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빤 알까 내 마음을. 사실은, 제발 몰랐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그래서 응급실의 풍경도 전과는 사뭇 다르다. 보호자는 환자 옆에 오래 머무를 수 없고 대기실에 앉아 병상이 배정될 때까지 일분대기조 상태로 있어야 했다. 아빠의 검사가 1차적으로 끝나 응급실 내 병상배정을 받았으니 필요한 준비물을 사서 들어오라는 간호사의 전화에 기저귀, 물 티슈, 패드 등을 사서 응급실로 향했다. 아빠의 보호자로 산 지 15년 차. 이제는 준비물은 눈 감고도 챙긴다.
병상으로 들어서니 간호사가 아빠의 기저귀를 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나도 함께 들러붙어 영차영차 하는 소리까지 내며 간신히 다리 한쪽을 올리는 데 성공했는데 이제 화낼 힘도 없는지 축 늘어진 채 간호사에게 몸을 맡기던 아빠가 나의 인기척을 느끼곤 부끄러운지 윗옷 자락을 힘없이 잡아 내리는 모습에 마음이 욱신한다. 그 뒤 간신히 들어 올린 엉덩이에 붙어있는 오물찌꺼기들을 보자 참기 힘든 슬픔이 몰려왔으나 아빠의 엉덩이를 힘껏 들어 올리는 걸로 일그러진 표정을 겨우 감춰냈다.
진물이 흐르던 다리의 상처는 봉와직염-심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처치하러 온 의사가 정강이 위에 올려놓은 드레싱붕대를 걷어내자 심각하게 곪은 상처들이 드러난다. 2개월 전 첫 입원 때부터 면면하게 아빠를 괴롭히던 상처들이 낫지 않고 계속 나빠지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아이고..’ 하는 한숨소리가 들리자 지레 찔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건만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부모를 방치한 나쁜 자식처럼 보이진 않을까 의사의 시선을 자꾸 피하게 된다. 각오하고 들어섰지만 조그마한 한숨에도 힘없이 무너지는 마음. 비참하다.
처치가 끝나고 다시 대기실에서 한 시간. 간호사가 다가와 아빠에게 폐렴 증상이 보인단다. 열이 오르고 염증수치가 높아지고 있어 응급실에서도 안쪽에 위치한 집중 관리실로 옮겼다는 소리에 힘없는 발걸음으로 찾아들어가니 편안한 표정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아빠가 순하디 순한 눈빛으로 밥은 먹었냐, 고생스럽게 계속 여기 있었냐는 둥 사람 눈물 나서 돌아버릴 것 같이 착한 말만 해댄다. 우리는 다시 예전의 애틋하고 다정한 부녀 사이로 돌아와 있었다. 감정이 손바닥 뒤집히듯 오락가락한다. '애증'내가 아빠에게 갖는 감정을 유일하게 정의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그 뒤 아빠는 집중 관리실에서 또 이동을 하셔야만 했는데 다음은 음압 병실이었다. 영화에서나 본 투명한 벽이 쳐져있고 하얀 타일바닥과 웅웅 대는 음압기 소리가 가득한 그곳에 아빠가 멀뚱한 표정으로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진 보호자 면회가 불가능하단 말에 방역복을 입고 음압 병실로 들어서 병실 배정전 응급실에서의 마지막 면회를 한다. 아빠는 마치 재미있는 소풍을 온 것처럼 이곳저곳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여러 번의 이동에도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내가 음압 병실 밖에서 손을 흔들면 아빠도 함께 흔들어줄 만큼 여유도 있었고.
음압병실에서 나와 방역복을 벗고 있으니, 멀치감치서 응급실 의사가 다가와 아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 염증수치가 매우 높고, 심부전으로 인해 심장기능저하. 저혈압이 심해 장기 부전까지 오고 있는 위중한 상태라고. 이 와중에 고열과 폐렴 증상까지 겹쳐 상황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다는 말과 함께, 연명치료 확인 서류를 내어주셨다.
아빠가 혼수상태 등이 되었을 때 CPR이나 에크모 등의 의료 행위를 할지 말지에 대한 동의서이다.
고민 끝에 나는 동의란에 사인을 했다.
아빠의 검사가 모두 끝나고 입원이 결정되기까지, 장장 9시간여의 시간이 걸렸다. 아빠는 일반병동이 아닌 중환자실로 가게 되었다.
ㅇ병원에선 보호자가 지정 1인만 가능했기에, 응급실에 들어간 순간부터 오롯이 아빠와 나. 둘만의 시간이었고 그건 중환자실도 마찬가지였다.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1시간 동안 한 명의 보호자만 면회가 가능했기에 입원시간 동안 아빠의 주보호자를 결정해야 했다. 남편은 자기가 가는 게 낫지 않겠냐며 물어봤지만 아무리 멘탈이 가루가 되었어도 이 시간만큼은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것임을 안다. 그렇게 사흘동안은 내가 아빠를 케어했고 덕분에 나를 짓누르던 묵직한 죄책감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던듯싶다.
중환자실 입원 D+1
오후 5시쯤. 추가적으로 필요한 준비물을 사서 중환자실로 들어섰다. 입원소속과 준비를 하기 위한 아주 짧은 면회. 아빠의 안색을 살피니 오랜 기다림으로 피로함이 가득 찬 나와 달리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였다. 최첨단 장비들에 둘러싸여 안락한 케어를 받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이제야 자신을 고쳐줄 제대로 된 병원에 왔다고 생각했는지 감격 어린 탄사가 연신 터지고 아빠의 진면목을 모르는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까르르 거리며 웃어주는 걸로 아빠의 텐션을 더욱 높여 주었다. 입원 당일의 아빠 모습은 내가 사랑하던 예전의 철없는 긍정왕 대머리로 돌아와 있었다. 손을 흔드는 아빠의 손을 꼭 잡아준 뒤 ‘내일 일찍 올게~’ ‘ 그래그래 우리 딸 조심히 가’라는 사랑 가득한 대화를 나누곤 병원을 나섰다. 귀가하는 택시 안. 몸과 마음이 모두 녹초가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아빠가 아무도 없는 집구석에서 혼자 아파하진 않겠지 하는 마음에 잠시나마 다디단 쪽잠을 청할 수 있었다.
중환자실 입원 D+2
면회시간이 9시다 보니 집에서 출발하려면 새벽에는 일어나야 한다. 아침 일찍 서둘러 준비하고 눈곱도 못 땐 체 병원으로 향하는 길. 아빠가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 흠칫 놀란다. 순둥 해진 얼굴로 잘 가라며 손을 흔들던 아빠가 밤새 그리워서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한달음에 중환자실로 향한다. 병원에 입원한 이래 거의 처음일 정도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활기차게 들어서 아빠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는데 나를 보는 아빠의 얼굴이 심상찮다. 아빠의 희끗한 눈이 나를 위아래로 요기조기 훑더니만 이내 낯선 얼굴이 되어선 눈이 간재미처럼 쭈욱 찢어지는 것이 아닌가. 일그러진 얼굴로 알 수 없는 손짓을 해대는 통에 아빠의 팔에 붙어있는 엄청난 개수의 링거 줄들도 함께 흔들렸고 내 시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그래?"
"아..아휴...너는..아휴...아..아휴.."
아빠의 표정은 거의 울기 직전이 되어있었다.
"왜 아빠 뭐가 불만인데 그래.."
"너는 여기 오면서 아무것도 안 사가지고 왔냐? 앞에 아줌마 딸은 과일도 가져오고 빵도 가져오고 뭘 잔뜩 사 왔던데 넌 뭐냐?"
"아니 뭘 사 오고 싶어도 아빤 금식이야.."
"됐다!! 에잉 쯧!! 몹쓸 것!"
오자마자 짜증을 뒤집어쓰고 어안이 벙벙해진 나에게 간호사분이 "섬망이 오신 것 같아요." 하며 소근댔다. 저놈의 지긋지긋한 섬망. 밤에도 소리를 많이 지르고 힘들어했다는데, 중환자실에서의 섬망은 일반 병실에 비해 그리 큰 문제가 아닌지 보호자 호출도 없었고 대수롭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아빠가 본격적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했으므로 어젯밤 깔깔대며 맞장구를 쳐주던 간호사들의 태도가 조금은 경직된 게 느껴졌지만 ㅅ병원보다는 좀 더 관용적인 분위기였고 나도 적응이 되었는지 큰 충격은 없었다. 이 정도면 선방이지 뭐.
그 후 나는 요양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코로나 대응방침으로 집에서 입원하는 노인들을 받지 못한다던 썬의 시아버지가 계신 요양병원이다. 간호부장에게 현재 아빠가 ㅇ병원 중환자실에 있고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고 하니 '언제든지 오셔도 되죠~팩스로 의사소견서만 한 장 보내주세요'라고 간단명료한 답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쉽게 입원 허가가 떨어지니 지옥을 거니는듯했던 한 달여간의 시간이 떠오르며 바싹 긴장하고 있던 몸이 풀린다. 면회종료 전 때마침 회진을 돌고 있는 주치의에게 소견서를 요청하니, '잘 결정하셨다. 환자분은 무조건 요양병원에 입원하셔야 한다'라고 말을 해주셨는데,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병원 중환자실 순환기내과 의사의 의견도 이렇다면 나의 강박적인 죄책감을 조금 덜어내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견서는 굉장히 빨리 받을 수 있었고, 퇴원은 이틀 뒤로 정해졌다. 집에 간다 인사하는 나에게 아빠는 여전히 짜증만 냈고 그 모습에 애써 덤덤하려 돌아섰지만 발걸음이 끈적하다.
중환자실 입원 D+3
그동안 쌓인 피로에 지쳐서 늦잠을 잤고,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면회시간이 끝나 들어갈 수 없었다.
사실 짜증 가득 차오른 대머리 할아버지를 보기 싫어서 늑장을 부렸는지 모른다. 이쁜 짓 할 땐 우리 아빠고 미운 짓 할 땐 대머리 할아버진가? 편할 대로 휙휙 바뀌는 마음에 스스로가 환멸스러웠으나 이것 또한 익숙해져 버린 양가감정이다.
어쨌든 내일은 아빠의 퇴원 날이다. 의사 소견서를 확인한 요양병원에서 이송차량을 보내겠다는 연락이 왔다.
통화를 종료하고 중환자실에 연락하여 내일 오전 중 아빠에게 약간의 수면제를 투여해 달라 부탁했다. 혹시 모르는 이송차량에서의 난동을 줄여보기 위해서다. 고전하던 문제들이 하나둘씩 풀어지며 일처리에 속도가 붙는다. 의사가 연하장애가 심한 상태니 위루관(뱃줄)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 제안을 한다.
끼익. 가속이 붙어 팽팽 돌아가는 머리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기분이다.
아니, 그건 안 할래요..
하기 싫어요. 하지 말아 주세요.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던져진 수많은 질문에 아빠에게도 나에게도 무척 잔인한 선택을 해왔고, 앞으로도 해야 한다. 하나 정도는, 그냥 기분 따라 결정해도 되는 것 아닐까.
또 조금 나아지면 식사 시도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가련한 희망도 걸어본다.
내 문제가 잘 풀리고 있다는 것은, 반대로 아빠의 입장에서 뭔가가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빠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나마 위루관을 막아주는 것뿐.
아빤 알까 이 마음을.
사실은, 제발 몰랐으면 좋겠다. 내가 한 모든 선택들을.