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관식 씨?
관식 씨!
관식씨이이~
내가 오늘 하루 종일 남편을 부르는 호칭이다.
부를 때마다 남편은 마치 자기가 박보검이나 된 양 살짝 상기된 얼굴로 돌아보며 웃는다.
관식 씨~청소기 한 번 돌려주세요~
관식 씨~계단 청소 해야 하는데...
관식 씨~오늘 욕실 청소하는 날이잖아요.
일요일 오전에만 세 번의 관식 씨가 소환되었고, 그때마다 남편은 군말 한마디 안 하고 엉덩이가 가볍다.
관식 씨~가끔 방댕이를 팡팡 두드리며 헤헤 웃는 서비스도 날려 준다.
남편을 관식 씨로 만들어 주는 매직에 나의 입꼬리는 한껏 승천하고 마음은 몽글몽글해진다.
이것뿐이 아니다.
이 시계 저기에 걸면 돼?
화분에 물 줄 때 됐지?
옷 방에 널려 있는 옷 좀 정리해도 돼요?
내 귀를 의심할 달달한 문장을 구사하더니 지극히 자발적으로 집안일에 앞장선다.
평소의 우리 남편으로 말하자면, 내가 해 달라고 말을 하기 전에는 죽어도 그 일이 눈에도 귀에도 생각에는 더더욱 담겨있지 않는 양반이다.
게다가 반드시 본인이 해야 할 책임과 의무도 내 입에서 오더가 떨어지기 전에는 최대한 미루고 미룬 후에 겨우겨우 수행하시는 아주 팔자가 늘어진 양반이다.
그런데, 진짜 그런데, 남편이 관식으로 불리는 순간 그는 이미 관식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애정행각을 보며 4학년 손녀딸이 한마디 던진다.
“할아버지가 관식 씨면 할머니는 애순 씨인 거야?”
“그럼, 그럼. 할머니는 아이유야.”
왝?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한껏 들어 올리는 손녀도 용서된다.
오늘 일어난 행복한 기적의 근원은 바로 이것이다.
‘폭싹 속았수다’
나는 요즘 꿈 많고 요망진 애순, 팔불출 무쇠 관식의 사랑와 아픔을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앓이 중이다.
영어 제목 'When Life Gives You Tangerines'는 원래 'When Life gives you lemons'로, '인생에서 고난을 맞이했을 때'로 풀이되는 말. 이 드라마에선 'Lemons'대신 제주 감귤인 'Tangerines'를 썼다.
[출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작성자 나소공
제주 방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고,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따뜻한 성장 드라마이다. 아이유 배우와 닮은 애순은 문학소녀이자 기죽지 않는 당찬 반항아이다. 박보검 배우가 열연하는 양관식은 성실하고 우직한 무쇠 같은 남자,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순수한 물복숭아 같은 모습이다. 1960대부터 2025년까지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기에 더욱 더 공감이 가고 기억 저편 나의 이야기도 오버랩된다. 60년의 동시대를 살아 온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하셨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아서 따스하다. 울면서도 웃고, 웃으면서도 우는 인생 띵작이 나타났다. 작가가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베일에 싸인 시크릿 작가이다. 사실은 나야. 하고 얘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또 엉뚱이가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일요일, 가족들은 휴일의 향유인 늦잠을 즐기고 있는 새벽에 나 혼자 깨어있다.
‘폭싹 속았수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몰아보기 위해서 늦잠의 유혹도 물리쳤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유와 박보검 배우가 주연이기에 망설임 없이 1회를 클릭했다. 드라마를 보는 시간 내내 ‘미쳤다’를 연발하였다. 분명 영상을 보고 있는데 마치 텍스트를 읽는 느낌이었다. 첫 회부터 몰아치는 감동의 회오리에 적잖이 당황했다. 보는 내내 이 드라마 도대체 뭐지? 작가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이런 당혹한 슬픔과 북받치는 기쁨을 주는 거야? 시청하는 내내 계속 물음표만 머릿속에 가득 찬 시간이었다. 드라마가 끝나면 그때서야 느낌표의 발자국이 머리를 거쳐 가슴으로 내려와서 전신을 훑는다.
평일에는 시간이 없어 그동안 못 본 회차를 몰아보는 중에 역대급 눈물샘이 터졌다. 나는 꼭두새벽에 폭풍 오열을 하며 감동의 홍수에 빠져서 허우적댔다. 3회 차를 연이어 보다 보니 뿌옇게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 본 적은 없었다. 모든 장면과 대사와 내레이션이 심장을 후벼 판다.
두 눈이 토끼가 된 나를 보고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온 남편은 깜짝 놀란다. 남편을 보니 조금 진정되었던 눈물샘이 다시 둑을 무너뜨렸다.
여보, 너무 사랑스러워서 아파. 너무 아름다워서 슬퍼.
무슨 선문답 같은 흐느낌 소리에 나를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던 남편의 눈동자도 살짝 물기를 머금는다.
드라마는 전혀 보지 못한 남편이지만 나의 눈물앞에서 느낌이 전달되었나 보다.
그 이후 나의 남편은 관식씨가 되었고, 덩달아 나도 애순이가 된 것이다.
우린 이미 보검이와 이유의 외모까지 장착했다. 물론 마음으로만.
여보, 이참에 우리 개명하자. 어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