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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북 Apr 18. 2023

내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part -2

부재와 존재는 결코 노력으로 떨쳐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같은 환자들도 많이 있나요?




오늘도 아빠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눈만 꿈뻑꿈뻑거리며 침대에 누워있다. 그리고 그 옆엔 오늘도 한숨을 폭폭 쉬어대는 내가 있다. 꾸준하게 일상적인 나날들. 아빠의 난동으로 불려 온 것까지 완벽하다.


퇴원 이틀 전.

이날은 두 번째의 액팅 아웃 전화를 받은 날인데 이번엔 기저귀를 갈아주던 간호조무사분을 때렸다고 했다.

짜증 섞인 표정의 조무사에게 첫 액팅아웃 때처럼 하염없이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고 있으니 옆에서 보고 있던 수간호사가 그냥 싫다고 반항하는 과정에서 손이 실수로 스친 거 같다라며 설명을 해주었다. 첫 번째도 그렇고 두 번째도 그렇고 상황과는 별개로 폭행이라는 단어는 모든 걸 압도할 만큼 공포를 준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또한 아빠의 매콤한 왕주먹은 스치듯 지나갔다 해도 약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의도가 있건없건 상관없다. 결과적으로 아빤 사람을 때린 거고 상대방은 아팠겠지. 두 번째 겪는 일이지만 덤덤해질 수가 없다. 좌절 절망 그 잡채다.


대체 무엇이 그리 싫어 사람을 때렸나 하고 상황을 살펴보니 예상되는 지점이 보였다. 이번엔 기저귀다.

기저귀 교체 작업은 아빠의 기분에 따라 난이도가 굉장히 들쭉날쭉했는데, 케어 인원 대부분이 여성 조무사들이기에 인지가 맑은 날은 수치스러움을 강하게 느끼는 듯했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 싫다고 때렸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마음에 침상 옆에서 대기했다. 액팅아웃이 또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시간이 되니 과연 여러 명의 여성조무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목욕을 하지 못하는 와상환자들을 위해 건샴푸와 젖은 수건 등으로 위생관리도 해주고 로션도 발라준다. 그 시간에 기저귀도 갈아주곤 하는 듯 보였는데 아빠의 액팅아웃을 경고하러 닫힌 커튼 쪽으로 발길을 향하는 순간 "아이고 고급호텔 부럽지 않습니다~이렇게 깨끗하게 해 주시니 제 기분이 무척 좋네요. 감사합니다 껄껄~"라며 넉살 좋게 농을 치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기저귀 케어는, 인지에 따라 어느 날은 본인을 싫어하는 악의 무리의 부당한 공격으로, 어느 날은 응당 받아야 할 고급 서비스로 번갈아 인식되는듯했다. 쨌든, 때려놓고 혼자만 웃으면 뭐 해? 이미 분위기는 싸했고 나는 민망했다.




자꾸만 자기 옆에 좀 앉아보라고 재촉하는 아빠의 요구를 가뿐히 무시하곤 복도로 나가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 데스크에 서 있던 중년의 수간호사와 눈이 마주쳤다. 보호자로서 대부분 젊은 간호사와 이야기할 일이 많았지만 이렇게 사건이 터질 때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간호사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피로함이 역력한 시선과는 온도차가 있는, 연민 섞인 시선이 나를 향할 땐 살짝 위로도 되었는데 그래서 용기 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나도 모르게 수간호사에게 다가가 질문을 했다.


"수간호사님은 지금까지 많은 환자를 보셨을 테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많이 특이한 케이스인가요? 그렇다면 이런 환자들은 어떻게 케어를 해야 하나요?"


처참한 심정이 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왔던 자기 위로의 진화일까. 그날따라

'어르신 같은 환자 많아요, 너무 무서워 말아요. 다들 이러시는데요, ' 등의.. '너는 생각보다 유별난 케이스가 아니란다.라는 식의 말을 듣고 싶었다. 평범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단 소리를 들어야 퇴원 이틀을 남겨둔 내 마음에 안식이 찾아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어서 들려온 수간호사의 답변은 늘 그렇듯,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 아버지를 소개합니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 두 번째.



초등학교 때부터였을까. 남들과 조금 다르다고 느낀 걸. 나는 항상 왜?로 시작되는 의문을 허리춤에 꼬리처럼 달고 다니던 꼬맹이였다.

절단 나기 일보 직전이었던 가정환경과 가난은 내 부모에게 자식의 교육까지 신경 쓸 여유를 주지 않았다.따라서 부분적 방임과 함께 나는 조금 띨띨한 애로 자라나갔다.


음악시간. 다들 익숙하게 치는 피아노를 나만 못 쳤다. 왜? 악보를 못 봐서.

수학시간. 구구단을 못 외운 애들만 남는 '방과 후 부진아반'에 남겨져서 항상 놀림을 당했다. (트라우마 때문인지 아직도 구구단은 나의 적이다. 구구단을 해치우자.)

나의 신발주머니 속 실내화는 제때 세탁되지 않아 늘 꼬질꼬질했고 수업준비물은 항상 안 가져와서 친구들에게 빌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숙제라는 걸 매일매일 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선생님이 무서운 얼굴로 숙제 안 해온 애들 손들어! 라고 하실 때마다 내심 '다른 애들도 안 해왔겠지?' 하고 손들면 나밖에 없었던 그런 기억이 있다.(참고로 우리 동네는 강남8학군 안에 포함되어 초교 때부터 교육열이 강했던 가정들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림은 곧잘 그리는 편이었는데, 딱히 배우지 않았어도 번번이 상을 타왔고 재능 있다며 칭찬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배우지 않아도 얻어지는 것이 있고, 그것들은 태어나는 순간 랜덤하게 할당되는 줄 알았다. 구구단을 외울 줄 안다거나 피아노를 칠 줄 안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왜 우리 아빤 할아버지지? (태어나자마자 아빠 스펙 = 50대 대머리)"

"왜 우리 집은 반지하지? (동네 분위기상 친구들의 집은 대부분 단독주택이었음)"

"왜 우리 집은 차가 없지? (아빠 면허취소당함)"

"왜 나는 비 오는 날 엄마가 오지 않지? (엄마 집나감)"


꾸준한 의문을 거듭하다 '아 난 좀 뒤떨어진 아이구나. 할당받은 것이 많지 않은 아이구나 ' 하며 스스로 결론 냈다. 그렇게 '무한 WHY'를 멈추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 언더그라운드 라이프에 익숙해진 꼬맹이에게 확실한 비주류의 삶을 교육하기 시작한 건 아빠였다.

아빠 역시 평범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장난감 하나를 사주더라도 남들과는 약간씩 다른 걸 사가지고 왔다. 기억나는 것이 몇 있는데 하나는 초등학교 4학년때였을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아이템이 있었는데 헤어피스가 양 끝에 달려서 착용하면 '영턱스클럽'이나 'SES'같이 길게 늘어진 땋은 헤어포인트를 연출할 수 있는 헤어밴드였다.  친구들이 너도나도 그걸 쓰고 다니길래 "아빠! 나도 저거 사줘"하며 며칠밤을 졸라댔고 드디어 아빠가 사 온 건 금발 피스가 달린 헤어밴드였다. 한번 학교에 하고 갔다가 대차게 놀림받고는 방구석 어딘가에 처박아버렸다. 또 스티커 사진이 한참 유행할 때 다이어리 뒷면에 붙이기 위해 사진을 교환하는 것이 그 시절 초딩들의 소셜네트웍이였는데 보통은 이쁘게 입고 귀여운 표정, 윙크, 손가락 브이 이런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평범함을 거부하는 아빠의 코칭으로 인해 (더 많은 웃음!! 더 많은 미소!!) 나는 조커처럼 입만 쭉 찢어져 촌스럽게 웃고 있는 사진을 줘야 했고 사진을 본 친구들이 표정이 왜 이러냐며 낄낄대는 통에 한동안 소셜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사랑을 주는 방식도 남달랐는데 비유를 해보자면 '폭식'같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빠 이 과자 맛있당!!!"하고 좋아하면 아빠는 뭔가 깨달았다는 듯 그다음 날 똑같은 과자를 한가득 사 왔다. 그러나 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서. 어떤 날은 씨알도 안 먹히는가 하면 어떤 날은 몇 날 며칠을 그 과자만 먹고 연명해도 될 만큼의 양을 사 오곤 황당해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곤 하는 식이다.(이것은 꽂히면 올드보이마냥 하나만 먹어대는 나의 식습관에도 영향을 주었다.)때문에 종잡을 수 없었다. 방이 정리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내가 아끼던 물건들을 싹싹 빌던 내 앞에서 다 때려 부수다가도, 세일러문을 좋아하지 않냐며 일요일 낮 용산으로 데려가 원화엽서를 삼만 원어치나 사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옷가게를 하는 아빠로 인해 중-고딩까지는 아빠취향이 강하게 반영된 새벽시장표 옷과 신발을 신었어야 했는데, 그 취향이라는 게 가히 시대를 앞서나간 유니크의 정점이었다.





그렇게 어딘가 특이한 아빠는 나 역시 특이하게 키웠고 그리하여 우리 부녀는 '보편적'단어와 점점 멀어져 갔는데 성인이 된 이후로는 그 특이함이 몸서리치게 싫고 거북스러웠다. 도태된 자들에게 붙는 낙인 같은 느낌이라 누군가가 "너는 참 특이하구나" 하면 칭찬보단 모욕으로 흡수되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부단히 노력했던 것 같다. 아빠와의 마찰도 최대한 줄여가며 흔한 효녀 딸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아빠를 부양하고 사는 성실한 딸의 모습이, 말만한 처녀가 고령의 부친과 매일매일 박 터지게 싸우는 모습보단 훨씬 평범의 범주에 속할 테니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억장 터질 일도 많았다. 노력은 했지만 싸우기도 많이 했다. 이십대 초중반에는 그로 인해 삐져나오는 날것의 감정을 숨기지 못해 주변 사람들에게 보일 때가 많았는데 그때 잠깐 만나던 남자친구가 했던 말이 잊히지가 않는다


"너는 왜 그렇게 아빠랑 싸워? 너네 아빠랑 싸운 이야기 지긋지긋해. 좀 비정상적인 거 아냐?"


그 말을 듣고 적잖은 충격에 빠진 나는 더욱 은밀하게 내 특이한 가정사를 , 고양이가 모래 속에 똥을 덮듯 깊숙한 곳에 묻어 숨겼고 딱 보기 좋을 만큼만 손질해서 전시했다. 이십대의 노력은 삼십대에 빛을 발했고 평범한 인간의 정석이라 볼 수 있는 남편과 결혼을 했다.

드디어 평범한 가정과 평범한 삶을 얻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불안하게 삐쭉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얼추 보편적인 삶의 형태라는 테두리 안에는 위치한 거 같아서 마음이 놓였으나


"환자분이 유독 특이하세요.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이런 환자분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라는 수간호사님의 답변을 듣자 내가 그리 힘들게 쌓아 올린 평범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듯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긴 시간 동안, 이 넓은 병원에, 수많은 환자들 중 우리 아빠가 진상원탑이라니! 알량한 안식을 위해 불편한 진실을 증명받고 나니 기가 막힌다.


역시

내 인생은 평범할 수 없구나. 싶어 좌절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속 시원했다.

부재와 존재는 결코 노력으로 떨쳐낼 수 없는 것이구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나의 삶이고 아빠의 삶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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