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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Oct 18. 2022

봄날의 귀동

코도 납작한 것이 크기는 쥐새끼요, 생김새는 수달이다.


귀한 외동



아직 눈도 못 뜬 누런 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나의 천재적인 작명 센스가 다시 한번 시동을 건다.


"귀동이 어때?"

"귀동이...?그게 뭐야....?"

"멍충아! 귀한 외동이라는 뜻이잖아!"

"아하..!?"


썩 맘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귀여움(+5)과 뜻(+10)을 모두 아우른 네이밍을 뒤집어엎을 묘수를 생각해 내지 못한 남편의 -썩 맘에 들어하진않았지만-컨펌을 받아 그렇게 귀동이는 귀동이가 되었다. 근데 귀동이가 누구냐고요?




고양이의 사정



수술을 잘 마친 남아들과 함께 마당에 방사하자 뒤도 안 돌아보고 쏜살같이 도망가 버린 양자였다. 야속한 것. 그 후로도 한동안 남편 그림자만 봐도 질색하고 뒷걸음질을 설설 치는 모습에 남편은 조금 시무룩한 눈치다.'나 같아도 임신했는데 중성화시킨다고 끌고 가면 그럴 만도 하겠다' 양자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우리로써도 '몰랐지 않느냐, 그래서 매운맛 좀 보지 않았느냐' 정도는 할 말이 있었다. 하지만 고양이와 인간의 사정은 이리도 다르니 어쩔 수 있겠는가. 고양이의 마음이 풀리는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고양이의 사정은 그렇다 치고 인간들은 할 일이 태산이다. 양양이와 양평이의 중성화도 마무리 지어야 했으며 원남이가 쓰던 겨울 집을 주워다가 조금 정리한 후 안에다가 방석을 깔곤, 바람이 불지 않는 간이창고 한켠에 산실도 마련해 주어야 했으니 말이다. 일주일쯤 되었을까. 우리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샐쭉샐쭉- 코가 길어지던 양자가 어느새 잘 보이지 않더니, 이윽고 아침 일찍 출근한 직원분에 의해 출산 소식이 들려왔다.


여고생처럼 상기된 얼굴로 달려가 보니, 공장 고양이 아니랄까 봐 아늑한 산실 내버려두고 기름기 가득한 자재 창고에서 출산을 한듯했다. 도무지 어디에다 낳았는지 찾을 수가 창고 안을 찾아 헤매다, 조그마한 자재 박스 안에 구겨지듯 몸을 뉘이고 젖을 먹이고 있는 양자와  '뉴페이스'를 만날 수 있었다.




딱 한마리



태어난 지 1일 된 고양이를 처음 보게 된 우리. 입술을 오물오물 가만히 두지 못할 만큼 압도적 귀여움에 무릎에 힘이 풀린다. 노오란 털이 마르기도 전에 어미의 그루밍 세례를 받았는지 뽀돌뽀돌한 돌기마냥 뭉쳐있는 털까지도 이리도 귀여울 일인가. 코도 납작한 것이 크기는 쥐새끼요, 생김새는 수달이다. 신체의 어떤 부분도 혼자서 가누지 못하겠는지 어미 배 위에서도 비틀비틀하다가 벌러덩 뒤집히기도 하고, 머리를 털 속으로 쑤셔 박고 이리저리 밀어대며 젖을 찾는다. 한참을 침을 질질 흘리며 귀동이를 쳐다보고 있으니 양자의 코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했다.-심기가 불편하단 소리다-.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존재가 우리 공장, 기름때 가득한 자재 창고에 강림했단 사실에 감격에 잠시 젖어있다가 흐르는 침을 닦으며 조심스레 퇴장했다.



"한 마리네."

"그러게 한 마리여."



못해도 세 마리 이상이라고 했던 의사 선생님의 진단과는 달리 딱 한 마리였다. 혹시 초보 엄마가 새끼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 게 아닌가(?) 싶어 있을 만한 곳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한 마리만 낳았다면 나름대로 럭키일수도 있다. 새끼 고양이들은 귀엽지만 모두를 책임질 순 없으니까 말이다. 양양이도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기에 불안함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임신이 아니었다.(휴) 이로써 가임기의 암컷 두 마리와 수컷 세 마리. 도합 다섯 마리의 TNR을 마쳤고, 그중 임신한 녀석은 한 마리로 1마리의 새끼만 출산. 우당탕탕 TNR 대작전은 나름 괜찮은 점수를 기록하며 막을 내렸고 귀한 외동. '귀동'의 탄생의 막이 올랐다.



어미 냥이와 아는 사이 아니면 절대 이렇게 만지시면 안 됩니다. 장갑 필수!(전 손 소독했어요 ㅠ)





은밀한 회동




초봄의 한가운데서 태어난 귀동.


아침저녁으로 바람은 서늘했으나, 햇살은 따사로웠고 공장의 흙바닥을 이불 삼아 배를 까고 디굴대고 있는 고양이를 구경하고 있노라면 월세 한 푼도 안내는 놈들 주제에 팔자가 제일 폈다 싶어 약간의 질투도 난다. 그렇게 녹색의 봄이 한창이었다. 양자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지만 길냥이는 길냥이인지, 출산 후 경계심이 더욱 커졌다. 때문에 우린 아주 운이 좋은 날만 귀동이를 볼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부담스러웠는지 우리에게 목격될 때마다 어김없이 귀동이를 이소 시켰다. 귀여운 누렁 수달을 볼 수 없음이 무척 아쉬웠지만 귀동 역시 길고양이로 살아야 할 운명. 손을 태워봤자 집에 데려가 집 냥이로 키울 수도 없고 잡아다가 무리하게 입양을 추진할 마음도 없었다.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하며 기다리는 시간 동안 바람은 따스해졌고 푸르름이 더욱 만발하던 한참의 봄.


양자의 외출시간이 조금씩 길어지기 시작했다.

양남이와 양양, 양평이랑 투닥대며 뒹굴고, 밥 먹다가 햇빛 쐬고, 사무실 앞에 자리를 잡고 형제들과 뭉쳐 잠을 청한다. 이게 원래 모습이긴 한데. 너는 애가 있잖니? 양자의 길어지는 외출에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던 나는 귀동이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알아서 어미가 잘 키우겠거니 했지만 혹시라도 아파서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다면 안될 일이지 않은가. 공장 마당을 가로질러 구석으로 발을 옮기자 저 멀리서 양자와 양남이가 쭐레쭐레 따라온다. 나는 양자에게 괜히 "야 이시키야. 애는 어따두고 너 혼자 이렇게 오래 돌아다녀? 애 밥은 먹이냐?"라고 힐난해 봤지만 다리 사이에 몸통을 비벼대며 딴청을 피운다.

그렇게 번번이 귀동 탐색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공장을 헤매이며 "시키들아.니네 새끼 좀 찾아봐."윽박질러도 이 두 놈들은 어디 맛난 거라도 숨겨놨는가? 하는 표정 천진하게 따라다니며 착실하게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이것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겠다. 포기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찾아보자. 하는 마음에 다시 공장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어라, 양자가 앞장서며 걷는다. 꼬리를 바짝 세우고 총총거리며 걷다가 이내 내가 잘 따라오는지 한 번씩 뒤돌아보며 체크한다. 신기함 반. 기대 반으로 양자를 따라가니 공장 귀퉁이 아주 낡은 기계 안에서 삐융 삐융 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내 찰팍찰팍 잔디를 어설프게 밟는 소리가 나더니 훌쩍 큰 아가귀동이 나타나 나를 보곤 흠칫 놀라 다시 뽀로로 숨어버린다. 양자는 그렇게 나에게만 귀동의 보금자리를 허락해 주었고, 나는 양자가 허락할 때마다 주머니에 꾸역꾸역 캔을 꾸겨 넣고 은밀한 회동을 이어갔다.


봄날의 추억이다.




꾸질꾸질 귀동. 생후 1개월쯔음. 혼자 젖을 독차지했는지 무척 오동통하다



사실 아빠가 누군지 모르겠으나 유난히 양남이가 챙기는걸로 봐서 양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래 보고 있으면 이렇게 코가 점점 길어집니다.




귀동이가 무척 따르는 양남. 뭐가 몬지도 모르고 그저 좋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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