적고 다시 닫는 꼴이 퍽 부산스럽기 그지없지만, 그 옆엔 언제나처럼 내 작고 하얀고양이가 다소곳하니 이 또한 휴식이라면 휴식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