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기 대비
또 한 편의 흑백 영화를 찍으려 한다.
반세기를 거슬러 나의 초임 시절, 그때는 정말 엄동설한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집부터 구멍이 숭숭 뚫린 골다공증 환자에다 난방 시설이라 해 봤자 연탄불이 다였다.
그렇다고 옷이라도 지금처럼 밍크에 구스에 보온이 뛰어난 옷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부유층은 다 누리고 살았겠지만 지금처럼 보편화되지 않았다.
특히나 가난한 사회 초년생에게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렇기에 겨울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었다.
겨울의 낭만을 즐기기에는 일단 너무 추웠다.
원래 냉혈동물의 피를 타고 태어났기에 겨울 하면 '춥다'라는 단어만이 나의 의식을 지배했다.
오죽하면 겨울이 없는 나라로 이민 갈까를 매우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하와이? 캘리포니아? 아예 동남아? 아프리카라도?
겨울을 지내기 위한 준비로는 김장이 제일 먼저 시작된다.
요즘처럼 사시사철 푸른 채소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긴긴 겨울을 지내려면 김치 없이는 겨울을 날 수가 없다. 오죽하면 "김치 없인 못살아 정말 못살아."라는 김치송까지 등장했을까?
우리 집만 해도 5인 가족이었는데도 100 포기는 기본이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이 준비하는 과정도 만만찮다.
가을걷이가 시작되면 빨간 고추를 마당과 툇마루에 말리기 시작했다.
무공해 태양초였다.
그다음에는 튼실한 무를 사서 마당 한가운데 웅덩이를 파고 저장해 놓았다.
무는 김치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각종 국을 끓일 때에도 빠지면 안 되는 식재료였다.
딱 맞는 온도로 겨우내 무가 얼지 않게 보관해 주는 땅굴 저장고는 전기세 한 푼 들지 않는 효자였다.
또 하나 김치에 빠지면 안 되는 감초가 마늘이다.
우리 집 뒷마당 처마 밑에는 마늘이 접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쓰임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장 때가 되면 큰 양동이에 물을 가득 받아서 마늘을 불렸다.
그래야 마늘 까기가 수월하고 손도 덜 맵다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정작 나는 한 번도 마늘을 깐 기억이 없으니 우리 아버지와 엄마의 손을 얼마나 매웠을까?
"엄마, 다 큰 아들과 딸 좀 시키지. 왜 그렇게 안 시키셨어요?"
적반하장으로 퉁명스럽게 말하면 얼굴에 주름을 한가득 지으시며
"니들은 공부해야지. 집안 일 할 시간이 있남? 엄마는 하루 종일 놀고먹는데 그깟 일이 대수감?"
하루 종일 놀고먹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잘 알지만 나는 엄마처럼 안 살아 자식들 알뜰하게 시켜 먹을 거라고 큰소리쳤다.
그럼 나의 호언장담은 이루었졌느냐 하면 불행하게도 아니다.
나도 모르게 엄마의 성정이 공기처럼 스며들었나 보다.
시켜 먹으려고 하면 안쓰럽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엄마의 말을 그대로 복기한다.
업보다.
절임배추가 있기를 하나 그 많은 배추를 절이고 씻고 양념 준비하고 비벼 놓고.
말만 해도 숨이 턱 차 오르는데 우리 엄마는 그 많은 김장을 어떻게 하셨을까?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공부만 하라고 하신 엄마의 방침으로 나는 살림 밑천이 되지 못한 큰딸이었다.
김장 다음으로 월동 준비에 빠질 수 없는 것은 연탄을 창고에 가득가득 채우는 일이었다.
산수갑산을 갈지언정, 과부 속곳을 팔아서라도 연탄을 챙겨 놓아야 했다.
연탄 배달부의 검은빛으로 반들반들한 옷과 연탄을 까맣게 묻힌 얼굴은 혹한기를 이기게 하는 산타였다.
2인 1조로 내리고 던지고 받고 쌓는 묘기를 부리며 일사불란하게 착착착 쌓이는 연탄을 보면 어린 마음에도 배가 부르고 등이 따땃해졌다.
깡촌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나도 겨울이 오면 연탄부터 좁은 부엌이 터지도록 들여놓았다.
초임 발령받은 지 4년이 지나고 같이 자취하던 선배가 타 지역으로 전보 발령을 받아 떠났다.
썰렁한 방보다 더 춥고 황망한 마음에 나도 덩달아 내신을 냈다.
교감선생님이 충분히 갈 수 있는 학교라는 말에 무조건 내신을 썼다.
99.9% 발령이 날 거라고 장담하셨기에 주인집에게 연탄을 다 팔아 버렸다.
그런데 발령이 나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미 마음은 저 멀리 떠났기에 충격은 메가급이었다.
상심해 있던 나에게 선배가 농으로 한마디 던진다.
"정선생, 연탄 팔면 발령 안 난다는 전설을 몰랐어요? 그래서 발령 나고 연탄 팔아야 해."
이런 고급 정보를 이제야 주시다니 선배는 X맨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앙탈을 부리는 나를 짱구가 되어 쳐다보던 선배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덕분에 발령을 장담했던 교감선생님은 1년 동안 나에게 무한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은근슬쩍 삐진 척하며 특혜를 누렸다.
전화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