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좌우명 1
꺾은 백 년을 넘어 진짜 백 년을 향해서 불철주야 쉬지도 않고 폭주하는 세월의 수레바퀴 속에서 작금까지 살다 보니 인생의 지표가 보인다. 별빛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조각배를 비추는 등대 같은 삶의 좌우명이 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차가운 북풍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이다'
오랜 세월 교직에 몸담다 보니 별의별 아이들을 다 만나고, 때로는 따끔한 훈육의 시간도 필요하다. 구슬려도 보고 나름 마음을 움직이는 감명 깊은 이야기로 대화를 시도해 보기도 한다. 열과 성을 다해 설득도 해봤지만 내 마음에 진정으로 사랑의 마음이 없이 하는 훈육은 울리는 징과 같다는 인생교훈을 알게 된 계기가 있었다.
꽃다운 22살, 한 학년에 두 반 밖에 없는 시골국민학교에서의 일이다. 6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옆 반 선생님은 40줄에 들어선 노련하신 선배선생님이셨다. 나는 햇병아리 초임교사로서 경험 없는 열정과 포용 없는 단호함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교육 과정은 곧 법전이었기에 과학 실험은 반드시 과학실에서 했고, 모든 교과에서 완전학습을 꾀하는 현실감각 제로인 왕초보였다. 문제는 체육 시간이었다. 당연히 교육 과정에 따라 진도를 나갔고 뜀틀, 매트, 배구, 체조, 축구, 보건 내용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수업을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왜 그래? 나는 너무나 당황하였다. 옆 반은 체육 시간에는 늘 축구를 한다는 것이다. 여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땅따먹기나 피구 등으로 자유롭게 노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특히 남자아이들의 반발은 극에 달했다. 우리도 체육 시간에는 축구를 하자며 삐딱선을 타면서 반항의 불손한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나의 교육 방침에 첫 번째 클레임이 걸린 것이다.
“얘들아 체육 이꼴(=) 축구가 아니야. 매번 축구만 한다면 체육 교과서는 왜 있는 거니? 그리고 너네들 점심시간마다 축구하대? 축구는 점심시간과 방과 후에 실컷 하잖아?” 아이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마음으로 승복하는 건 아님을 온몸으로 검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체육 시간 때문에 매일 입이 댓 발은 나왔고, 그 여파는 생활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수업 태도가 점점 흐트러지더니 숙제는 당연히 하지 않는 것으로 나에게 복수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나를 더 충격에 빠뜨린 것은 옆 반의 애들은 쉬는 시간에 늘 선생님 곁을 맴돌고 재잘재잘 웃음꽃을 피웠다. 내 곁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오지 않고 거리 두기를 하는 것으로 나에게 참담함을 안겨 주었다. 아무리 고매한 교육 철학과 대쪽 같은 소신이 있다 해도 사랑이라고 쓰고, 단호와 엄격함으로 읽는 나의 태도는아이들의 마음에 한 방울도 스며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열정과 원칙으로만 직진했던 초임교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차가운 북풍이 아니라 따스한 햇살이다
비록 나의 수업 방침이 옳고 선배 선생님의 수업 방침이 다소 파행적이라고 해도 결국 아이들은 따스한 품을 찾아든 것이다. 지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교육 과정을 탄력있게 운영하며 아이들의 갈증도 해갈해 주었을 것이다. 결국 한없이 믿어주고 기다려주고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햇살이 되어야 아이들이 안겨든다는 큰 깨달음을 얻고 아이들을 대하는 자세의 지각변동이 시작되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무지무지 어렵고 힘들다. 도를 닦는 수도자의 고행과 같기에 죽어서 화장하면 사리가 한 사발은 족히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빳빳하니 칼날을 세운 아이들의 언행이 봄날 새순처럼 야들야들해지는 순간들이 있기에 기꺼이 속상함을 감수한다.
젊었을 때는 잘 되지 않았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리셨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처럼 내 마음에 사랑으로 채워지는 데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흘러갔다. 세상의 이치를 아는 이순 고개를 넘으면서 조금은 수월하게 사랑이가 내 마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앉는다. 도도하면서도 차가웠던 북풍이 봄햇살을 닮은 편안한 얼굴로 아이들에게 둘러 싸인 훈풍이 되어 있다. 격세지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