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침 10시에 취하는 모임
싱겁게 먹는 식성과 무얼 먹어도 다 소화시키는 장을 가진 나는 아빠 판박이다. 딱 하나만 빼고. 그건 바로 ‘간’이다. 아빠는 조상 때부터 일명 술통인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정작 딸인 나는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뻘게지는 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 내가 미술대학에 입학해서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게임을 하며 아침까지 살아남아 취한 친구들을 다 귀가시키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술을 마시는 분위기 자체가 잘 맞지 않아서 일 년에 한 번도 술을 먹지 않는 내가 아침 10시부터 와인을 마시게 되었는데 늦게 배운 도둑질이 더 무섭다 더니 이제는 밤늦게 작업을 하거나 글을 쓸 때 와인이나 모스카토를 한 잔 씩 마시며 하게 되었다. 오늘도 와인잔이 예뻐서 라는 변명을 하며 슬그머니 한 잔을 따라 작업방으로 들어왔다.
한 달 전 그날도 아침 등원 후 갑작스럽게 애기 엄마 몇몇과 커피타임을 가지게 되었는데 수다 속에는 12월이라는 설렘과 곧 졸업이라는 아쉬움이 섞였다. 코로나가 심해져 앞으로는 더 만나기 힘들어질 것 같아 우리는 다음날에 6명 모두 모이기로 약속을 했다. 다음 날 아침 코로나 검사 키트를 하고 모인 6명의 손에는 과일과 디저트, 커피와 와인 그리고 달달한 모스카토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각종 치즈와 올리브, 훈제연어가 들어있는 와인 안주세트와 파스타를 시키고 6잔의 와인잔을 부딪혔다. 그때가 아침 10시. 와인 모임의 시작이었다.
남편의 출근과 아이의 등원이라는 전쟁을 치르고 모인 엄마들은 짭짤한 치즈맛에도 조금은 진한 올리브의 맛에도 그저 웃음이 났다. 시간은 째깍째깍 빠르게 흐르고 커다란 와인병은 하나 둘 비었고 그만큼 웃음은 커졌다. 12시가 지나니 둘째 하원 시간에 맞춰 나가야 하는 언니와 오후 출근을 하는 언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후로 하나 둘 아이 픽업과 일 업무로 일어나다 보니 2시에는 모두가 파티를 끝내게 되었다.
나도 아이를 픽업해서 놀이터로 향했다. 칼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 놀이터에서 열심히 놀아주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를 씻기고 밥을 하고, 밥을 먹이고 정리를 하고 아이를 재우고 나니 밤 10시.
나는 작업방으로 들어와 즐거웠던 아침 10시를 떠올렸다. 좋은 와인을 확인하는 방법은 와인병 바닥에 움푹 들어간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서 깊게 들어가면 좋은 와인, 얕게 들어가면 그냥 그냥 와인이라는 언니의 말에 모두들 유레카를 외쳤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집에 돌아와서 집에 있는 와인병을 집어 들고 하나하나 움푹 들어간 부분을 확인해보았다. 그리고는 6명 모두가 그러고 있을 상상을 하니 작게 웃음이 터졌다.
나는 이날 ‘모스카토’라는 술을 처음 먹어봤는데 그 후로 내 인생의 최고의 술이 되었다. 달달한 맛이 음료처럼 느껴지다가 몸이 따뜻해지면서 아 술이구나 느껴지는 와인.
얼굴이 벌게지고 웃음이 실실 나오고 마음속 깊은 곳이 따뜻해지면서 아이의 투정도 즐겁게만 느껴진 그날은 내가 모스카토 한 잔에 마음이 깊이 취했나 보다. 아침 10시에 취하는 모임이라니. 너무 낭만적인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