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기대비]이름 붙이지 않기로 했다.

그저 오늘도 보통날이다.

by Mooon

혹한기(酷寒期).

누구에게나 인생의 혹한기는 피해갈 수 없는 필수 과정이 아닐까.


아직 반백 살도 살지 않았지만, 버티는 것 자체가 시험이 되는 시기가 있었는지 돌아보면, 혹한기는 늘 나와 함께였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어떤 한 시기를 지나고 나면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생은 늘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능시험이 끝나고 친구들은 홀가분하게 놀러다닐 때, 혼자 미술학원에서 하루 3번씩 시험보며 달려야했던 대학입시를 치르던 시절, 졸업을 앞두고 미친 듯이 지원서를 써 내려가던 학부 졸업반, 회사에 들어가 처음 겪어본 현장에서의 밤샘 작업,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수많은 직원들 앞에서 한참을 욕먹고, 여자 화장실에서 혼자 서럽게 울던 신입사원 시절.


회사를 그만두고 들어간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어떻게든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한다며 혼자 초예민 모드로 꽁꽁 얼어 있던 대학원 졸업반의 나. 갓난아기였던 첫째를 시댁에 맡기고 졸업 논문에 매달리며, 시간이 아까워 하루 한 끼로 버티던 날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둘째가 유산되었다는 소식을 늦은밤 산부인과 응급실에서 듣고, 병원 앞 길바닥에 앉아 한참을 오열하던 그날까지. 학창 시절, 졸업, 취업, 결혼과 출산. 때에 맞추어 혹한기는 늘 함께였다. 마치 인생의 일정표에 미리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지금. 중학생 첫째와 초등학생 둘째를 둔 두 아들의 엄마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나’라는 브랜드를 키워가고 싶은 개인사업자로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도 혹한기는 여전히 낯설지 않다. 예전에는 혹한기가 오면 생각했다. 이 시기만 버티면, 이 고비만 넘기면, 언젠가는 좀 더 따뜻한 날이 오겠지. 그래서 늘 대비하려 했다. 혹한기 대비. 마음을 단단히 먹고, 체력을 비축하고, 감정을 접어두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혹한기와 흥황기를 굳이 구분해야 할까. 좋은 시기와 나쁜 시기를 나눠서, 좋은 날만을 기다리듯 살아야 할까. 가만히 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완전히 따뜻했던 계절’은 많지 않았다. 대신 추위 속에서도 해야 할 일들을 해냈고, 얼어붙은 손으로도 삶을 밀어 올려왔다. 그리고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혹한기를 피하거나 대비하는 삶보다 그저 어떤 날이 오든 내가 맞이해야할 보통날로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고 싶다. 오늘이 혹한기처럼 느껴지는 날이라면, “아, 지금은 이런 날이구나” 하고 인정하는 것. 괜히 의미를 붙이거나, 견뎌야 할 이유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되는 태도. 버티지 않아도 괜찮고, 잘 해내지 않아도 괜찮고, 다만 오늘을 오늘로 살아내는 것.


혹한기든, 흥황기든, 아니면 그저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보통날이든. 이제는 그 모든 날들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게 지금의 내가 도달한, 가장 현실적인 온기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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