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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스티나 Jan 05. 2025

용역 불러

둘째 딸이 비혼을 선언한 지 5년이 지났다. 얘는 폭탄 발언을 자주 해서 심장이 뚝 떨어지게 한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독립을 선언하여 원룸으로 분가했다. 이번에는 비혼을 선언하여 우리 부부의 목덜미를 잡게 한다. 딸이 20대일 때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예로부터 3대 거짓말 중의 하나가 처녀가 시집 안 간다는 것이다. 엄마의 미모를 쏙 빼닮은 딸이기에 더욱더 ‘말이야 방귀야’ 했다. 게다가 시커먼 놈들이랑 찍은 사진이 스마트폰의 프로필을 도배하고, 이틀이 멀다고 약속이 있다며 늦는 걸 보면 아예 금남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세월이 5년이다. 이제 계란 한 판을 채우고 두 판을 향해서 열심히 나이를 쳐드시고 있는 딸을 보며 살짝 마음이 급해졌다. 이러다 진짜 노처녀 딱지 붙이고 영영 홀로 늙어가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일었다.

  10월의 어느 좋은 날, 홍대에 있는 핫한 와인 바에서 데이트 신청을 했다. 무슨 생각으로 비혼을 선언한 것인지 이유나 들어보려 함이다. 분위기 좋은 바에서 향기로운 와인과 고급스러운 안주를 곁들이니 사뭇 기분이 고양되었다. 연거푸 숭늉을 들이켜듯 두 잔을 완 샷 했더니 뾰족한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모든 것이 용서되는 너그러움마저 장착되었다.

  “딸, 비혼을 선언한 이유가 뭐니? 혹시 남자에게 심하게 덴 적 있니? 아니면 우리가 네게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못 보여 준 거니?”

  “아냐. 엄마 아빠만큼 행복한 결혼 생활하는 분 드물지. 그건 절대 아니야. 그리고 어느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명이 십시일반 했지. 남자란, 사랑이란 영원하지 않다는 진실을 진작에 깨닫게 된 거지.”           ”

  일단 우리 탓은 아니라고 하니 안도의 숨을 내쉰다. 그럼, 뭔데?

 “결혼이라는 제도가 여자에게 얼마나 불리한 줄 알잖아? 내 부모에게도 효도를 못 하는 데 갑자기 맺어진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고, 얼굴도 못 본 조상들 제사도 다 지내야 하고”

  “그거야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니까 사랑하게 되는 거지. 마음이 내키지 않은데 억지로 하는 건 아냐. 물론 내 부모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요즘은 시부모가 도리어 며느리 눈치 보며 상전으로 모신다더라.”

  “그건 그렇다 치고, 난 내 일이 너무 재미있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남자 만나 연애한다고 시간 낭비, 정력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이팔청춘은 아니지만 꽃다운 나이에 반드시 해야 할 지상 과업이 청춘사업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나라를 구해야 하는 독립운동을 할 시대도 아니고, 독재정권 타파를 위한 민주화 운동을 할 것도 아닌데.

  근데 엄마, 외국인하고 결혼해도 괜찮아? 뜬금없는 딸의 질문에 난 당황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럼~네가 결혼 안 하고 혼자 늙어가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그럼, 흑인도?”

  순간 3초 동안 멍했다. 외국인이라면 당연히 백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선입견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난 더 결연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아. 너를 평생 사랑해 주고 행복하게 살면 상관없어. 혼자서 처녀로 늙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우와~울 엄마 엄청나게 진보했네? 그렇게나 내가 결혼하기를 원하는 거야?”

그럼 그렇고 말고 나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엄마가 물을게. 내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얼마 못 살아. 그런데 내 소원이 네가 결혼하는 것이야. 넌 어떻게 할 거야?” 네가 이래도 결혼 안 한다고는 못 하겠지? 이제는 내가 듣고 싶은 답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고, 엄마. 재수 없어. 왜 그런 예를 들어. 흠, 그렇다면 용역 불러야지. 신랑, 신랑 부모, 하객들. 돈이 좀 깨지겠는걸?”

 헉! 의기양양하게 브이를 그리는 딸의 강펀치에 완전 넉 다운되었다.

내 머릿속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뎅 뎅 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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