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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Mar 25. 2023

원망스럽지만 고마운 우리의 젊음이여.

평범한 일상은 언제나 예고 없이 바스러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밝았다.



구정이 다가왔다. 아빠가 13  입원하셨고 2020년도의 연휴는 24일부터 시작했으니 열흘 정도가 훌쩍 지나간 셈이다. 시아버지의 작고   5년간 꼬박꼬박 지내던 제사를 시할머니와 어머니의 협의 아래 폐지한 이후 처음 맞이한 프리덤 명절이었다.  열흘 전만 해도 여행 계획으로 들떠있었는데. 해외여행은? 개뿔이다. 국내여행? 언감생심. 언제 울릴지 모르는 간호 데스크의  때문에 외출도 부담스러웠고, 극심한 불안증&노이로제에 점점 심신이 쇠약해지고 있는 나는  발자국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휴가고 나발이고. 뭣이 중한? 그저 하루하루 제에발- 아빠가 ''사고 치지 않고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뿐.. 때문에 입원 첫날,  여행 가는데 보태라며  아빠의 100 원은 용도를 잃은  방황하다  고통을 함께 짊어져달라 암묵적으로 부탁하는 뇌물이자 아빠는 당신의 책임이기도 하다.라는 협박을  담아 엄마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아빠가 마지막 제정신으로  챙겨놓은 소중한 100 원의 주인은 그렇게 못마땅해하던 엄마가 되었다.

인생은 이토록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기억을 더듬어 쓰는 이야기라,  굵직한 에피소드만 적었지만 , 시간의 사이사이에도 꾸준한 별일들이 있었다.

몇 가지 적어보자면


1.

(뜬금없이 남편에게) 안서방. 우리 앞으로 친해져야 하니 서로 별명으로 부르기로 하자. 너도 날 아버님이라 부르지 말거라.

"그럼 뭐라 부르나요?"

"용이라고 부르기로 하거라."(아빠의 이름 끝자가 용)

“..??”

이런 엉뚱스러운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하기도 하고.

2.

전화를 자주 안 받으니 어쩌다 통화연결이 되면 우리를 불러내기 위한 거짓말이 점점 격해졌는데,

'어딘가에서 피가 터져서 죽을뻔했다.

'어딘가가 아프다. 당장 와라. 너무너무 아프다’라는 식이다.

그 소리를 듣고 한 걸음에 달려가 상태를 확인하면  언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멀뚱하게 앉아있는 아빠. 간호사는 그런 적이 없다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멍청하게 (?) 속은 대가는 아빠의 역정과 이야기 들어주기가 되었는데, 하루에 몇 번씩 속고 속임을 당하며 이유 없이 화내고 짜증 내는 아빠를 달래는 스킬도 조금씩 늘어가기 시작했다. 서로의 카톡에는


"오늘의 상태는?"

"오늘은 별로 화 안 내심. 대충 달래주고 옴"

/

"통화했음?"

"응 오늘은 많이 짜증 내시더라. 내일은 나도 아버님한테 안 따지고 끝까지 들어드리는 걸 목표로 해야겠어"

등등의 브리핑이 우리 부부대화의 대부분을 이뤘고, 소소한 별일들을 겪어가며 자연스레 아빠가 이상해졌다.라는 믿기 싫은 진실을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건들을 시간대별로 기록하기 위해 대화기록을 뒤적거려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우리  밝은 편이었네? 싶다.   빼고 모든 시간이 불안함으로 가득했고, 삶을 버텨냈다고 밖에 설명할  없는 나날들이었지만 나름 농담도 섞어가며, 앞으로의 계획도 조금씩 세우고 있었고 서로의 감정도 배려해 주며 밸런스 있게 절망과 일상을 섞어가며 살았구나! 싶어 그때의 내가 새삼 대견스러워졌다. 어쩌면 우리가 어리기 때문에 그럴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들었는데, 다른 노인 환자 병상엔, 다들 50~60대의, 어느 정도 연륜과 경험이 있어 보이는 중년 보호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우린 너무 생뚱맞게 어렸고,  어설펐다


 노란 탈색 머리에  체구가 작은 나는 의사 간호사 할 거 없이 처음 본 순간부터 손녀라고 단정 지어져 안내를 받았고, 남편은 내 오빠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의 핸디캡이었고 억울했다. 제삼자의 시선에서도 한참 어려보이는 우리가 주보호자가 되어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고난이 아닌가. 신이 있다면 콘스탄틴처럼 뻐큐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우리의 젊음은 고통도 함께 짊어가줬다. 어설픈 만큼 빨리 습득했고, 어린 만큼 회복이 빨랐다. 서른넷이라는 애매한 나이가 원망스럽고 억울했던 나만큼 아빠 역시 새파랗게 어린것들에게 (?) 모든 걸 맡겨야 했으니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니 이런 생각까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는데, 이것은 남편의 역할이 컸다. 꾸준한 지지자이자 동반자인 남편. 아빠의 전화 폭탄과 면회 1시간 벌칙을 받아내면서도 짜증 한번 안 내고 참 많이 의연했고, 어른스러웠다. 


그렇게 하루는 울고 하루는 웃으며 보낸 열흘. 뭔가 일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끼신 시어머니가 명절연휴 전날 우리 집으로 오셨다. 어쩌다 보니, 각 집안의 아버지들이 부재 상태라 엄마들은 허울 없이 친해졌고 새벽 내내 고스톱도 치고 맛있는 것도 해 먹으며 명절을 맞이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엄마들을 보며 당연하지만 조금은 귀찮게 여겼던 과거의 시간들이 떠오른다. 명절 연휴는 항상 우리의 신혼집으로 아빠를 초대해 함께 보냈는데, 작년 명절엔  일부러 당뇨에 좋다는 돼지감자로 만든 떡으로 떡국을 끓여 내었고 남편은 인터넷에 레시피를 검색해 정성껏 뚝딱거리며 만든 불고기를 선보였다. 만족스러운 식사 후 미지근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으흠흠~하는 콧노래를 부르시며  거실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셨던 아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우리 집 복슬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습은 덤으로.


이제 그 자리에 아빠는 없다. 아빠가 저 자리에 다시 앉을 수 있을까?

평범한 일상은 언제나 예고 없이 바스러진다. 아깝고 아쉬워도 그 조각들을 모아 주머니에 잘 넣은 뒤 다시 새로운 일상을 살아야 한다.

나에겐 그 바스러진 조각들이 아빠 같아서 자꾸 삐죽삐죽 튀어나와 마음을 할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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