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드리는 크리스마스 팝업북
루미엘 천사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품에 안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아... 이거 큰일인데...!”
투명한 눈처럼 맑은 목소리가 겨울 하늘에 스며들었다.
맞은편에서 오고 있던 상급 천사, 세라핀이 놀라 외쳤다.
"루미엘, 어딜 그렇게 뛰어가나? 그러다가 윽!"
두 천사는 정면으로 부딪쳤다.
부딪치는 순간, BI(Belief Index 동심 신념 지수)를 실시간 반영하는 은빛 입자가 서리처럼 공중에서 반짝하며 사라졌다.
“죄송합니다. 산타 신념 지수 보고를 지금 바로 올려야 해서요.
윈터 관리국 한국 지부 7세 이상 전담팀이 요즘 비상이라...”
"괜찮네. 자, 일어나게." 세라핀이 허공에 손짓만으로 가뿐하게 넘어진 루미엘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를 주워 건네주려다 내용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오... 이 상승 곡선은? 설마, 한국 지부에서?"
루미엘이 얼굴을 붉혔다.
"어... 그건 제 체중 기록표고요. '신박한 크리스마스 케이크'팀에서 최근 협업 요청을 많이 보내서..."
루미엘은 급히 손가락으로 옆 그래프를 가리켰다.
“여기, 이게 진짜 BI 지수예요.
특히 South Korea 지부는 모바일 기기 빛 간섭 때문에 지수가 낮았는데... 최근 좀 반등해서요.”
"그렇겠군. 어린이들이 온종일 빛나는 네모난 창만 들여다보니.”
두 천사의 눈동자에는 눈 덮인 들판 같은 순백의 빛이 스쳤다.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아직 PI(Purity Index 순수 지수)가 높은 아이들이 꽤 많아요."
루미엘은 손가락을 들어 저 아래, South Korea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저 집에는 어린이가 셋이나 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목소리를 낮췄다.
"저들 중 동생 둘은 아직 이빨 요정도 믿습니다."
세라핀은 놀라움에 '어머' 소리를 내며 입을 가렸다.
"김두희 어린이는 이를 아직도 색종이 상자에 넣어놨습니다."
'됐다, 됐어!' 세라핀은 루미엘의 어깨를 팡팡 쳤다.
"성탄절 전까지 계속 모니터링하지. 이 집이 올해도... 동심 안정권일지."
두 천사는 나란히 구름 위 가장자리에 서서 아래를 바라봤다.
은빛 눈송이가 둘 사이에서 반짝이는 먼지처럼 떨어졌다.
감정 공명 현상— 희망과 안도가 섞인 신호였다.
"엄마, 저 이제 많이 컸어요?"
세희는 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그릇을 정리하고 있는 내게 왔다.
그리고는 날 껴안았다. 보통 키를 재면 뒤통수를 대는데,
우리 집 어린이들은 이마를 들이댄다.
진지하게 머리로 내 배꼽을 밀고 있는 세희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참아야 했다.
"이야! 밥 많이 먹더니 그새 더 컸네! 어서 더 먹자."
세희는 다시 쪼르르 식탁으로 가서 붕대감은 손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어린이집에서 미끄럼틀을 슈퍼맨 자세로 타고 내려오다 손가락을 다쳤다.
다행인 점은 왼손을 다쳤다는 것, 다행스럽지 않은 점은 왼손잡이라는 것이었다.
12월생인 쌍둥이들은,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요즘 들썩거리고 있다.
11살 첫째 원희는 언제까지 산타를 믿었더라?
똑 부러진 아기였던 원희는 이미 5살에 크레파스로 엄마를 위로하는 편지를 쓸 줄 아는 아이였다.
아마 진작 눈치채고도 점잖게 모른 척했으리라.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쌍둥이 동생들도 뭔가 눈치를 채지 않았을까?
둘에게 넌지시 크리스마스 선물 뭐 받고 싶은지를 물어봤다.
"크리스마스 선물? 엄마 쩌번에 크리스마스 때, 택배 아저씨가..."
두희의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너무 바빠서 못 준거 산타할아버지가 줬잖아요."
"맞아요. 나도 봤어요. 엄마 운동화! 산타할아버지가 놓고 갔잖아요." 세희도 거들었다.
남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걸, 열심히 산타가 줬다고 했는데 그걸 믿고 있었다.
"나는 빨리 커서 손 낫게 해달라고 할 거예요."
손가락 골절 때문에 간 정형외과에서 '커야 낫는다'는 말을 세희는 진지하게 들었나 보다.
"그럼 나는 딸기랑 딸기 케이크요."
두희는 그냥 딸기가 먹고 싶은 어린이였다.
둘은 밥을 다 먹더니 편지를 쓴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언니 원희가 색연필을 챙겨 들었다.
"엄마, 말 잘 들어야 선물 받는다고 말해줄게요." 그리고는 작게 덧붙였다.
"어... 저는 아이폰...."
그릇을 치우며 나는 언제까지 산타를 믿었지?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집은 생일이며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집이 아니었다.
그저 연말이 되면 길거리가 빨강 초록빛으로 반짝이고,
어딜 가나 신나는 캐럴이 들렸던 것 같다.
대신, 어느 해인가 아주 또렷하게 기억나는 날이 있다.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날이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산타 할아버지가 다녀가셨다며 엄마가 뭔가를 내밀었다.
비닐에 싸인 원통형 보리과자 하나, 똑딱이 단추가 달린 하늘색 수첩이었다.
나는 그 선물이 너무 좋아서 한참이나 만지고 들여다봤다.
"엄마, 이거 진짜로 산타가 놓고 간기가?"
"하모! 어제 니 자고 있을 때 밤에 다녀갔지. 엄마랑 커피도 한 잔 마시고 갔다."
아, 나는 그 정다운 거짓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믿었는지.
때로 동심 속 세상은 부모의 성의 있는 거짓말로 지켜진다.
좀 더 커서 내게 남은 것은,
엄마가 날 위해 얼마나 정성껏 거짓말을 해주었는지에 대한 그 따뜻함이었다.
그것은 세상 속 숱한 사랑에 대한 동의어 중 하나일 것이다.
식탁을 다 정리하고 나니 아이들이 왔다.
각각 편지를 한 통씩 들고서였다.
"와, 편지 썼네. 산타 할아버지한테?"
"아니에요. 오늘은 엄마 아빠 거예요."
"글씨 틀렸는데 어, 언니가 두 줄 그으면 된다고 했어요."
편지 세 통을 잘 놓아두려는데 두희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엄마... 저는 이빨 요정한테도 썼어요." 빠진 아랫니 사이로 싱긋 웃었다.
아직도 산타와 이빨 요정을 믿는 아이들, 첫째까지 모두 불렀다.
다행히 여전히 셋 다 내 품에 쏙 들어왔다.
그 순수한 마음들이 오래오래 우리 곁에 있어주길 바라며
아이들을 꼭 껴안아주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성의 있는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다짐했다.
한참을 아이들을 안고 있는데, 창밖으로 아주 작은 은빛 먼지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역시, 이 집은 올해도 문제없겠어요."
루미엘은 슥슥 양피지에 뭔가를 기록했다.
세라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루미엘, 그 집 기억나나?"
"기억하죠. 그때 '진정성 있는 산타로 위장하기' 팀이었잖아요.
그날 마신 커피 진짜 맛있었는데..."
"집집마다 예산에 맞춰야 진정성이 있다고 보리과자랑 수첩...이었죠?"
"그렇지. 자네가 보리과자 두 봉지 주자는 걸 겨우 말렸지."
루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집 꼬마... 그 작은 선물을 얼마나 소중히 받아 들던지.
그래서 BI가 몇 년을 버텼죠.”
“그러니까. 이런 집이 있는 한, 우리 프로젝트는 계속 의미가 있지.”
두 천사는 양피지를 정리했다.
"신박한 케이크팀 같이 가실래요? 이빨 요정팀도 온다고 합니다."
세라핀은 투덜투덜, 상승 그래프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하늘 위에서
스노우 볼 속 눈송이처럼 반짝이는 눈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유리 안에 갇히지 않은 눈송이들이
그들의 웃음 소리와 함께
이윽고,
어떤 집의 창가로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