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성적인 아이였다. 친구들과 함께 잡담으로 시끌벅적한 분위기보다는 혼자 구석에 박혀서 책을 읽는 것이 좋았다. 말을 하는 것보다는 글을 쓰는 것이 더 편안한 그런 아이였다. 그 시절의 집들이 거의 그렇듯이 우리 집에도 읽을 책이 없었다. 활자화되어서 나의 지적 탐구심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교과서 외에는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의 도서부원으로 활동하면서 독서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였지만, 책에 대한 동경과 아쉬움은 나의 청소년기를 지배하였다.
6학년 때 같은 반 친구 ⚆⚆가 있었다. 그 친구 집은 아랫장터에서 포목점을 크게 하였고 꽤나 부유한 집이었다. 그 친구의 집에 놀러 갔을 때 책꽂이에 가득 꽂혀 있는 세계명작동화를 필두로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이 가득 찬 것을 보고 충격과 함께 나의 설렘은 시작되었다. 우리 집에서 걸어서 30분 넘어 걸리던 꽤 먼 거리였지만 나는 그 친구 집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책 몇 권을 빌려서 집에 갖고 가서 읽은 후에 다시 되돌려 주면서 또 새로운 책을 빌려서 읽는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주말 저녁이었는데 나는 또 친구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친구는 엄마의 가게인 포목집에 있었다. 가게와 집이 5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주말 저녁에 눈치 없이 방문한 나를 본 친구의 짜증 섞인 말과 함께 냉랭함이 묻어나는 뒷모습을 따라갈 때 무참함과 비참함이 교차했다. 몇 걸음을 따라 걷다가 나 그만 갈게 하고는 뒤로 돌아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에 다시는 친구집에 책을 빌리러 가지 못했다. 아니 안 했다. 그 싸늘한 눈빛과 냉소적인 말투에 상처를 받았고,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심하게 난 나는 그 친구와도 절교 아닌 절교를 했다.
지금 그 친구와 입장 바꿔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나라도 짜증 났을 것이다. 내가 그 친구에게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그 정도의 수모? 는 당연히 참고 견뎠어야 했다. 하지만 옹졸하고 내성적인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지금 그 친구를 만난다면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마웠다는 말도 못 하고 멀어져 간 나를 용서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독서에 대한 아픈 기억은 있지만 대체로 나의 독서력은 살아오면서 내 삶을 지배했다. 집 안 구석구석에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부엌 식탁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화장실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신발장, 소파, 베란다, 침실...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종류의 책을 늘어놓고 그 장소에 마침 내가 머물면 집어 들었다. 읽는 것은 습관을 넘어 무의식이 되었다. 어느 장소를 지나치던지 활자화된 글씨를 보면 읽어야만 했다. 그게 비록 광고성 글이고 쓰잘데 없는 잡다한 내용일지라도 일단은 읽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런 나에게 한동안 독서의 암흑기가 찾아왔다. 바로 중년의 통관의례인 노안이라는 불청객이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아직도 1.0의 산뜻한 시력을 가졌지만 가까운 거리는 안개처럼 흐려 보이는 노안이 온 것이다. 비빔밥을 먹을 때도 비빔밥의 재료가 쨍쨍하니 잘 보이지 않아서 밥맛마저 떨어졌다. 돋보기를 난생처음 쓰면서 이제 할머니가 다 된 것 같은 심리적인 상실감마저 더해지니 나의 오랜 독서 생활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몇 장 읽다 보면 눈이 아프고 안 쓰던 돋보기로 인해 두통까지 생겼다. 차차 독서력이 뚝 떨어졌다.
노안을 핑계로 몇 년을 책과 담을 쌓고 살았다. 때마침 영상자료가 너무나 재미있는 것이 넘쳐 났고 너튜버라는 재미있는 세상이 나를 유혹했기에 책의 존재감마저 잊고 산 세월이었다. 게다가 "노세 노세 젊어 노세"를 외치며 지구촌을 무대로 내 발자국을 찍고 싸돌아 다니기도 했기에 책은 더더욱 내 손을 떠나 있었다.
모두가 노년이라고 하는 60대에 접어들면서-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쓰는 사람으로 살기로 하였다. 글씨를 뿌리고 책나무를 키우는 사람이 되고자 매일매일 도토리를 심는다. 그 첫행보로 책 읽기가 다시 나의 과업이 되었다. 역시 책 속에 길이 있다.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답도 있다. 그동안 소홀히 했던 시간만큼 더 속도를 내자니 마음이 급하다.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이 너무나 많아서 행복한 고민에 빠지지만 두 손에 책을 든 나의 모습이 이제야 나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