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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맛

by 정유스티나

눈물에도 맛이 있단다.

분노에 찬 눈물에는 짠맛이 나고,

행복에 넘쳐서 나오는 눈물에는 단맛이 난단다..

눈물은 그냥 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의 희로애락을 응집해서 나타내는 결정체이다.

눈물을 흠뻑 흘리고 나면 심신이 정화되고 카타르시스가 되는 이유이다.


난,

지독히도 눈물이 없는 아이였다.

살다 보면 울 일이 왜 없었겠냐마는,

마음으로는 슬프고 감동적이어서 피눈물이 나는데 어쩐지 눈에서는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동생과 싸워서 엄마한테 나만 혼날 때 억울해도,

시험을 망쳐서 지하 100층까지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친구가 내 마음을 몰라주고 다른 애한테 나의 험담을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나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입술에 이빨 자국이 나도록 앙다물고 손톱만 잘근잘근 씹었다.

왜 그랬을까?

울고 싶을 때 울지 못하는 이상한 병에 걸린 이유는 도대체 뭘까?

그래서 친구들은 넌 항상 웃는 걸 보니 참 행복한가 봐.라는 무례한(?) 속단을 한다.

나는 또 그것이 싫었다.

뭔가 센티하고 대체로 고뇌에 빠진 파리한 얼굴이 멋져 보이고 왠지 있어 보이는데, 나는 칠렐레 팔렐레 고민이라고는 없이 사유할 줄 모르는 형이하학적인 열등한 인간 내지는 심하게는 개돼지 같다는 자책에 돌아서며 내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때, 나도 나름 아프고 슬프고 사는 것이 시들해지는 시건방진 감정도 있었다. 분명.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닌데 어쩐지 그랬다. 내 눈물 없던 시절은.

'나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눈물이 안 나면 어쩌지?'

나름 심각한 걱정을 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천성이 회복탄력성이 상위 수준이고, 나의 자존감을 키워 주는 부모님의 양육태도가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억력이 심하게 낮다는 것이다.

어쩌면 고통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로의 회피일 수도 있다.

"눈물을 많이 흘리면 눈물 흘릴 팔자가 된단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 말이 각인되어 무의식적으로 제어장치를 발동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협영화에서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험난한 여정을 떠나고 일생을 바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속상한 일이 있거나 섭섭한 사람이 있어도 길게는 하루가 지나지 않아 욱했던 감정이 생각나지 않는다.

나도 모르게 말을 걸고 감추려고 해도 웃음이 삐져나온다.

이런 성정은 부부간에도 작동하여 난 잘못이 없는데도 늘 내가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손을 내민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불편했던 감정이.

에잇!


이랬던 내가,

굽이굽이 인생의 길을 가다 보니 눈물 날 일이 많이 생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그냥 슬프다.

하물며 어떤 일이 일어난 날은 어떻겠는가.

게다가 나에게 딸린 식솔들. 특히 자식들의 희로애락을 접하면 단 1초의 지체도 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어릴 때 한 걱정이 무색하도록 난 눈물이 많은 여인이 되어 있다.

인생의 시계가 석양을 향해 가다 보니,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난다.

나 어릴 적에는 뒹구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르 웃음도 같이 굴렀는데.

이만큼 사느라 애썼다.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는 눈물이리라.

한바탕 찔끔거리고 난 두 눈으로 본 세상은 말갛게 개어 있다.

응어리진 가슴의 체증도 눈물 한 방울에 사르르 녹는다.

가끔은 눈물 없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지만 울음 우는 내가 좋다.

파란 피가 빨간 피로 바뀌었나 보다.




눈물3.jpg




사나이는 일생 딱 3번 우는 거라는 폭력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남자도 여자도 이제 울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힘도, 앞으로 나아갈 희망도 생긴다.

우는 걸 약하다고 생각 말고 울고 싶을 때는 펑펑 울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울고 싶을 때는 꺼이꺼이 통곡해 보면 삶의 무게가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단 울면서 주저앉으면 안 된다. 실컷 운 다음 다시 우뚝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들장미 소녀 캔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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