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킹덤의 폭군 왕
아빠가 이상해진 이후로부터 혹시 치매 아냐? 라며 호들갑을 떨긴 했지만 속으론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전문의 입에서 "치매검사"라는 단어가 나올 때의 충격은
허무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결과 발표(?)에 앞서, 왜 굳게 아니라고 생각했는지에 대해 설명하자면 나의 아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리 부녀는 조금 독특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일단 50살의 나이 차이도 그렇고, 나의 들끓는 애증도 그러하다.
39년도 전라남도 군산 중앙동 유복한 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난 나의 아빠는 광복과 6.25 모두 스친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할아버지는 지병으로 일찍 작고하시고, 할머니는 홀로 음식점을 하시며 집을 꾸려나가셨다는데, 시대상과 맞지않게 딱 둘만 낳은 것도, 혼자서 남매를 키워낸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억척스러웠으나 또 꽤나 고고한 면이 있는 양반이었고 아빠의 고등학교 시절 사진을 보면 그런 할머니가 애지중지 귀하게 키운 막내아들 티가 났다. 꼬들꼬들 마르고 아담한 키의 남자 고등학생들 사이로 키가 훌쩍 크고 덩치 큰 남자가 뽁 솟아있었는데 그게 바로 아빠였다. 압도적인 피지컬이 돋보이는 청년. 거기다 혼자 뜬금없이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고등학생 주제에 말이다!!
난세의 풍파를 비켜나가며 과거에도 현재에도 있는 집 자제들만 배운다는 악기-트럼펫-을 불었으며 고교 악단장, 해병대 군악대까지 할 정도로 소위 '잘 나가는' 청년이었다.
그런 우리 아빠는 언제부터 인생이 꼬였을까?
내가 태어난 건 87년도, 강남구 개포동에서다. '강남'타이틀이 무색하게 우리 집은 가난했다. 21살,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주정부리던 사촌어른에게 입수한 정보로 보자면 고모와 아빠가 차례대로 집안 기둥을 날려먹었고 어찌어찌 남은 돈으로 아빠와 할머니만 서울로 상경해 터를 잡게 되었는데, 아빠의 사업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였다. (아마 할머니의 마지막 재산을 거기에 올인했음이 틀림없다) 어릴 적 기억이 나는 시점에서부터 살고 있던 반지하 월세방에는 언제나 장판에 물이 울컥거리며 스며올라오고, 곰팡이와 바퀴벌레가 우글거렸고 나를 구박하는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는 내 목욕담당을 자청할 정도로 날 이뻐하면서도 조그마한 실수에도 버럭 화를 내기도 하고, 여기저기 꼬집거나 빨가벗겨 밖에 내쫓기도 하는 히스테릭한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언니가 갑자기 '친엄마'를 따라서 미국으로 간다며 급하게 짐을 싸서 떠나버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언니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던 나날 속에서 재혼이라는 개념을 배웠다. 그렇다. 우리 집은 재혼가정이었고 부부에게 각자의 자식이 있었으며, 나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딸이었으니 언니는 집안에서의 입지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언니는 가족들과 심심찮게 대립했었는데 거센 반항의 끝은 아빠의 체벌이었다. 엄마의 증언으로는 진짜 복날에 개 처맞듯 맞았다고 한다. 아빠가 체력적으로도 한창때였을 테니, 이 집에서 아빠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30대 후반의 엄마, 한참 꼬맹이였던 나, 힘없는 노모가 무슨 힘이 있었겠는가? 아빠는 그렇게 작은 월세 집 반지하 킹덤에 폭군으로 군림하였고 언니가 떠나고 한참 뒤 공포정치에 질릴 대로 질린 엄마마저 집을 나가버렸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졸지에 싱글대디가 돼버린 우리 아빠는, 나만큼은 언니처럼 키우지 않겠노라 결심한 것 같지만, 어린 나이에 엄마가 사라져 버린 딸은 생각만큼 고분고분하게 자라주지 않았다. 언니의 선례를 겪고 인고의 시간을 통해 아빠는 무릎 꿇려 훈계를 하는 단계까진 왔으나 울컥할 때마다 여기저기 때려버리거나 고함을 질러대는 그라데이션 분노로 암흑진화를 하였고, 나는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폭언과 매의 공포에 눌려 살았다.
엄마는 늘 아빠와 다툰 후엔 어김없이 화장실로 들어가 어린 나를 껴안고 한탄했다. 저렇게 무책임하고 능력 없는 남자는 처음 본다고. 당시 미용실을 하고 있던 엄마의 가게 옆에 조그맣게 사무실을 빌려 온갖 신기한 잡동사니를 모아놓고 사업을 하던 우리 아빠. 사기를 당해 갑자기 중풍을 맞아버리고 구안와사로 눈과 입이 돌아가는 바람에 집에 드러눕게 되면서 엄마가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다. 그때 나이가 사십 중반쯤 되었을 테니 엄마 인생도 참 격하게 인생이 꼬였다고 할 수 있다.
집안의 푼돈까지 끌어모아 차린 운영하고 있던 미용실을 처분하여 아빠 빚 갚는데 쓰고, 반지하 킹덤에서 그나마 넓은 공간이었던 거실을 미용실로 탈바꿈해서 손님을 받기 시작했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진 미용실 손님을 받고, 퇴근하면 피자집 주방에서 일하고, 집에 와서는 아빠랑 할머니 밥을 차려주며 말도 안 되는 집구석을 겨우겨우 꿰매어가며 살았다. 그런 엄마를 아빠는 늘 무시하고 구박했다고 한다. 어디 나가서 엄마가 주목받는 걸 못 견뎌했고, 상대적으로 살림살이가 괜찮았던 외가에서 괜히 허세를 부리다가 망신당하기도 일쑤. 사촌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빠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화내고 짜증 내는데 쓰지만 가끔은 유머러스하고 너그러워질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부부의 사이의 기류가 말랑해질라 치면 작은방에서 큼큼-소리를 내며 '아이고 다리에 쥐가 나서 못 살겠다'하며 울부짖는 할머니가 분위기를 성공적으로 조져놓았다. 할머니의 특기는 이간질이었는데, 아빠는 단순했고 할머니는 똑똑했다. 그래서 엄마 아빠의 사이는 늘 좋지 않았다. 처지가 심란할 때면 '너 까짓 게 돈을 벌어오면 얼마나 벌어온다고 유세를 부리냐'라며 하루종일 일하느라 발바닥에 진물이 들러붙은 마누라를 들들 볶는 12살 많은 남편과 이쁜 구석이라곤 없는 뱀 같은 노인네 둘이 집구석에 앉아 입을 쩍쩍 벌리며 엄마만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에겐 삶이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 엄마가 울면서 이젠 더 이상 이렇게 못 살겠다고 할 때 난 도리어 엄마를 위로했다고 한다. 엄마에게 동화되어 버린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빠를 미워했고, 그 미움은 30대까지 지속된다.
돈 벌어다 주는 가장이 사라지자, 가세는 극단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집세도 밀려 쫓겨나기 직전이었는데 얼마나 어려웠냐면 화장실 물이 아까워 변깃물을 내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다행히 어린 딸을 혼자 키우는 모양새가 안타까웠는지 아빠의 친구들이 옷가게라도 해보라며 돈을 투자해 줬고 집 근처 작은 오피스텔 상가에 작은 옷 가게를 열었던 건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이였을 거다. 아빠는 그렇게 사장님에서 또 사장님이 되었다. 아빠는 한 번도 '노동자'로 살아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다. 돈이 없어 자식과 부모가 허덕일 때 어디 공사장이라도 가서 돈을 벌어올 법하건만 아빠의 자존심은 절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사장님, 회장님이란 달콤한 호칭으로 아빠에게 아부하던 후배들에게 번번이 사기당하고 뒤통수 맞으면서도 아빠는 성실한 노동자보다, 가난한 자영업을 선택했고 그의 선택으로 나는 늘 빈곤과 함께 해야 했다.
정리해 보자면 아빠는 곱게 자란 철부지 도련님으로 결론 난다. 할머니의 과보호. 그리고 집착스러운 사랑을 받고 자란 우리 아빠는 나이 60이 넘어도 자립하지 못했고
부인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았던 중년기, 딸과 사위의 부양으로 살던 노년기까지 크게 남에게 구박 한번 안 받아보고 적당히 가난하지만 큰 풍파 없이 살았다.
그것도 복이라면 복이겠지. 평생을 땀 없이 산다는 것도 부나 명예에 관계없이 타고난 사람들이나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중학교 2학년 때 드디어 반지하 킹덤에서 벗어나, 세 식구가 10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었는데 정부 복지 차원에서 저소득층에게 싼 가격에 계약하게 해주는 임대 아파트인데도 아빠는 특권을 받은 양 아주 만족해했고 그곳을 벗어나 더 넓은 집으로 가고자 하는 욕구도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아빠는 82세까지 그 아파트에서 살다 요양병원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아빠의 꿈은 뭐였을까? 아빠는 뭘 하고 싶었을까?
항상 과거에 본인이 잘 나가던 건달이었던 시절(아니었음), 주먹으로 군산을 제패했던 시절(제패 못했음) 다들 본인을 우러러보며(안 우러러봄) 따랐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살았는데, 과거를 그리워하고 업적을 부풀려 추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현생이 별 볼일 없기 때문이기도 하므로, 아빠도 사실은 알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항상 한방이 터지면 내 인생은 역전될 거라고 자신 있게 외쳤는데 역전될 인생이 있긴 했던 걸까? 아빠와 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해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아빠. 좀 더 좋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요? 아빠를 위해서가 아닌 가족을 위해서요.
아빠와 지독하게 싸우면서 살았다. 남들이 중2병을 감기처럼 앓았다면 나는 중병처럼 앓았다.
내 성격이 엄마를 닮았다면 (아빠에겐) 좋았을 것을 불행히도 아빠와 판박이였고 한번 언성이 커지면 동네 사람들 다 몰려올 정도로 싸움닭처럼 달려들었다.
인생 늘그막에 15살짜리 딸내미가 눈깔을 뒤집으며 달려들었을 땐 아빠도 참 막막했을 거다. 그러나 아빠는 상담이나 주변 조언을 통해 이런 콩가루 오 분 전 가정을 타개해 볼 만큼 다각도로 삶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고 나름대로의 '격한'방식을 통해 자식을 컨트롤하려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평생 못 잊을 수많은 쌍욕을 들었고, 아빠도 상처를 많이 입었는데 그중 제일 크리티컬한 대미지는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집을 나가 1년을 연락 두절로 산 게 아닌가 싶다. 도저히 참다못한 아빠가 나를 마구잡이로 때렸고, 막느라 팔목에 실금이 갔고, 그 길로 가출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중3이 되어 수업수불충분으로 이전퇴학까지 당하며 아는 지인의 집에서 함께 지내던 1년은 부모의 마음을 다 찢어놓은 한 해가 되었는데 내심 통쾌했고 지금까지도 후회는 없다. 그렇게 모두에게 민폐를 끼치며 종잡을 수없이 반항하며 살던 내가 집으로 다시 돌어간 계기가 있었는데, 처음으로 아빠가 진심을 다해 무릎을 꿇고 제발 이러지 말라며 , 나를 보며 아이처럼 엉엉 우셨던 그때였다.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아빠의 약한 모습을 보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감정이 들었다.
그렇게 돌아와 함께 살면서 우리 아빠는 이기적이고, 허풍이 있으며 짜증과 화를 잘 내지만 , 무능한 사람일 뿐이지 극악무도하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결론이 설 때 즈음, 나는 어느덧 성인이 되어, 아빠를 부양하며 살기 시작했고. 그렇게 14년이 흐른 지금 아빠의 치매검사를 앞둔 딸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