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찾아서
벌써 11월부터 일몰시간은 눈에 띄게 짧아져버린다. 제아무리 여섯 시 땡, 치자마자 사무실을 나서도 겨울의 퇴근길은 깜깜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겨울의 귀갓길은 여름의 그것보다 발걸음을 자꾸 재촉하게 된다. 오늘은 다 저문 것 같고, 그러니 어서 바삐 집에 들어가야 할 것 같고. 자꾸만 옷깃을 뚫고 들어오는 찬바람을 비껴내며 집으로 향한다. 바깥의 시린 추위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그곳으로. 겨울의 집이란, 그 얼마나 포근한 말인지.
강아지를 키우면서부터 낮시간에도 온도를 적절히 유지하기 때문에 거실이 그리 차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겨울밤이면 유난히 썰렁해지는 딸아이의 방을 데우기 위해 집에 들어서자마자 저녁에는 보일러 온도를 2도 더 높여 놓는다. 그리고 깜깜해진 거실 창에 커튼을 드리우고, 집안 여기저기 설치해 둔 크리스마스 장식의 전구 스위치를 딸깍 눌러준다. 이제는 눈에 익어 아주 익숙한 반짝임을 잠시 바라보며 숨을 고르면, 아, 집에 왔구나. 그렇게 안락한 저녁의 시작을 찾는다.
겨울은 여러모로 센티해지기 쉬운 계절이다. 일단 날이 추워지니 움츠러들게 되고, 창 밖의 세상은 조금 회색빛이다. 몸이 게을러지는 만큼 자꾸 생각이 늘어가고, 현실은 나른해진다. 그러한 상태는 안과 밖을 돌아보며 사유하기 딱 좋기도 하니 적정한 때에 끝맺음을 지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지만, 문제는 이 겨울이 길고 길다는 것. 서서히 침잠하다 보면 어느새 늪에 빠진 듯 사유에 잠겨 겨울의 미로에 갇혀버리고 만다.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 빛나는 신록이 까닭 없는 희망을 뿌려줄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태생이 명랑치만은 못한 사람이라, 겨울엔 일부러 바지런히 밝고 따뜻한 것을 찾아다니고는 한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잔, 계피설탕이 주르륵 흐르는 호떡, 빨갛게 달아오른 난로, 한 톨의 빛마저 산란시키는 흰 눈, 보일러가 따끈하게 돌아 절절 끓어오른 마룻바닥, 보드라운 담요를 옹기종기 나눠 덮은 가족의 체온... 이런 것들은 마주칠 때마다 일종의 샤이닝 포인트가 적립되는 것만 같다. 자꾸 가까이하여, 날씨 따라 깜깜해진 마음속에 드리워진 알전구의 스위치를 눌러준다. 알전구를 하나씩 하나씩 밝혀서, 일찍 어두워지려는 마음에 따스한 빛을 비춰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가 겨울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른다. (비록 나의 신앙은 얄팍하기 짝이 없지만) 이 추운 날에 인류에게 사랑과 구원을 전하러 신이 지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언제부터 그가 자선을 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린이들을 위해 늙은 할아버지가 선물 보따리를 메고 지구를 돈다. 온 세상이 반짝반짝한 장식을 매달고, 서로의 안녕을 묻고 또 기원한다. 그날을 기다리는 노래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조금씩 너그럽고 자비롭고 희망에 찬다. 크리스마스에는 뭐가 되었건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매년 겨울이 시작되려 하는 순간부터 나만의 크리스마스 보물찾기가 시작된다.
나의 크리스마스는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11월, 바람에 냉기가 돌기 시작하면 크리스마스 장식을 꺼낸다. 결혼하고 10년 넘도록 매년 조금씩 사모은 오너먼트 양이 상당하다. 요 근래 몇 년간은 나보다 아이가 트리 장식에 더 심취한 터라 통일된 미감 없이 유치하게 오만 오너먼트가 덕지덕지 붙은 모양새이지만, 그래서 더 정겹다. 모름지기 집 트리는 조금 어설퍼야 제맛이니까. (차마 아이에게 그건 너무 촌스럽다고 타박하지 못한 엄마의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미처 트리에 매달리지 못한 오너먼트들은 벤자민이나 녹보수 같은 나무에 조금씩 달아 두었다. 창가에는 겨우살이 모양의 가랜드를 드리웠고, 실내 정원 울타리에 매달아 둔 벽트리는 본래 벽난로 장식용으로 나온 것이다. 울타리 안쪽으로는 포인세티아 화분을 맨 앞으로 배치했고, 마지막으로 장식장 위에 스노우볼과 톰테 인형, 루돌프, 촛불 장식 따위를 올려두었다. 올해의 크리스마스도 이렇게 꾸며졌다. 집안의 크리스마스 풍경이 깊어가는 겨울 동안 포근한 안락함으로 가족을 감싸주길 바라면서.
집 밖에서 찾는 크리스마스 반짝임도 또 다른 작은 즐거움이다. 제각각의 포인트로 꾸며진 트리를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차가운 겨울 속에서 푸르른 상록수 그 자체만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기 충분할 것인데, 주렁주렁 매달린 반짝이는 오너먼트가 더해지면 묘한 설렘마저 더해진다. 자주 들르는 동네 카페에서, 요가원 창가에서, 쇼핑센터에서, 빵집에서, 교회 앞에서, 캠핑장에서... 올해는 어쩐지 트리의 반짝임이 유난히 반가워 새로운 트리를 마주할 때마다 찰칵찰칵 사진을 잔뜩 찍고 있다.
이 시기에는 누구나 그렇듯 작은 지출도 조금씩 생긴다. 아이와 남편에게 건넬 선물 꾸러미, 지인들에게 보낼 카드와 거기 붙일 크리스마스 씰(우체국에서 구매할 수 있다), 귀가 빨갛게 얼어붙을 때 즈음 마주치는 구세군 냄비(몇 년 전부터는 QR 태그가 가능해졌다), 설탕공예 장식이 올라간 크리스마스 케이크(플라스틱 장식은 법으로 금지했으면 좋겠다)... 하나씩 사모으는 것도 이 겨울을 웃으며 나게 해주는 보물 같은 순간들이다.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왔다. 올 연말에도 세상은 반갑지 못한 뉴스들로 시끄럽고 복잡하다. 이런 혼잡 속에서 우리를 웃게 하는 것은 우습게도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다. 크리스마스 전구의 반짝임, 조용한 캐롤송, 달콤한 간식, 작은 온정과 친절, 마주 보며 함께하는 웃음. 곰곰이 헤아려보면 존재해 준다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할 대상이 생각보다 많다. 그게 누구든, 무엇이든, 실재하든, 상상의 개념이든. 겨울의 한가운데서 가장 환한 불을 밝히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밝고 따뜻한 연말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